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 - 32. 진실 혹은 거짓 (4)
나는 술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벽에 기댔다. 그마저도 힘이 풀린 다리에 의해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질 뿐이었지만.
양반다리를 하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가만히, 그저 가만히 들리는 소리를 속에 담았다.
부스럭- 부스럭- 철퍽- 꽈아악···
뚝
뚝 쏴아아아아아-
지수가 몸을 움직이는 소리.
물에 젖은 옷을 만지는 소리.
물기를 한계까지 짜내는 소리.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어느새 거센 소나기로 변한 소리.
소리, 소리, 소리.
그 모든 소리가 섞여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내가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끼이익···
그때, 녹음실 문이 슬그머니 열리며 지수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자?"
나는 잠긴 목을 풀기 위해 잠시 헛기침하곤 입을 열었다.
"크흠, 큼. 아니. 안 자."
"그래? 그럼 얘기나 좀 할까?"
"안 피곤해? 오늘 하루 종일 움직여서 많이 피곤할 텐데."
"···피곤하긴 한데. 잠은 안 오네. 예린이 상태도 지켜봐야 하고."
"예린이는 어때? 괜찮아 보여?"
"응.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숨소리도 좋아졌어."
"다행이네."
"아저씨는? 자고 싶어?"
"나?"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니. 나도 잠이 안 오네."
"그럼! 나 심심하지 않게, 졸지도 않게 얘기나 하자."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말도 너무 많아 고르기 힘들다.
마음의 준비는 예전부터 하고 있었지만, 막상 때가 다가오니 내가 한 노력이 전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처음에는 가벼운 이야기로.
"지수, 너 아까 보니까 급식차가 뭔지 모르더라?"
"···급식차? 그게 뭔데."
"아니. 진짜 몰라?"
"그게 뭐냐니까?"
"뭐긴 뭐야. 말 그대로 급식차지. 안에 반찬이랑 밥, 국통 들어 있고."
"그게 왜 들어 있어?"
"그야···교실에서 밥을 먹었으니까?"
부스럭부스럭-
지수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벽 너머에서 몸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교실에서 밥을 먹어? 급식실 안 가고?"
"내가 다니던 학교는 급식실이 없었는데? 아니다. 있었는데 내가 다닐 때는 원래 있던 급식실 허물고 새로 짓느라 없었던 거였네."
"···틀."
"야, 임마. 너랑 나랑 나이가 얼마나 차이 난다고······."
"틀."
"네가 급식차 타고 복도를 드라이브하는 기분을 알아?"
"우와. 방금 그 말 진짜 틀 같았어."
"그래. 나 틀이다. 틀."
내 말을 끝으로 방송실은 잠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곤란한 상황이 올 때마다 항상 그래 왔듯 이번에도 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 열쇠는 어디서 났어? 꼼짝없이 죽을 줄 알았는데."
"아. 열쇠? 그거 교실 안에 있던 나무 인간 허리춤에 있었어. 처음에 봤던 녀석."
"어떻게 알고 챙겼데?"
"복장이 약간 경비원스럽더라고. 그래서 일단 챙겼지. 혹시 이 학교 수위가 아닌가 싶어서."
"오구. 잘했네. 잘했으니 칭찬 해 줘야지~. 참 잘했습니다!"
"···허. 예에. 칭찬 감사합니다~."
지수가 착한 아이에게 상을 주는 것처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다 큰 성인에게 하는 것치고 묘하게 진심이 담겨 있는 것이 느껴져 픽하고 웃을 무렵, 열린 문 사이로 지수의 손이 나와 내 손을 톡톡 건드리고 다시 들어갔다.
뭐지?
칭찬 도장 찍어 준 건가?
손이 닿은 걸 보면 지금 우리는 벽 하나를 두고 등을 맞대고 있는 상황일 것이다.
나는 속이 조금 달아오르는 느낌에 말문이 막혔지만 애써 입을 열었다.
"사실. 네가 열쇠가 자꾸 안 맞다고 했을 때. 엄청 불안 했다?"
"왜?"
"그렇잖아. 내가 주운 열쇠 중에 구름 다리 열쇠가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잖아. 비록 경비원 복장을 입고 있었어도 이 학교 것이 아니었다면? 하필이면 그 열쇠 뭉치 중에 구름 다리 열쇠만 빠져 있었다면? 온갖 생각이 다 들더라."
"그렇구나."
나는 내 말에 담담하게 대꾸하는 지수에게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너는 안 불안했어?"
"불안하긴 했는데 그런 불안감은 아니었어."
"그럼?"
"내가 잘못해서 모두 죽으면 어떡하지? 힘들게 예린이도 찾았는데. 나 때문에 나도, 아저씨도, 기껏 찾은 예린이도 죽으면? ···그냥 이런 거."
"구름 다리가 잠겼으면 아래로 내려갈 수도 있었잖아."
지수는 약간 어이가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진심이야? 나 혼자 다른 곳으로 도망치라고?"
"아니, 뭐. 다른 방법도 있었다는 거지. 살 가능성은 낮았지만."
