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 - 33. 진실 혹은 거짓 (5)
쏴아아아아-
쿠르르릉···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빗소리와 어딘가에 내려친 천둥소리가 녹음실을 한 바퀴 훑고 지나갔다.
"지수야."
"으응···?"
"만약, 만약에."
"으응······."
"내가 세상을 이렇게 만든 사람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으응······. ···뭐?"
내 말을 그저 잠결에 대답만 겨우 해주던 지수는 잠이 확 달아난 표정으로 고개를 휙 들었다.
"뭔 소리야? 다시, 다시 말해 봐."
"세상을-"
"자, 잠깐만!"
지수는 두통이 이는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심호흡했다.
"후우. 말해 봐."
"세상을 망치게 한 주범을 알아. 아마 거의 확실해."
"잘못 들은 게 아니었네. 아저씨. 많이 피곤한가 보다. 이상한 소리 하는 걸 보니. 먼저 눈 좀 붙일래?"
"······."
"···진짜로?"
지수는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 담담하게 말해주었다.
"나한테 누나가 있다고 한 적 있지?"
"있었지. 근데 그게 갑자기 왜?"
"그 누나가 졸린 사에서 일했으니까."
"···졸린 사?"
내가 여기까지 말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졸린 사가 무슨 회사인지 몰라?"
"아아~. 알지. 그거 하는 회사잖아! 그···."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지수를 보니 졸린 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보였다.
"···넌 TV도 안 봤니?"
"우리 집에 TV 없었는데."
"인터넷은?"
"그건 있었지."
"근데 졸린 사가 뭐 하는 회사인지 몰라?"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오히려 지수를 추궁하자 그녀가 발끈하며 말했다.
"씨이···. 뭐 하는 회사인데 그래? 그냥 알려주면 되잖아!"
"미안. 화내지 마. 나는 네가 저번에 준 수첩에 졸린 사에 관한 기사가 스크랩 되어 있길래 아는 줄 알았지."
"아."
그녀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회사가 왜? 기사에 있던 내용이라고 해봤자 그냥 연락이 안 된다는 것뿐이고, 이상한 내용은 없었는데? 음모론같은 게 좀 있긴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자취방에서 기절한 게 누나가 준 알약을 먹고 그랬던 거였거든."
"그래서?"
"누나는 그날 상태가 이상해 보였고."
"으흠?"
"남산에 있는 연구소에 취업해서 일하는 사람이었지."
지수는 더 얘기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끝이야?"
"그리고 처음 이변이 일어난 곳이 남산 일대이기도하고, 내 기억으로는 TV에서 전문가들이 나오는 방송이 있었는데. 거기서는 조작 영상이라고는 했지만 나무가 비정상적으로 커지는 동영상이 나오기도 했어."
"흠···."
"공기 정화한다고 나무에 이상한 기술을 적용시킨 건 졸린 사였고."
내가 두서없이 한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듯 지수는 턱을 괴며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자. 우선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혹시 기억 돌아왔어? 그래서 지금 이런 얘기하는 거야?"
"아니. 기억은 여전히 안나."
"그렇구나. 그럼 다음. 아저씨 말대로라면 고작 회사 하나 때문에 나라 전체가 망해 버렸다는 거네? 그치?"
"···그렇지."
"말이 돼?"
"···안 되지. 하지만 결국, 세상이 이렇게 망해 버렸잖아."
"하아···."
지수는 속이 답답한지 거칠게 한숨을 내뱉고 손으로 머리를 쓸어내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느껴지는 죄책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졸린 사···남산···연구소···. 아직도 이해가 안 돼······. 왜 이런 얘기를 해주는 거야? 왜 지금?"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으니까."
"뭔데?"
"남산으로 가야 해. 그곳에 가면, 어쩌면 그곳에 해답이 있을지도 몰라."
"무슨 해답?"
"······."
"무슨 해답을 말하는 거냐구!"
"다시 이 세상을 안전하게 만들 수 있는 해답."
내가 망설이다가 내뱉은 말에 지수는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확신해? 어떻게?"
"그냥 내 감이야."
"이 아저씨 큰일 날 사람이네? 다른 증거도 없이 감만 믿고 거길 가겠다고?"
「하나가 되자.」
"···내가 책임져야만 해. 가면 뭐라도 할 수 있겠지."
"저기, 아저씨. 우리 지금 대화하는 거 맞지? 왜 아까부터 아귀가 안 맞는 느낌이지? 나만 그래?"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미안."
"아니! 사과를 하라는 게 아니고. 이상하잖아. 그걸 왜 아저씨가 책임을 져?"
「널 기다리고 있어.」
"내 누나랑 연관이 있으니까."
"그 누나란 사람이 한 거잖아, 아저씨 말대로라면. 아저씨가 무슨 이상한 버튼 눌러서 세계를 멸망시킨것도 아닌데. 왜?"
"그래도 가야만 해."
"누가 아저씨 보고 '너는 네 누나를 말리지 못했으니 모든 건 네 책임이다!'라고 하기라도 했어?"
지수는 한마디 한마디 말할 때마다 속에서부터 화가 끓어오르는지 목소리 톤이 점점 높아졌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만큼 고개를 점점 더 숙였다.
"···아저씨 좀 피곤하게 사는 스타일이구나."
- 현우, 너 좀 피곤하게 사는구나.
