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9화 (20/497)

Chapter 19 - 19. 실종 (1)

예린이가 사라졌다.

다른 봉오리가 나와서 예린이를 따로 잡아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 혼자서 그것들을 막는 것도 무리였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그 변종 넝쿨이 태도를 바꿔 우리를 죽이려고 했다면?

나는 그저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는 방법을 택한 것뿐이다.

"내가 도대체 어떻게 했어야 하냐고······."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만난 지 겨우 이틀, 아니 이제 사흘이었지만 지수가 예린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나 또한 예린을 소중하게 지켜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를 오빠라 부르며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예린.

무서운 상황에서도 가방을 챙겨 일행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예린.

왜 그것은 예린을 따로 데려간 것일까? 넝쿨이 그 아이의 눈가를 더듬었던 것과 관계가 있나?

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둡고 질척한 내 마음과 달리 맑고 푸르기만 한 하늘.

땅의 일은 자신과 관계없다는 듯 흰 구름은 그저 고고하게 하늘에서 흐를 뿐이다.

예린이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우리와 달리 봉오리에 그대로 먹혀 버렸다면.

그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우리가 왜 이런 일을 겪으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휘이이이이잉-

부스스스스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오고 수풀이 자기들끼리 비벼져 소리를 낸다.

지수의 상태도 봐야 하는데 온몸에 힘이 빠져 움직이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끄르르르륵]

순간, 나는 확 정신을 차렸다.

멀지 않은 곳에 나무 인간의 목 긁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 주위를 경계했고, 이내 한 무리의 나무 인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쉬익! 스으으으-]

[끄으으으으윽]

[···고파······배고···]

나는 당장 몸을 숨기기 위해 지수를 눕혀 놓은 봉오리 곁으로 움직였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지수가 있는 이상 그것들에게 들키면 끝장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숨을 죽였지만 예상을 벗어난 나무 인간들의 움직임에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목적지도 없이 그저 앞으로만 계속 이동하던 나무 인간 무리들은 우리가 숨어 있는 봉오리가 있는 3차선 도로까지 오더니 멈춰 선 것이었다.

데굴

끄드드득

선두에 서 있는 나무 인간이 눈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전방의 모습을 훑어 보다가 몸을 서서히 돌려 자기들이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갔다.

[으우어어어어······]

후열에 뒤따르고 있던 나무 인간들도 선두가 방향을 돌리자 그저 멍하니 있다가 자기들도 따라서 방향을 바꿔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 3차선 도로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는 것처럼.

자신들은 그 선을 넘어갈 수 없다는 듯이.

"···뭐지?"

그것들이 우리를 발견하기 직전에 극적으로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당장 숨통은 트였기 때문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끄으윽···."

그때, 지수가 몸을 움찔거리며 신음을 냈다.

나는 지수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나 싶어 옆으로 바싹 붙었고 잠시 기다리자 그녀가 눈가를 파르르 떨며 살짝 눈을 떴다.

"아저씨···?"

"···응. 나 여기 있다."

"여기 어디······."

"······."

"나···몸이···안······."

"괜찮아. 억지로 움직이려고 하지 마. 그러다 다칠라."

"미안···."

지수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축 늘어트리더니 다시 깊은 잠에 빠진 듯 고른 숨소리를 냈다.

미안하다고 하지 마.

미안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네가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고 싶어 하는 예린이를 내가 지키지 못했단 말이다.

내 행동이 불러일으킬 결과가 무섭고 두려워서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여기가 어디냐는 그녀의 질문에도 나는 답하지 못했다.

까득!

나는 이를 꽉 물고 생각했다.

'무의미하게 시간 보내지마. 내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을 해. 가만히 있지마. 움직여.'

저 목인들이 이곳에 들어오지 않고 왜 그냥 돌아 갔는지는 모르지만 우연과 우연이 겹쳐 운이 좋았던 상황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도 안전한 상황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지.

또 이곳은 너무 개방적인 공간이다. 여기보다 더 몸을 안전하게 숨길 수 있는 공간으로 가야 한다.

여기보다 높고 은폐와 엄폐를 할 수 있는 곳···.

바로 앞에 있는 흰색 벽돌로 된 건물 외벽이 눈에 들어왔다. 본래 수많은 간판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을 상가 건물에는 단 하나의 간판만이 남아 있었다.

그 간판은 넝쿨에 걸린 채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는듯 해 보였다.

<매교 고시텔>

3F T. 221-0000

'고시원이라···.'

고시원.

