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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16화 (17/497)

Chapter 16 - 16. 보라색 가루

금단의 상자를 열어 버린 판도라의 기분이 이런 느낌일까.

문이 쉽게 열리지 않았을 때 그냥 물러났어야 했는데.

우리의 안전을 위해 한 내 행동이 도리어 우리의 숨통을 조여 왔다.

'아니. 문을 열었든 열지 않았든 저게 있는 이상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을 거야.'

나는 떨리는 손으로 예린의 손을 잡았다.

"혹시 그 검은색이 어떻게 보여?"

"저···음. 덩어리···? 같은 거 중심에서 검은색이 작게 보여요."

"···작게? 작게 보이는 건 덜 위험하다는 거야?"

예린은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지금까지 보였던 검은색 중에서 제일 작아요."

"······."

"하지만 위험하다는 건 분명해요."

그래. 저게 위험하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내가 저걸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위험을 제거하겠다고 도끼로 저걸 부순다면, 우리는 안전해질 수 있는가?

섣부른 내 행동이 우리 쪽으로 향한 총구의 방아쇠를 당기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렇다고 내버려 두었다가 저게 더 위험하게 변한다면?

「하나가 되자.」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여기서 더 위험해지면 감당 못해.'

나는 도끼를 잠시 내려놓고 주먹으로 머리를 퍽퍽 쳤다.

갑작스러운 나의 이상 행동에 예린이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예린아. 너에게 보인다는 검은색. 혹시 여기 말고 다른 곳에도 있어?"

"···한 번 볼게요."

예린은 내 손을 꼭 붙잡은 채로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집이 큰 편은 아니라 침실, 부엌, 거실을 한 바퀴 돌았음에도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없어요. 저 화장실에만. 넝쿨에만 있어요."

화장실을 제외하면 이 집은 안전하다는 말이겠지.

나는 내 행동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예린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내가···. 내가 저걸 부순다면 우리는 안전해질까?"

"······."

예린은 입술만 달싹이다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조금씩 살랑거리려던 꼬리도 다시금 푹 늘어졌다.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아냐. 괜찮아."

어차피 저걸 부수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고, 다시 문을 막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예린이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화장실 내부를 다시 바라보았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넘어온 굵은 줄기의 넝쿨들, 그 끝에 맺혀 있는 무언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그것은 건드리는 순간 터질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불길했다.

'하다못해 저 창문이라도 닫을 수 있었다면···.'

창문을 닫기 위해서는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화장실 바닥에는 넝쿨이 발 디딜 틈도 없이 깔려 있어 무조건 밟을 수밖에 없다.

문을 열 때 넝쿨이 조금 뜯어지긴 했지만, 이 이상 자극을 더 주면 위험할 것 같기도 했고 그냥 화장실 문을 더 확실하게 막기로 결정했다.

-달칵

나는 화장실 문을 닫고, 무릎을 꿇어 예린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제부터 이 문을 막을 거야. 도와줄 수 있지?"

"네."

"얼른 막고 지수 상태 같이 지켜보자."

예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침실과 부엌을, 예린은 거실을 뒤져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가져오기로 하고 흩어졌다.

좀 더 구석구석 뒤져 보았으나 생각보다 건질 게 별로 없었다.

침실에서는 남은 옷가지와 벨트 그리고 이불, 부엌에서는 가위와 식칼을 구할 수 있었다.

부엌에서 추가로 식량을 구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냉장고는 텅 비어 있어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찬장에는 각종 조미료들이 있었지만 밀폐되지 않은 탓인지 뿌연 보라색 가루 같은 게 묻어 있어 도로 내려놓았다.

'조미료는 있는데 정작 재료가 없다니 식칼은 왜 있는 거야?'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이 아래층이 이마트 편의점이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무기 대용으로 쓸 만한 게 식칼뿐이기에 나는 식칼을 품에 넣어 보관했다.

'식칼을 감싸지 않은 게 신경 쓰이지만 가죽 옷이라 조금은 괜찮겠지.'