지수는 내 반응을 보더니 무언가를 직감한 듯 나직한 소리로 탄식했다.
"아저씨 잘못이 아니잖아···."
- 네가 잘못한 게 아닌데 왜 기가 죽고 그래?
나는 지수가 하는 말이 순간 예전에 누나가 내게 했던 말과 겹쳐 들리는 것을 느끼며,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이 나왔다.
"웃어? 지금 뭘 잘했다고 웃어?"
"미안."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지수.
"좋아. 남산으로 가겠다고 치자. 그럼 ······우리는?"
"너희는-"
"우리 버려? 친구 버려?"
"위험하잖아."
"얼씨구. 위험한 건 알고 있네? 아는 사람이 그래?"
그녀는 또다시 한숨을 폭 내뱉고는 두르고 있는 커튼 안에서 몸을 꼼지락거리더니 이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동안 겪은 경험에 의한 정보가 적혀 있는 수첩과 꼬깃꼬깃 접혀 있는 사각형의 종이.
바로 지도였다.
"아직 가지고 있었네? 지도도 있었어?"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수첩, 지도, 도끼, 예린이는 무조건 챙겨."
내 말에 지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들고 있는 지도를 흔들었다.
"자. 한번 말해 봐. 만약 남산에 간다면, 어떻게 어떤 길로 갈 건데?"
"어···. 일단 위로 올라가면 되지 않나···싶은데···?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잖아."
"쯧!"
그녀는 짧게 혀를 차고 나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제정신이야? 여기서 남산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 줄 알고? 가는 길에 있는 목인들은 또 어쩌게?"
지수의 말이 맞다.
지금의 나는 막연히 남산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을 뿐, 그에 따른 계획조차 없는 게 현실이었다.
「내게로 오라.」
어느 길로 가야 거리가 가까운지, 그 길이 남산으로 이어진 길이 맞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그때, 지수가 바닥에서 일어나며 내게 자는 예린을 내밀었다.
"아저씨. 잠깐 일어나 봐. 일어나서 예린이 좀 안고 있어."
"왜?"
"토 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넵."
부스럭부스럭-
나는 예린을 품에 안은 채 지수가 뭘 하려고 하는지 지켜보았다. 그녀는 접혀 있던 지도를 펼쳐 녹음실 안에 설치된 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펼친 지도 중 어느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봐봐. 여기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야. 학교 이름이 수원 고등학교였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역은 매교역이고, 그다음으로 가까운 역은 수원역. 이 근처에는-"
지수가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으면서 설명해주고 있지만, 정말 미안하게도 어디가 어디인지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너무 어두운데···.'
대충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가기에는 매우 중요한 얘기이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지수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다 듣고 말하면 잔뜩 흥분한 그녀에게 한대 맞을 것 같아서 중간에 끊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지금 말해도 한 대 맞을수도.
"아까부터 느끼는 거지만 지수, 너 밤눈이 밝구나."
내 말에 지수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변하고 나서 눈이 좋아지긴 했지. 근데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 한창 중요한 얘기하는데."
"···나는 안 보이네. 너무 어두워서 그런가.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손전등 같은 건 없나···? 그것도 열 때문에 안 되려나?"
그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이어지는 내 말에 몸을 비비적거리며 우물쭈물 거렸다.
살랑거리던 꼬리도 지금은 빳빳하게 굳은 모양새에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왜 그래?"
"···손전등."
"손전등이 왜? 그것도 못 쓰는 거 아니야?"
지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쓸 수는 있어. 잃어 버렸을 뿐이지."
"하긴, 가방을 잃어 버렸었지. 이 학교에서도 쓸 만한 걸 얻지도 못했고."
"그···렇지. 응. 맞아."
말을 흐리는 지수에게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므로 많은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가만. 지수랑 예린을 처음 봤을 때 다른 장비는 못 본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생각하면 진실의 한 자락에 닿을 것 같았지만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지수가 왠지 무섭게 느껴져 더 이상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왜···?"
"아니야. 아무것도. 아무튼 잘 안 보인다고 했지. 그럼 나한테 가까이 붙어."
"어엇?!"
지수가 내 옷깃을 잡고 끌어당겼다. 내 손이 그녀의 손과 겹쳐졌다. 그리고 내 손을 움직여 지도의 한 곳을 콕 찔렀다.
"자. 여기가 지금 우리가 있는 곳."
지이이익
그녀는 내 손을 지도에서 떼지 않은 채로 위로 쭉 올렸다.
생각보다 많이 올라가는 느낌에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옆에 착 달라붙은 지수의 따뜻한 체온이 내게도 전해져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여기가 남산. 이게 끝이 아니야. 직선 거리로 30km 정도지. 길을 따라서 움직인다고 하면 거리는 절반 가까이 늘어나서 한 50km 정도 되려나?"
"그렇구나···."
"이제 알겠어? 아저씨가 얼마나 무모한 짓을 하려고 하는지?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도 모자랄 판에 어떻게 거꾸로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거야?"
"그래도 가야 해."
고집을 굽히지 않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지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이네. 후···. 그럼 상상이나 한번 해보자. 만약 간다면 어떻게 갈 건지. 일단 이 쪽 길을 따라서-"
"오. 그럼-"
"아니지. 거기보단 여기가-"
그 뒤로 나와 지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길게 나누었다.
동이 틀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