"나도 구름 다리가 최선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구. 그리고······아저씨 믿음에 보답하고 싶었어."
드드드드드드······
그 순간, 우리가 있는 학교 건물이 물 위에 있는 것처럼 출렁이는 진동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흔들림에 놀랐는지 지수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악!"
나는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벽에 더 바싹 기대면서 버텼다.
드드드드······드드·········드
다행히 지진은 길지 않았고, 간혹 여진만 느껴질 뿐이었다.
지진.
요 근래 자주 일어나는 지진은 저번에 편의점에서 본 것처럼 거대한 나무가 뿌리를 더 멀리 뻗음으로써 생기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지진이 길게 이어지지 않은걸 보니 거의 확실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아파트를 지지대로 삼은 거목들이 어디까지 성장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큰데 대체 어디까지?
어찌 되었든 지금 이 순간 일어난 지진이 살짝 고맙게까지 느껴졌다.
낯간지러운 분위기가 형성되니 온몸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간지러워져서,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 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진 덕분에 자연스럽게 화제가 환기되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진도 오래가지 않았고, 크게 흔들리지도 않았으며, 다친 사람도 나오지 않지 않았는가?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다음은 조금 현실적인 이야기로.
"지수야. 어디 다친 데는 없지?"
"아흐으···. 벽에 머리 박은 거 빼면 다 무사해."
"벽은 괜찮고?"
"···뭐? 지금 내 머리가 아니라 벽을 걱정하는 거야? 죽고 싶어?"
"미안합니다."
스산하게 말하는 지수가 무서워 나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놀라서 비명을 지른 것이 아니라 머리를 부딪혀서 그런 거였구나.
"아저씨. 조금 춥지 않아?"
"추워? 그런 것 같기도하고···."
"난 추운데? 그러니까 이쪽으로 와."
"갑자기?"
"빨리! 같이 붙어 있으면 덜 추우니까 체온 보존하게 들어오라고."
"나 한 대 때리려고 부르는 건 아니지?"
"······좋게 말할 때 와라."
나는 혹시 살짝 놀린 것을 내게 복수하기 위해 지수가 나를 부르는 줄 알고 물어 봤지만, 그녀의 목소리 톤이 점점 낮아지는 것을 보고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스르륵-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나 녹음실로 향하는데 기다란 커튼이 걸을 때마다 발에 채이면서 천 비벼지는 소리가 났다.
"여기 내 옆에 앉아."
내가 녹음실로 들어가니 지수가 자기 바로 옆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예린은 자기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눕힌 채로.
커튼에 잔뜩 묻은 먼지를 털기는 했으나 먼지가 묻어 있는 것은 여전했기에, 나는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지수가 가리킨 지정석에 앉았다.
내가 바닥에 앉자마자 지수가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말했다. 그녀의 머리에 달린 귀가 움직여 내 볼을 툭툭 간지럽힌다.
나는 살짝 당황스러운 기분이 되었지만 티 내지는 않았다.
"내가 요 며칠 사이에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고 한 거. 기억해?"
"기억하지. 그러면서 한탄했잖아."
"맞긴 하지만···. 아무튼 그게 좀 이상해서 말이야. 사태 초기랑 비교해도 변화가 너무 빨라. 단순 내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혹시 모르니까. "
지수의 말대로였다.
정신을 차린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나조차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고 느껴지는데 하물며 사태 초기부터 살아남은 그녀는 괴리감을 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지진 주기도 점점 짧아지고, 목인이 없는 장소는 여기 말고 본적도 없어. 나무 인간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가장 이상한 건 운동장에 있던 화원이야."
"이상하긴 했지. 끔찍하기도 했고."
"혹시 이 주변에 나무 인간들이 보이지 않았던 건, 저기서 나온 꽃가루 때문이 아닐까?"
"아."
지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빤히 바라보자 부담스럽다는 듯 얼굴을 뒤로 물리는 지수였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너 코 괜찮아? 지금은 내가 둘러준 천도 안 하고 있잖아."
"어느 순간부터 코가 적응했는지 느껴지는 게 없어서 그냥 괜찮나보다 했는데···?"
바람이 불수록 주변을 뿌옇게 만들 정도로 많은 꽃가루가 주변에 퍼졌었는데 느껴지는 게 없다고?
"···비가 와서 그런가?"
내가 자신감 없는 투로 꺼낸 말에 지수가 부정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아닐걸? 비 오기 전에 괜찮아졌던 것 같은데."
"흐음···."
나는 침음을 흘리며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했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저씨 옆에 있어서 그런가?"
킥킥 웃으면서 농담을 하는 지수를 보니 가슴 한 켠이 따끔거렸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쥐었다.
따콩!
"악! 씨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아저씨가 연장자라서 참는다 진짜."
"여기서 나이 공격을?"
나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그리고 벽에 붙어 있는 소음방지패드를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은.
···다음은.
"아저씨. 나한테 할 말 있다고 했잖아."
지수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졸음이 가득했다.
"···그랬지."
"뭔데?"
"······."
다음은 내가 숨긴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