잠시 후, 우리는 각자 챙겨 온 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예린은 달랑 청테이프 하나를 들고 왔기 때문인지 눈치를 심하게 보고 있었다.

소파에 누워 있는 자기 언니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으니 탐색에 집중이 될 리가 있나.

나는 피식 웃으며 예린의 귀를 살살 만져 주었다.

"잘했어. 제일 필요한 걸 가지고 왔네."

조금씩 펴지는 예린의 귀와 살랑거리기 시작하는 꼬리를 보며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여분의 옷가지]

[가위]

[청테이프]

[솜이불 한 장, 여름용 이불 한 장]

[가죽 벨트]

이제는 이걸로 어떻게 문을 막을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그냥 테이프로 문틈을 막아?'

제일 중요한 건 넝쿨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막는 것이다.

그동안 비도 몇 번 왔으니 넝쿨이 화장실 문을 강제로 넘어 온 집안을 뒤덮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데 넝쿨은 화장실에만 있을 뿐 그 이상으로는 넘어가지 않았다.

왜?

···자꾸만 그 덩어리가 신경 쓰인다.

넝쿨 끝부분에 맺힌 봉오리 같은 것. 만약 그게 개화한다면-.

나는 불길한 상상을 애써 털어냈다. 문만 빈틈 없이 막으면 괜찮을 것이다.

찌이이이익- 찌이익-

나는 테이프를 길게 찢어 문틈을 막았다.

총 4개의 빈 틈. 특히 문 아래 쪽은 틈이 좀 더 컸기에 신경 써서 테이프로 도배하다시피 붙였다.

추가로 솜이불을 문에 바싹 붙여 테이프 사이의 공기 구멍도 막아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솜이불에 물을 먹여 완벽하게 틈을 막고 싶었지만 물기를 흩뿌리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됐다."

"끝났어요?"

"응. 그래도 이쪽으로는 가지 마."

"네!"

나는 예린과 함께 거실로 돌아가 지수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지수는 이제 식은땀도 흘리지 않고 옅은 숨소리를 내며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예린은 내 손을 놓고 언니 곁으로 가서 앉았다.

나는 거실의 작은 유리창 너머로 밖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아래에 있는 편의점에서는 더 이상 먹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해는 완전히 저물어 뚜렷하지는 않았으나 안에 있던 나무 인간들이 어기적거리며 거리로 나와 배회하는 것이 보인다.

그때.

꼬르르륵-

벌써 밥을 먹을 시간인가 하면서 내 배를 만졌지만 내 배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예린이 빨갛게 변한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모르는 척 해줘야겠다.'

나는 마지막으로 거리에 돌아다니는 목인들을 힐끗 돌아본 뒤 말했다.

"밥 먹자."

예린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예린이 힘겹게 들고 온 가방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가방이 현관 쪽에 있는 것을 발견했고, 내가 가져오려고 했지만 어느새 벌떡 일어난 예린이 낑낑거리며 가방을 들고 왔다.

덤으로 한 손에는 운동화도 한 켤레 들고 왔는데 예린은 그 신발을 바로 나에게 내밀었다.

"오빠. 이거 신어요. 집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고마워."

나는 예린이 나를 챙겨주는 그 모습에 옅은 웃음이 나왔다. 신발을 받아 신어 보니 사이즈도 얼추 맞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지이이익-

가방을 여니 각종 통조림 캔과 생수가 보인다.

부스럭-바스락-

"먹고 나면 여기에 넣어야 해요."

"아. 냄새 퍼질까 봐?"

"네."

예린이 작은 검은 비닐 봉투 한 장을 뜯어내밀었다.

그 후 우리는 적당히 먹을 것을 고른 후 사이좋게 붙어 앉아서 먹기 시작했다.

우물우물 우적-쩝쩝

말없이 먹기만 하고 있을 때 지수가 몸을 뒤척였다.

"흐으으···."

"언니!"

예린이 급하게 일어나 지수에게 가서 얼굴을 매만졌다. 지수는 눈가를 파르르 떨더니 눈을 떴다.

