소설리스트

테라포밍-15화 (16/497)

Chapter 15 - 15. 검은빛

-달칵

털썩

2층 문을 닫고 들어온 우리는 허물어지는 듯 쓰러졌다.

현관에 집주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신발들이 놓여있었지만, 그것들은 지금 당장 중요하진 않았다.

"지수야!"

"언니!"

우리는 축 늘어진 지수를 애타게 불렀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지수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니 열이 펄펄 끓는 게 느껴졌다.

식은땀을 잔뜩 흘리고 있는 얼굴.

목인에게 긁혀 붉게 물든 팔뚝.

나는 서둘러 팔 부분의 옷을 걷어 올려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머리가 하얘졌다.

긁힌 부위를 중심으로 핏줄이 파랗게 일어나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감염된 것처럼.

"···예린아."

나는 예린을 조용히 불렀다. 예린은 상처 부위가 드러나자 마자 안절부절못하며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긁히면 변해?"

"···아뇨. 지금까지 저도, 언니도 몇 번 긁힌 적 있었는데······.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다행이네."

그래. 다행이다.

긁혀서 괴물로 변하지 않는다면 아직 괜찮을 것이다. 아직은.

지금까지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나는 지수의 붉게 물든 팔뚝을 바라보았다. 피에 흠뻑 젖은 옷에서는 나무 인간들을 한껏 자극시키는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피 냄새를 풍기는 이 옷을 처리해야 한다.

나는 다 큰 여자의 옷을 벗겨야 한다는 것에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손을 뻗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자.'

"예린아. 오해하지 말고 들어."

"···?"

"우리가 여기에 숨으려면 이 옷을 벗겨서 처리해야 해. 무슨 말인지 알지?"

예린은 떨리는 눈으로 말없이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기도 도와주겠다는 듯 지수의 허리춤을 잡아 옷을 들어 올린다.

옷이 밀려 올라가면서 새하얀 배가 드러났지만 나는 애써 눈길을 돌려 겉옷을 벗기는 데만 정신을 치중했다.

다행히 안쪽에 반팔 티를 입고 있어서 더 민망한 상황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지수의 옷을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2층 내부는 또 다른 창고가 아닌 가정집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소파와 TV가 놓인 거실.

각종 기구들이 걸려 있는 부엌.

2개의 닫혀 있는 방문과 거실 쪽에 있는 작은 창문.

드르륵

거실 쪽 창문을 여니 그것들의 소리가 명확하게 들려온다.

우적- 우적- 콰긱- 우적- 까드득- 우적- 우적- 꽈지직-우적-우적-우적-

편의점 안으로 나무 인간들이 밀려들어오면서 바닥에 굴러다니는 캔이 터졌는지 무언가를 계속 찌그러트리며 정신없이 먹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리가 나중에 여기서 나가기 위해서는 내부에 있는 놈들을 조금이라도 더 멀리 유인해야 한다.

나는 예린이 힘들게 챙긴 가방을 열어 생수를 꺼내 지수의 옷을 적셨다. 조금이라도 멀리 던지기 위해.

킁킁 킁킁킁킁-!

내가 지수의 옷을 던지기 위해 창문밖으로 내보내니 바로 입질이 오기 시작했다.

편의점 안에 있는 목인들의 이목도 끌었으면 좋았겠지만 반응을 보인 것은 편의점 근처를 돌아다니는 목인들 뿐이다.

나는 지금은 더 급한 상황이 있다는 생각에 욕심부리지 않고 이 정도에 만족하기로 했다.

[시아아아아악!]

[크르르르아아아!]

피 냄새가 나는 옷을 향해 눈을 고정하고, 잡아채기 위해 위로 팔을 쭉 뻗은 목인들을 보자니 옷이 아닌 내가 그것들에게 금방이라도 끌려갈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옷을 창문밖으로 최대한 멀리 던졌다.

휙!

철퍽!

옷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목인들은 옷이 날아가는 궤적을 따라가더니 땅에 떨어지자마자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기 시작했다. 울대를 긁는 불쾌한 소리를 내면서.

찌지직! 찌이익- [키아아아아···]

드르륵!

나는 서둘러 다시 창문을 닫고 지수와 예린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지수의 얼굴에 연신 흐르는 식은땀을 예린이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닦아주고 있는 모습.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세상이 변해 버렸을 때부터?

내가 바보같이 지수에게만 의지했을 때부터?

나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내가 아무 말없이 쓰러진 지수를 들쳐업고 거실로 향하자 예린이 나를 졸졸 따라왔다.

나는 지수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쉴 수 있게 조심스럽게 소파에 그녀의 몸을 뉘었다.

"예린아. 여기서 언니 좀 봐주고 있어."

"오빠는요···?"

"나는···내 할 일을 해야지."

집 안은 조용하지만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 또 같은 실수를 할 수는 없어.

나는 도끼를 들고 닫힌 방문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두근! 두근! 두근!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거세게 박동했다. 나는 그럴때마다 도끼를 더 강하게 쥐었다.

끼이익-

닫힌 2개의 문 중 첫 번째.

이 방은 평범한 침실로 보였다.