공동 생활을 기본으로 하며 싼 맛에 취업 준비생들이 숙박하는 곳···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굳이 학생이 아니더라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는 비율이 늘어 고시원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퇴색 되었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고시원이 숙박 시설이라는 것이다.

'지수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만들려면 방이 필요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지수를 옮기기 위해 도끼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둘러업었다.

힘을 잃은 그녀의 꼬리가 걸을 때마다 다리에 붙어 조금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올라가는 계단 입구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건물 입구로 들어가기 전, 조금 전까지 머물고 있었던 3차선 도로를 돌아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말라비틀어져 흉물로 변해 버린 봉오리만이 도로 위에 있었다. 그동안 보이던 무질서하게 세워진 자동차들도 보이지 않았다.

상가 건물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면 유동 인구가 많았을 것이고 이동하는 차들도 많았을 텐데 누군가 치우기라도 한 것처럼 도로는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수풀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묘한 정적감이 거리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꿀꺽

나는 지수를 다시 고쳐 업으며 한눈 팔지 말고 고시원이 있는 3층으로 바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건물 안에 나무 인간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들었지만 애써 털어내며 계단을 한 칸씩 오르기 시작했다.

뚜벅뚜벅

오로지 내 발걸음 소리만이 계단을 타고 울리고 있었다. 건물이 텅 빈 것처럼 내 걸음 소리가 내부에서 웅웅 메아리쳤다.

2층에 도착했으나 나는 망설임 없이 3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흘깃 본 2층에는 PC방과 인력 사무소만 보였을 뿐이다.

이윽고, 나는 3층 고시원 입구에 도착했다.

고시원으로 들어가는 철문 앞에는 개인 신발장으로 추정되는 철제 사물함이 놓여져 있었다.

···신발.

나는 고개를 내려 내 발치를 쳐다보았다.

조금 낡긴 했으나 길이 들여져 있어 움직일 때 편한 느낌이 드는 신발.

지금 내가 신고 있는 신발도 예린이가 챙겨 준 것이다.

현관에는 새것으로 보이는 신발도 놓여져 있었는데 굳이 이걸 가져다주었다는 점에서 그 아이의 생각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를 잃어 버렸고.'

······전부 내 책임이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고시원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시원 내부로 들어가니 큼지막하게 이중 코팅된 종이가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공지사항> 1. 매교 고시텔 화재 관련 주의사항 1) 공동 주방 인덕션, 전자레인지 사용 후 반드시 전원 끄고 확인하기!

2) 각 방 개인 전열기구 사용 금지!! (사무실에서 온수 매트 대여 가능!)

3) 각 방 및 화장실에서 실내흡연 및 인화성물질 사용 절대 금지!!

4) 화재 발생 시 : 방, 복도의 비상벨 누름 → 큰 목소리로 전파 / 119 신고 → 소화기 활용 초기진압 시도 → 제한 시 출입구 / 비상출입구로 신속히 대피

2. 입주자 생활 에티켓 준수 1) 전화 통화 : 복도 및 주방에서 금지 2) 복도 청결 : 복도에서 신발 착용 금지, 개인 물품 복도에 비치 금지 3) 주방 청결 : 개인물품 보관 금지, 설거지는 즉시, 비품 사용 후 정리

고시원 공지사항 안내문이었다.

나는 안내문에서 눈을 돌려 고시원 내부를 훑어보았다.

일렬로 된 좁은 복도.

방이 작다는 것을 광고라도 하듯 서로 바싹 붙어 있는 방문들.

복도 중앙에 한쪽으로 트인 공동 주방.

여기저기 튀어 있는 갈색의 자국들.

방 내부의 모습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여기에서는 넝쿨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각 방문은 전부 열려 있는 정도만 다를 뿐 닫혀 있는 곳은 없었다.

달칵-

나는 312호라고 적힌 방에 들어갔다.

사람 하나가 겨우 누울 수 있는 침대와 책상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려져 있는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방주인 없이 비어 있는 방이었는지 개인 물품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빈방이었다는 점이 오히려 나를 안심하게 했다. 적어도 또 다른 위험은 없을 테니까.

나는 엎고 있던 지수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후 방문을 굳게 닫았다.

-찰칵

그리고 침대 옆 바닥에 풀썩 앉아 기도했다.

지수가 무사히 정신을 차릴 수 있기를.

예린이 무사히 살아 있어 주기를.

내게 그 아이를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며 내가 제대로 된 책임을 질 수 있기를 바랐다.

그저 하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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