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 - 22. 시체들의 화원(花園) (1)
우리는 바닥에 뻗은 넝쿨 줄기를 따라 앞으로 이동했다.
3차선 도로였던 길은 어느새 2차선 도로로 바뀌었지만 우리가 보는 풍경은 여전히 초록색이 가득했다.
다만 이 근방은 사태가 벌어졌을 때 한창 공사 중이었는지 주변에는 온통 공사 현장이 산재해 있었다.
반쯤 올라간 아파트 단지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점령해 하늘을 가릴 기세로 뻗어 있었고, 드문드문 보이는 노랑색 철골은 쓰러진 타워 크레인의 잔해인 것 같았다.
부스럭-부스스- 휘이이이잉-
우리는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을 헤치며 계속 나아갔다. 아무 말 없이.
생존자가 있는 것이 맞을까?
처음 고시원을 나설 때만 해도 생존자의 흔적에 긴장하면서 걸었는데 수풀 헤치는 소리만 듣다 보니 맥이 풀리는 느낌이다.
역시 사람 마음은 참 간사한 것 같다. 걸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나무 인간이 없어서 그런가?
"아저씨."
그때 지수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한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지수가 가리킨 곳에는 경차가 뒤집혀 하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저곳 찌그러진 하부 틀, 찢어진 건지 보이지 않는 타이어, 모두 산산조각난 자동차 유리들···.
그것은 이질적으로 보일 정도로 도로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자동차잖아. 그것도 뒤집힌."
그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온전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니···. 그것도 있는데. 그거 말고 더 왼쪽."
"더 왼쪽? ···아."
지수가 말한 더 왼쪽에는 경사가 진 오르막길이 있었다.
'ㄱ'자로 꺾인 전봇대를 타고 무성히 자란 넝쿨이 형성한 위장 탓에 한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주의 깊게 살폈다.
우리가 따라간 넝쿨 줄기 또한 왼쪽으로 꺾여 오르막길 넝쿨 벽 사이로 들어가 있었다.
"아무래도 찾은 것 같지?"
내가 속삭이듯이 한 말에 지수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멀리 푸른색 배경과 흰색 글씨가 쓰여 있는 간판이 보인다.
<수■ 고■■교>
칠이 벗겨진 건지 넝쿨이 가리고 있는 건지는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학교라는 것은 추정할 수 있었다.
저곳이 넝쿨의 둥지다.
혹은 그 무언가.
"저곳에 예린이가 있을까···?"
"있을 거야. 그 봉오리가 넝쿨 줄기를 따라 이동했다면."
"아니면 어떡해?"
"뭘 어떡해. 다른 곳도 찾아보는 거지."
막상 둥지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하니 불안 함을 심하게 느끼는 지 지수는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떨고 있었다.
그녀를 안심시키고 싶었지만 나 또한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매한가지다.
예린이가 이곳에 없다는 걸 깨닫는 것보다.
예린이를 찾지 못 하는 상황이 오는 것보다.
예린이를 찾은 상황을 맞닥뜨리는 것이 더 두렵게 느껴진다.
만약 찾았는데 이미 죽었다면?
애초에 둥지라는 것 자체도 사냥감을 잡은 후 양분으로 섭취하는 장소가 아니던가.
분명 예린이를 찾는 걸 가장 강하게 바라고 있음에도 한편으로는 끝까지 찾지 못하길 바라는 마음 또한 존재하고 있다.
참으로 모순적이게도.
나는 나를 좀 먹는 이기적인 마음을 애써 털어냈다. 그리고 지수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분명 찾을 수 있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응. 근데···왜 웃어?"
이게 아니었나보다.
나는 다시 얼굴을 바싹 굳혔다.
"아무튼 더 시간 끌지 말고 들어가자."
푸석- 푸스럭- 푸스슥-
넝쿨 잎사귀를 손으로 헤치며 지나갈 때마다 미처 밀지 못한 잎사귀들이 내 얼굴을 계속해서 비빈다.
넝쿨 벽 자체는 두껍지 않아서 우리는 금방 빠져나왔다.
그렇게 우리 앞에 전체적인 학교의 모습이 나타났다.
당장 보이는 건물은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2채의 건물과 회색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 1채.
총 3채의 건물이 보였다.
붉은 벽돌 건물들은 전체적으로 좀 낡아 보였고, 회색 벽돌 건물은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였다.
그러나 연식의 차이만 있어 보일 뿐 유리창이 전부 깨지고 외벽이 넝쿨로 뒤덮여 있다는 것은 동일했다.
대충 건물을 보니 바로 앞에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은 강당이고, 오른쪽에 있는 회색 벽돌 건물은 신관, 거리가 좀 떨어진 채 전방에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은 구관으로 보였다.
강당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은 총 5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수야. 혹시 아직도 꽃 향기가 맡아져?"
지수는 아직 내가 찢은 천을 두르고 있었고, 그 상태에서 잠시 킁킁 거리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내 코가 마비된 건지 더 이상 안나는 건지 모르겠네."
"그 천은 왜 아직도 두르고 있는 거야? 괜찮아졌으면 빼지."
"···내가 알아서 할게."
나는 지수가 내 땀 냄새가 배인 천을 아직도 두르고 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말했지만 바로 거절당했다.
"···그래. 맘대로 해라."
나는 학교 내부로 좀 더 진입하려고 했으나 어째서인지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조용하다.
