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 - 18. 움직이는 넝쿨 (2)
쾅!
넝쿨 줄기가 바닥을 내려찍으면서 바닥에 쌓인 연기가 확 밀려나 맨바닥을 드러냈지만 이내 다시 흐르는 연기로 빈자리가 채워졌다.
나는 그런 넝쿨의 움직임에 급하게 다리에 제동을 걸어 멈춰 섰다.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는 넝쿨.
지금까지 봐온 넝쿨은 그저 멀리 퍼지기만 하는 수준이었는데 지금 이 넝쿨은 달랐다.
내가 식칼을 들고 봉오리를 제거하기 위해 움직이자 이 넝쿨은 분명 나를 막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줄기를 휘둘렀다.
"하하···."
나는 허망함에 웃음이 나왔다.
급성장하는 넝쿨도 막을 수 있는지 의문이었는데 이제는 지성을 가진 넝쿨이라니?
넝쿨은 내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마냥 기다려 주지 않았다.
부우웅!
다시금 휘둘러 지는 넝쿨 줄기가 명백히 나를 노리고 위에서 아래로 쇄도한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는 속도였지만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몸을 움직여 피하게 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내 뒤에 있는 그녀들이 받게 될 것이다. 설마 노린 건가?
뻐억!
쿵!
"큭!"
나는 급하게 팔을 교차해 줄기를 막았다. 그리고 충격을 이기지 못한 다리의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끼이이이이-]
츠츠츠츠츠-
그때 또 다른 넝쿨 줄기가 바닥을 타고 뱀처럼 기어가더니 예린의 얼굴을 더듬었다. 줄기의 끝이 예린의 입가를 만지다가 서서히 위로 올라가며 눈가를 심하게 더듬기 시작했다.
"안 돼!"
나는 이를 악물고 박 차고 일어나 식칼로 줄기를 베기 위해 강하게 휘둘렀다.
칼과 줄기가 맞닿는 순간.
-깡!
챙···
예상치 못한 충격이 칼을 타고 흘러 손에서 진동해 칼을 놓치고 말았다. 줄기는 잠시 멈칫거렸을 뿐 멀쩡해 보였다.
'무슨 줄기가···.'
지성이 있는 것도 모자라 줄기마저 이렇게 단단하다고?
'식칼이 안 된다면 도끼로 찍어 버리면 그만이야.'
나는 소파 옆에 세워진 도끼를 들어 위로 치켜들었고 그대로 내리쳤다. 아직도 예린의 얼굴을 더듬고 있는 줄기를 향해.
콰직!
푸쉬이이익!
이번에도 저항감은 느껴졌으나 줄기는 반 이상 갈라져 체액을 사방으로 내뿜었다.
[끼아아아아!!]
고통을 느끼는지 울부짖는 봉오리.
그 비명 소리에는 감히 자기를 다치게 했다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팍!
나는 곧바로 도끼를 다시 휘둘러 꿈틀거리는 줄기를 완전히 잘라 냈다. 체액이 내 눈가에 튀어 시야를 막았다.
눈가를 세게 문질러 체액을 닦아냈다. 멈칫거릴 시간은 없었다.
겨우 줄기 몇 가닥을 잘라 냈다고 끝이 아니다. 아직 본체로 추정되는 봉오리가 건재하지 않은가.
어느새 빈틈을 노리고 또 다른 줄기 하나가 내게 달려들고 있었다.
나는 도끼를 내세워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쩌억!
휘리릭!
그러나 예상했던 강한 충격은 없었다.
소리와 함께 줄기가 도끼에 박혀 들었고, 또 다른 줄기가 도끼를 빼지 못하게 휘감았을 뿐.
"어?!"
당황하며 줄기로부터 도끼를 회수하기 위해 힘을 줘서 당겨봤지만 요지부동인 소방 도끼.
부우웅-
뻐억!
그 순간, 무언가가 내 머리를 강타했다.
삐이이이이-
시각과 청각이 동시에 먹먹해지고 이명이 머리에 강하게 울렸다.
풀썩
나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거리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흐릿해진 시야에 봉오리가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번쩍!
우르르르르릉 쏴아아아아아아-
순간 시야를 환하게 밝혀주는 번개와 요란한 천둥소리가 애써 내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더한 절망감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봉오리가···하나가 아니야?'
화장실의 열린 창문을 타고 넝쿨이 조금씩 넘어오는데 눈에 익숙한 덩어리도 같이 넘어오고 있었다.
···또 다른 봉오리였다.
"끄으으윽-!"
나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 아직 줄기에 묶여 있는 도끼를 한 손으로 강하게 쥐었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식칼을 들어줄기 사이의 틈을 비집고 박아 넣었다.
온 힘을 다해 줄기를 찢듯이 식칼을 움직이자 줄기는 조금씩 뜯어졌다.
뜨드득-!
마침내 줄기에게서 도끼를 구해 낸 나는 집을 넝쿨로 뒤덮기 시작한 광경을 보며 좀 더 뒤로 물러나 정신을 잃은 지수와 예린을 바라보았다.
쿵! 쿵! 쿵! 쿵! 쿵!
심장이 정도를 모르고 거세게 고동친다.
처음에는 피곤에 지쳐 잠든 줄 알았는데 이 정도 소란에도 깨지 않는 걸 보면 저 변종이 내뿜는 연기에 수면 효과가 있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왜 나한테는 통하지 않았지?
저 넝쿨은 왜 예린의 눈에 집착하는 거고?
[끼이이이이-]
변종 넝쿨이 나를 향해 스멀스멀 가까이 다가온다. 시각 기관도 없어 보이는데 그것은 나를, 아니 우리를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봉오리가 점차 커진다.
