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 - 17. 움직이는 넝쿨 (1)
지수와 예린이 덮은 이불이 꿈틀거린다.
쫑긋!
이불 아래서 움직이고 있는지 울룩불룩해지다가 이불 귀퉁이가 젖혀지며 검은색 귀가 튀어나왔다. 이어서 호박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나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 자?"
"아니. 불침번 선다고 했잖아."
지수는 잠에 푹 빠진 예린을 깨우지 않기 위해 몸을 살살 일으키더니 내가 앉은 소파에 같이 앉았다.
"자라니까. 피곤할 텐데."
"아까 많이 자서 그런가? 잠이 안 오네."
한동안 우리는 침묵을 유지했다. 다만 그 침묵은 마냥 불편하지 않았다.
"······생존은 관성이야."
지수는 축 처진 자기 꼬리를 껴안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갑자기?"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에 그녀를 떨떠름하게 쳐다보았다. 지수는 잠자코 들으라는 듯 이어서 말했다.
나는 그녀의 태도에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려고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어쩌다 한번 살기 시작하면 뒤에서 떠밀리는 대로 사는 거지."
"······."
"그러다가 한번 멈추면···."
"멈추면?"
"다시는 못 움직이지, 뭘."
특히 이런 세상에서는-
지수는 작게 웃었다.
"넘어진 상태에서 일어나서 다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아?"
"···글쎄. 많진 않겠지. 이런 세상이면."
"있잖아. 우리···. 아저씨가 처음이 아니야."
"···?"
처음이 아니라고? 무엇이?
"살아 있는 사람을 본 거 말이야.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아."
"지금이 7월 즈음 되었을려나? 참 많은 일이 있었지."
"무슨 일이 있었는데?"
나는 손에 땀이 차는 것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나와 예린이는 친자매가 아니라는 건 알지?"
처음 소개할 때 성이 다른 걸 보고 그건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굶주림에 지쳐 결국 못 버티고 밖으로 나왔는데, 얼마 못 걷고 쓰러진 적이 있었어. 아, 이제 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었지."
"······."
"그런데 눈을 뜨니까 멀쩡히 살아 있더라구. 내 집도 아닌 전혀 모르는 집에서. 내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한 가족이 내게 다가왔어. 엄마, 아빠, 딸로 이루어진 가족이었지."
"그 가족이···."
"응. 예린이네 가족."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다른 사람없이 지수와 예린만 있었다. 그렇다는 건 그 두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나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기로 했다.
"나는 처음에 내 몸이 목적인 줄 알고 경계했는데 그건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지. 아저씨와 아줌마는 사이가 좋았거든. 아줌마 쪽은 변이가 잘못되었는지 온몸에 고양이 털이 수북하게 나 있었는데 아저씨는 그게 더 좋다며 좋아했으니 말 다 했지."
"······."
"그 모습에 나는 이 사람들은 믿어도 되겠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우리는 같이 다니기 시작했고. 군대가 우릴 구조해 줄 거라는 희망을 품은 채."
"······."
"그러다 거짓말처럼 군대가 왔고, 포격을 쏟아부으며 조금씩 전진하는 모습에 우리는 희망을 가졌었어. 하지만······."
지수는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저 도끼만 남았어. 예린이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아···."
나는 비극적인 결말에 탄식을 내뱉었다.
"그 뒤로 나는 예린이를 지키기 위해 뭐든 했지. 드물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도움도 청해 보고, 빌어도 봤지만 돌아오는 건 거절과 배신 뿐이었어. 우리 몸을 노리고 덮치는 것들도 있었고······."
"설마-."
"그 전에 내가 골통을 부쉈지만! 문제는 나 였던 것 같아. 약해 보이니까 수작을 부리는 구나 하는 생각만 들더라."
나와 지수는 다시 한동안 침묵 속에 있었다. 지수는 코가 막히는지 조금씩 코를 훌쩍이다가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열었다.
"얘기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네. 나는 그냥 미안하고 고맙다는 걸 말하고 싶었는데."
"뭐가 미안하고 고마워?"
"창고에서 망설인 거, 우릴 버리지 않은 거."
"내가 너희를 왜 버려? 그런 생각 하지 마."
지수는 몸을 움직여 나와 조금 더 가깝게 붙어 앉았다.
"그때는 무서웠거든. 내가 이 도끼마저 주면 우릴 버리고 가지 않을까···. 이번에도 버려지면 예린이는 어떡하지···. 이런 생각만 들었어. 이상하지? 우리가 만난 지 하루밖에 안됐는데 말이야."
그녀는 잠시 킥킥 웃었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예린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수 없어. 하지만··· 죽는 건 쉽고, 사는 건 어려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죽었어. 내 친구들도, 부모님도. 남은 건 예린이 뿐이야."
"······."
"그러니까 앞으로도 우리 버리지 마. 응···?"
그래. 죽는 건 쉽다.
쉬워서 문제다.
나는 말없이 지수의 어깨를 토닥이며 생각했다.
항상 강한 겉모습을 보여주던 지수도 여린 속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속내를 다 보여줬지만 그동안 여러 경험을 하면서 얕잡아 보이지 않게 일부러 도끼를 내세워 몸을 부풀리고 있었던 거겠지.