나무 인간도, 생존자도 보이지 않아서 인가.
나무 인간이 없다면 야생화된 동물도 보일 법도 한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학교 전체에 감도는 불길하고 역겹게 느껴지는 분위기.
'···둥지라서 그런가?'
지수가 의아한눈을 하며 말했다.
"아저씨. 왜 안 들어가?"
"아니···. 분위기가 좀 이상해서."
"아저씨도? 나도 둥지는 몇 번 봤는데 이런 적은 처음이야."
이상한 분위기를 나만 느낀 것이 아니고 지수 또한 느끼고 있다며 속삭였다.
그녀가 봐 왔던 둥지와 지금 우리가 들어갈 둥지.
이 둘은 서로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나는 잠시 생각했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어차피 들어가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이 이상의 생각은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도끼를 꽉 쥐고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디뎠다.
"지수야. 어디부터 가볼래? 회색? 붉은색?"
"음."
지수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건물 말고 운동장부터 가자. 둥지가 맞다면 탁 트인 곳에 형성되어 있을 거야."
"운동장?"
학교 부지 주변은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여 있었고, 운동장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단지 사이에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좀 더 깊숙하게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다.
우리는 강당을 지나 건물들 사이에 있을 운동장을 향해 움직였다.
부스스- 부스럭-
거슬리는 수풀을 도끼로 툭툭 치면서 지나가니 눈앞에 어떤 동상이 나타났다.
군데군데 부식되어 흉물로 변해 버린 동상.
머리 부분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그나마 남아 있는 부분들은 금이 쩍쩍 갈라져 보는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지수도 동상을 보고 있었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이런 동상은 학교마다 꼭 있더라."
"···뭐. 학교 유래나 상징 그런 거겠지."
"그냥 다 보여주기식 아니야? 이런 거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원래 어르신들은 전통 같은 거 중요시하잖아. 자부심 이런 거?"
"그럼 아저씨도 신경 썼겠네?"
"뭐?"
콩!
"악! 씨잉···."
나는 나를 음해하는 지수를 향해 벌을 내려주었다. 지수는 생각보다 많이 아팠는지 머리를 감싸 쥐고 나를 잠시 흘겨보더니 몸을 휙 돌리고 나를 앞서나갔다.
"후우-."
나는 그런 지수를 바라보며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불길한 느낌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기 위해 애써 실없는 이야기도 해 보고 장난도 쳐보았지만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었다.
지수 또한 아무렇지 않은 척 내 장난을 받아주었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과 다르게 지수의 눈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단순 내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동상을 지나쳐 좀 더 앞으로 걸어가니 또 다른 넝쿨벽이 나왔다.
이번 넝쿨벽은 교문 쪽에 있던 것과 다르게 빼곡하게 채워져 있어 빈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수야. 운동장 없는 학교도 있어?"
"그런 학교가 어딨어? ···아. 옛날엔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 봤지. 하지만-"
지수는 말을 잠시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인 거보면 운동장이 없을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이 넝쿨벽이 운동장을 가리고 있다는 말이 되는데.
내 키의 2배 정도 되는 높이를 가진 넝쿨벽. 내 키가 180cm 정도 되니 이 넝쿨벽은 3m를 훌쩍 넘어간다는 소리다.
빙 돌아서 갈까 했지만 신의 농간인지 넝쿨벽은 좌우로도 길게 형성되어 있어 구관과 신관 건물의 외벽과 맞닿아 있었다.
나는 도끼를 꽉 쥔 채로 지수에게 말했다.
"지수야. 뒤로 와."
샛길이 없나 찾고 있던 지수는 내가 부르자 뒤돌아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났다.
콰드드득!
푸쉬이이-
나는 도끼를 높게 치켜들고 넝쿨벽을 향해 그대로 내려찍었다. 그러자 줄기가 뭉텅이로 잘리고 체액을 뿜어냈다.
아직 우리가 지나가기에는 틈이 너무 작다. 나는 같은 행위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충분한 틈이 생길 때까지.
트드득- 콰직! 콰드드- 콱!
푸쉬이익···
어느 정도 틈이 커졌기 때문에 이번에는 좌우로 벌려 틈을 넓히기로 했다.
"나는 왼쪽, 너는 오른쪽. 오케이?"
내가 자리를 잡자 지수도 나와 같이 자리를 잡고 힘껏 당겼다.
"끄응-!"
넝쿨주제에 어찌나 뻑뻑한지 온 힘을 다해 벌리고 있음에도 틈은 천천히 벌어졌다.
뚜둑!
그때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틈이 확 벌어졌다.
"우왁!"
갑자기 크게 벌어진 틈에 지수가 자기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나는 혹여 지수가 다쳤을 까 봐 급하게 다가 갔다. 그러면서 활짝 열린 틈을 시야에 담았고, 이내 얼어붙고 말았다.
"괜찮-. ······뭐야."
운동장인지 폐차장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차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마치 온동네 차들을 끌어모아 탑처럼 쌓은 것 같았다. 누가 더 높게 쌓는지 내기라도 한 듯이.
그동안 거리에 차가 보이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어?
그리고 내 눈을 가장 의심케 하는 모습은 폐차장으로 변한 운동장 아니었다.
하얀, 아주 새하얀 꽃잎과 피처럼 선명한 붉은색의 수술로 이루어진 꽃.
그 꽃들이 몇 송이나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빼곡하게 공간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화원(花園)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