침대 틀 없이 바닥에 놓인 매트리스, 벽면에 붙어 있는 옷장, 그 옆에 놓인 서랍장.

서랍장 위는 별다른 물건이 올려진 것 없이 단 하나의 액자만 올려져 있었다.

나는 액자를 들어 안에 있는 사진을 보았다.

편의점 앞에서 중년의 아저씨가 호탕하게 웃고 있는 사진···.

편의점 창고 안에 있던 목인과 매우 닮은 것 같다.

'······알바생이 아니라 사장님이었구나.'

한가하게 상념에 빠질 때가 아니다. 나는 방을 마저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먼저 옷장을 열어 보니 평상복이 몇 벌 걸려 있었다. 옷장 안에 붙은 거울에 내 모습이 비친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빼 갈아입었다.

'이제는 좀 사람 같겠지.'

땀기름에 젖어 눅눅해진 느낌을 주는 환자복을 벗어 던지고 사이즈가 맞는 옷들로 갈아입으니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옷걸이에서 옷을 빼내니 옷장 바닥이 드러났고 그곳에는···.

'구급 상자.'

나머지 방도 확인해야 하지만 나는 일단 구급 상자를 들고 거실에 있는 지수와 예린에게 갔다.

예린은 계속 땀 흘리는 언니에게 조금씩 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예린아. 좀 어때?"

"방금 살짝 정신 차렸다가 자는 것 같아요."

"···그래."

나는 구급 상자를 열어 안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바닥에 쏟아 냈다.

가정용 구급 상자라 대단한 건 들어 있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것들은 전부 있었다.

솜, 연고, 붕대, 소독약, 밴드, 감기약, 해열제···.

우선 '포비돈'이라 쓰인 소독약 뚜껑을 열어 상처 부위에 뿌렸다. 막대가 상처에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지수의 몸을 보니 아직 감각은 살아 있는 것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다음은 연고. 양 신경 안 쓰고 긁힌 부위를 따라 쭉 짜 넣었다. 너무 많이 짜 바른 것 같아 멈칫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신경 끄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붕대.

"예린아. 지수 팔 좀 들어 줘."

"네. 오빠."

예린은 내가 말한 대로 지수의 팔을 살짝 들었다.

치지직-

나는 붕대 비닐을 벗긴 후 또 다른 감염이 이루어지지 않게 지수의 팔을 붕대로 돌돌 감아서 묶어 주었다.

당장 할 수 있는 응급처치는 다 한 것 같다. 기분 탓인지 지수의 얼굴이 한층 편해 보였다.

예린은 귀가 축 처진 채로 하염없이 지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손을 들어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싶은 마음에 어색하게 손을 놀렸지만 효과는 괜찮은 것 같다.

"너무 걱정하지 마. 금방 털고 일어날 거야."

귀를 살며시 만져 주는 손길에 예린은 머리를 기대면서 말했다.

"······믿어도 돼요?"

"그럼!"

나는 일부러 웃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요? 저랑 같이 있어요···."

예린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불안한 눈빛으로 가지 말라 붙잡는다.

"금방 올 거야. 아직 확인 안 한 방이 있어서."

불안함에 떠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같이 있어 주고 싶은 마음을 굴뚝같지만 적어도 지금은 안 된다.

이곳이 위험한 곳인지 안전한 곳인지 확인해야만 하는 강박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닫힌 문 중 2번째.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도끼를 강하게 쥔 채로.

덜컥-

덜컥덜컥

문을 열려고 했으나 안에서 무언가 막고 있는 느낌에 문이 열리지 않는다.

'열어? 그냥 이대로 봉인?'

나는 잠시 고민했고 문을 강제로 열기로 결심했다.

뚜둑! 뚝!

푸시익···

문고리를 잡고 강하게 밀자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조금씩 열렸다.

이윽고, 방의 내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켈록-콜록!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열린 방은 화장실이었고, 화장실에 달린 작은 창문을 통해 넝쿨이 비집고 들어와 있었던 것이었다.

넝쿨은 느껴지는 물기를 탐하기 위해 화장실 안을 전부 뒤덮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사람 얼굴만 한 무언가가 넝쿨 줄기의 끝에 붙어 있다는 것이다.

"시발···. 저건 또 뭐야."

고치? 봉오리? 알? 그냥 넝쿨이 뭉쳐진 건···아니고.

자세히 보니 보라색 가루같은 게 떠다니는 것 같기도 하다.

"······오빠? 왜 그래요?"

거실 쪽에서 예린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지수랑 같이 다닌 예린이라면 이게 뭔지 알지 않을까?

"예린아. 잠깐 와줄 수 있어?"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도도도 하는 소리와 함께 예린이 내 허리춤에 폭 달라붙었다.

나는 내가 발견한 것을 손으로 가리켰다.

"혹시 저게 뭔지 알아?"

예린은 눈가를 찡그리며 내가 가리킨 곳을 보았고 몸을 조금씩 떨기 시작했다.

"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보여요."

"어?"

"···검은색이 보여요."

-검은빛이 있는 곳은 무조건 위험.

나는 사형 선고와도 같은 예린의 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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