사람 얼굴만 했던 그것은 어느새 집 안을 꽉 채울 것처럼 거대해졌다.
쩌어어어억
봉오리가 개화하듯이 조금 부풀었고 이내 6갈래로 갈라져 속살을 보여 주었다.
그 속에는 아름다운 꽃 대신 텅 빈 공간이 있었다.
"······뭐야."
멍하니 기이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푸화아아악!
그 순간, 우리를 향해 쇄도하는 줄기들.
한 두 개 라면 어떻게든 막아보겠지만 내 사방을 점거하며 몰아치는 줄기는 이미 보이는 것만 6개.
'저걸 어떻게 막으라는 거야.'
저 변종의 목적은 지금 당장 우리를 죽이는 게 아닐 것이다. 죽이는 게 목적이었으면 나는 이미 수십 번 죽었을 테니까.
몇 번 막지도 못했지만 몸은 이미 한계라며 비명을 지른다. 애초에 체급도, 내구성도 맞지 않는 싸움이었다.
나는 도끼를 놓지 않은 채 지수와 예린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적어도 이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도망치지는 않을 것이다.
'어디로 가든 서로 떨어지지만 않으면 살 방법이 있을 거야···.'
촤아아악-
줄기가 나와 그녀들을 강하게 묶으면서 잡아당겼다. 거대한 입을 쩍 벌린 봉오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시야가 더욱 어두워졌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줄기가 가닥가닥 몸을 휘감고 있어 그것은 미약한 몸부림에 불과할 뿐이었다.
줄기는 나와 지수의 허리를 휘감았고 양팔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도끼를 내려놓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쥐었다. 예린도 놓치지 않기 위해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하지만 변종 넝쿨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줄기를 휘둘러 내 머리를 강타했다.
뻐억!
"컥!"
머리를 강타한 연이은 충격에 내 몸은 더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
"안 돼······."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또 다른 봉오리가 예린을 따로 포획해 어딘가로 데려가는 모습이었다.
열린 봉오리는 서서히 닫히기 시작하더니 내 시야가 점점 좁아지는 것과 함께 완전한 어둠만이 남았다.
콱!
***
「죽지마, 현우야.」
···쿵 ···쿵 ···쿵 ···쿵 ···쿵
내 머릿속을 웅웅 울리는 어떤 목소리.
나는 정신을 헤집는 고통과 기시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어둡다.
이번에도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결국 그 변종한테 죽은 것일까?
···쿵 ···쿵 ···쿵 ···쿵 ···쿵
내가 있는 공간이 진동하며 어딘가로 향하는 느낌이 든다.
나는 팔을 움직여 이 공간을 파악하려고 했지만 흠칫 놀라고 말았다.
내 양팔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지수를 꽉 껴안고 있었고 손에는 도끼가 쥐어져 있었다.
무의식중에도 도끼를 얼마나 강하게 쥐었는지 손에 피가 통하지 않는 느낌이 뒤늦게 들었다.
지수와 도끼가 보이고 감각이 느껴진다는 건······.
우리는 아직 봉오리 안에 갇혀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저릿한 왼쪽 팔을 움직여 지수를 깨워 보기로 했다.
"지수야···. 지수야!"
"흐으으······."
내가 지수의 어깨를 흔들고 얼굴을 툭툭 치면서 부르자 반응은 보이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혹시나 지수가 영영 눈을 뜨지 못할까 봐.
그리고 나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건 다른 봉오리에 포획된 예린의 상태.
봉오리에 갇힌 우리도 당장은 살아 있으니 예린이도 제발 살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
···쿵 ···쿵 ···쿵······
-쿵!
"억!"
멈췄다.
흔들리면서 쿵쿵거리는 소리는 점차 드물어지더니 완전히 멎었다. 마지막에 봉오리가 땅에 떨어졌는지 바닥에 부딪치는 충격이 느껴졌다.
츠즈즈즈즈-
소리가 멎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갇힌 봉오리가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수축하기 시작했다.
"이런 씹?!"
그렇지 않아도 좁은 공간이 답답한 느낌을 주었는데 여기서 더 조여지기까지 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갑자기 작아진다고? 이대로 압사당하나?
나는 지수를 완전히 내게 기대게 만든 후 도끼를 들어 점점 가까워지는 껍질을 밀어내기 위해 도끼날을 가져다 대었다.
부스스스 트드득-
찌지지직
껍질이 단단할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봉오리 껍질은 도끼날과 부딪치자 비닐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바깥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환한 빛이 확 들어와 눈을 감아도 눈을 부시게 해 찡그리게 만들었다.
너무 쉽게 풀리는 상황에 오히려 또 다른 함정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일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예린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고개를 살며시 바깥으로 내밀어 주위를 훑어보았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생각할 정도로 내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
"···없어."
돌아다니는 나무 인간이 없었다.
쿵쿵거리는 소음이 작지 않았는데 주위에 보이는 나무 인간들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나는 잠시 지수를 봉오리 안에 두고 도끼를 쥔 채 밖으로 나왔다. 완전히 밖으로 나오니 주변의 모습이 좀 더 자세히 보였다.
먹구름없이 맑고 푸른 하늘.
3차선 도로 한가운데 활동을 멈춘 말라비틀어진 봉오리 하나.
넝쿨과 수풀은 있지만 돌아다니는 목인이 없어 안전해 보이는 거리.
하지만.
"안 돼······."
예린이가 들어 있어야 하는 두 번째 봉오리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오직 넝쿨, 넝쿨, 빌어먹을 넝쿨!
예린이 사라져 버렸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