"···무울······."

"어, 어! 잠시만!"

나는 생수를 따 지수의 입가를 축여 주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이 말고 조금씩 적시는 수준으로.

꿀꺽꼴깍

"후우······."

"괜찮아? 몸은 어때? 더 아픈 곳은?"

"괜찮아."

"···다행이다. 정말로."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지수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우물쭈물거린다. 의아하게 쳐다 보니 지수가 입을 열었다.

"···미안."

"뭐가?"

"창고에서 망설인 거······."

생각났다.

한 시가 급한 상황인데 자꾸만 멈칫거리는 그녀가 답답하게 느껴져 결국 강제로 도끼를 빼앗다시피 가져갔었지.

그때는 화가 났지만 무사히 살아난 지금은 어떤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할 뿐이다.

"됐어. 무사했으면."

"···응."

바스락바스락-

어느새 밥을 다 먹은 예린이 뒷정리하고 있었다. 지수는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배고프지? 뭐 먹을래?"

지수는 내 말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지금은 좀 쉬고 싶어."

"그래. 푹 쉬어. 이번엔 내가 지켜 줄 테니까."

호박색의 눈동자가 나를 가늠하겠다는 듯 뚫어져라 쳐다본다. 이내 눈초리가 휘어지며 살풋 웃는다.

"응. 믿어."

달빛이 반사되어 아름답게 빛나는 눈동자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때 옆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크흠! 언니. 안 추워?"

"어···?"

지수는 예린의 말에 고개를 내려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겉옷 없이 얇은 반팔만 남아 몸의 굴곡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

지수가 얼굴을 확 붉히며 다치지 않은 손으로 가슴께를 가리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돌리며 황급히 말했다.

"···오해하지 마. 상처랑 피 냄새 때문에 그런 거야. 진짜야."

"괜찮아. 믿는다고 했잖아."

예린은 내가 가져온 옷가지를 뒤적거리더니 멀쩡해 보이는 겉옷을 들고 지수에게 건넸다.

"언니. 이거 입어. 이게 그나마 낫다. 자, 팔 들어봐."

"고마워."

부스럭부스럭

지수는 한쪽 팔을 들어 예린이 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기 편하게 몸을 움직였다.

휘이이이잉-

거친 바람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집 안에 퍼진다. 손을 휘저어 내부 공기를 느껴보니 기온이 떨어졌는지 찬기가 느껴졌다.

비가 자주 왔던 걸 보면 여름인 것 같은데 급격한 기온 변화는 뭔지 모르겠다.

여름이 일교차가 심하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 차이는 선을 넘는 느낌이다.

예린은 시린 손을 비비며 앉아 있는 지수의 옆에 꼭 붙어 온기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이불만 가져오려다가 침실에서 매트리스까지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좀 춥지? 이거 이불 얇긴 한데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여기 매트리스에 편하게 누워서 쉬어."

"···아저씨는?"

"오늘은 불침번 설게."

"나도-."

"씁! 아직 다 낫지도 않았으면서. 적어도 오늘만큼은 푹 쉬어."

"······응. 고마워."

그 말을 끝으로 지수와 예린은 매트리스에 누워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실은 조용한 숨소리만이 남았다.

색- 색-

나는 한동안 그녀들이 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갓 성인이 된 여성과 아직 어린 여자애.

온갖 위험이 도사린 이 세상에서 여자 둘이 살아남기에는 힘에 부쳤을 게 분명하다.

낮에는 놈들에게 쫓기고, 밤에는 놈들이 나타날까 숨을 죽이는 상황의 반복.

특히 지수는 어린 동생을 챙기느라 편히 자본 날이 없을 것이다.

나를 주운 그날 밤에도 편히 자지 못했겠지.

나는 알고 있다.

나보고 빨리 자라고 말했던 그녀는 내가 잠이 들 때까지도 가끔씩 눈을 뜨며 주위를 경계했다는 것을.

"후우······."

차오르는 답답함을 한숨으로 뱉어냈지만 해소가 되지 않았다.

밤은 깊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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