내게 기대고 싶은 마음을 표출하는 지수였지만, 나는 아직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정하지 못했다.
나는 남산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사태의 원인과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라는 이유는 아니다.
「하나가 되자. 나는 널 기다리고 있단다.」
무언가가 자꾸 위로 가야 한다고 마음을 부추기고 있는 기분이 사라지지 않는다.
사태의 진원지로 추정되는 남산으로 가는 길은 매우 위험하고 힘든 길이 될 것이다. 그런 길에 지수와 예린을 데리고 갈 수는 없어.
나는 고개를 돌려 이젠 어깨에 기대고 자는 지수를 바라보았다.
조용한 숨소리를 내며 눈가에 붙은 눈물조차 닦지 못한 채 자는 그녀의 모습.
'안 졸리다더니 갑자기 자네···.'
얘기 하다 도중에 잠들었지만 못다한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하면 된다.
나는 지수의 눈가를 살며시 쓸어 주며 그녀가 한 얘기를 차근차근 머릿속에 정리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생기는 의문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완전히 고양이 털로 덮인 사람.
지수와 예린에게 있는 동물 귀와 꼬리.
지수가 말할 때 어색함을 느끼지 않은 걸 보면 그때의 그녀에게는 그게 당연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외형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나와 그녀들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3월부터 7월까지의 기억이 사라진 것도 이상하다.
단순히 내가 그 기간 동안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기에는 길 한복판에서 눈을 뜬 것이 의문이고.
그렇다면 다른 요인에 의해 기억을 잃었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럼 대체 무엇에 의해 기억을 잃었는가가 의문이다.
4개월 동안 나는 무엇으로 영양분을 섭취해 살아왔는가?
또 내심 신경 쓰이는 것 한 가지.
'나이 차이도 5살밖에 차이 안 나는데 왜 아저씨라고 부르는 거야······.'
이런저런 생각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툭-
투투둑 쏴아아아아아-
무언가 창문을 툭툭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점차 커지며 이윽고 쏟아지는 소리로 바뀐다.
비.
또 비가 내린다.
예전에는 빗소리 듣는 것을 참 좋아했지만,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빗소리는 더 이상 내게 편안함을 주는 소리가 아닌 경고를 하는 소리로 바뀌었다.
나는 품속에 식칼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화장실 문을 노려봤다.
내가 섣불리 건들지 못했던 그것.
비가 오지 않았다면 조용히 밤을 넘길 수 있었는데 신이 장난이라도 쳤는지 하필 지금 비가 내린다.
나는 온 신경을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로 귀로 쏟았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는 그녀들의 숨소리와 창가를 치는 빗소리뿐이다.
그 뒤로 한동안 더 침묵이 이어졌다. 여전히 귀에 거슬리는 특이한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예린이가 검은색이 보인다고 했으니 방심은 금물이다.
···쯔······즉
마음의 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이질적인 소리가 화장실에서 들려오자 나는 흠칫 놀라며 얼굴을 굳혔다.
츠즈···즈즈······즉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자는 지수와 예린을 깨우기 위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츠즈즈즉!
치이이이···
비가 오기 전에는 달빛이 거실을 비춰 사물을 분간할 수 있었는데 어느새 먹구름이 달을 다 가렸는지 지금은 겨우 실루엣만 알아볼 뿐이다.
화장실은 집의 구석진 곳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더 어둡게 느껴져 나는 더욱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푸쉬이이익······
조금 더 명확하게 들리는 소리.
무언가 새는 느낌이 드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가스가 새는 듯한······.
'설마.'
나는 자는 지수와 예린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얘들아. 일어나 봐. 빨리···!"
내가 흔드는 세기를 점차 더해가도 그녀들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왜, 왜 안 일어나는 거야···! 얘들아, 제발!"
···쿵! ···쿵! ···쿵!!
무언가가 화장실 문을 강제로 열기 위해 두드리는 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씨발!"
나는 그녀들을 깨우는 것을 뒤로하고 품속에서 식칼을 꺼내 꼬나쥐었다.
두근! 두근! 두근!
차오르는 긴장감에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뜨드득-
쾅!
쏴아아아아아-
문틈을 막은 테이프가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날아갈 듯 세게 열렸고 빗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끼이이이이]
그리고 움직이는 넝쿨이 칠판을 긁는 소리를 내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흐릿한 연기를 내뿜으며.
"케흑! 콜록콜록-."
그 연기는 넝쿨의 봉오리 부분에서 나오고 있었고 줄기를 타고 흘러 바닥을 서서히 점령하기 시작했다.
푸화아아악!
봉오리가 열리며 좀 더 짙은 연기를 사방으로 흩뿌렸고 그 연기를 마신 지수와 예린은 좀 더 깊은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지는 듯했다.
"하."
결국, 내 행동이 이 사단을 만들어냈구나.
처음 봤을 때 망설이지 말고 도끼로 찍어 버렸어야 했는데. 무엇이 그리 무섭다고.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냥 봉오리를 없애버리는 걸 시도라도 해 볼 걸 그랬다.
아니, 아직 완전히 늦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애써 그리 생각하며, 식칼을 내세운 채 봉오리를 향해 달려 나갔다.
부웅-!
그 순간,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굵은 넝쿨 줄기가 휘둘러졌다.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