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4 - 34. 화원의 파수꾼 (1)
지겹게 쏟아지던 비는 어느새 그치고, 거목의 뒤편에서 태양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우리가 있는 방송실 안으로 빛을 들여보냈다.
한밤의 싸늘한 공기는 그 빛에 의해 조금씩 달궈져 포근한 기운을 가지게 되었다.
학교 주변은 여전히 적막했으나 우리가 있는 녹음실만큼은 남녀가 대화 나누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남산을 가려면 수원역으로 가서 철도를 따라 올라가야 한다?"
"그렇지."
"국도는 몰라도 철도는 군대가 어느 정도 길을 정리해서 괜찮을 것이다?"
"맞아."
"하지만 군대가 길을 정리한 지 시간이 꽤 지나서 확실하진 않다?"
"그래!"
그렇게 말하는 나와 지수는 해가 떠 아침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다.
나는 방이 어렴풋이 밝아질 때부터 지수에게 떨어지려고 했지만, 그녀는 내 팔목을 꽉 붙든 채 대화를 이어 나갔다.
모르는 척하는 건지, 내 팔목을 놓으면 내가 도망갈 거라 생각해 놓아주지 않는 건지 모르겠지만, 억지로 힘을 줘서 떼어내는 건 좀 아니다 싶어 나는 그저 붙들린 채 그녀가 하는 말을 들어 줄 뿐이었다.
내가 남산을 간다고 했을 때부터 줄곧 이런 상태였으니, 지수가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 내 말 듣고 있어?"
"어어. 그럼."
어제 무리를 해서 피곤이 가득 쌓인 지수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기존의 호박색과 선홍색이 뒤섞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동자가 가진 특유의 아름다움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색정적으로 보였으면 보였지.
처음에는 결사반대라도 할 듯이 나를 막아 세운 지수였지만 지금은 새벽 내내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자기가 아는 선에서 모든 걸 말해주는 걸 보니 모순적이게도 약간의 섭섭함을 느꼈다.
나는 속으로 스스로 자조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 마음은 참 간사하다더니 지금이 딱 그 짝이구나.'
남산으로 가는 길이 험하고 위험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막상 지수와 헤어지고 혼자 간다는 생각이 들자 서운함을 느끼는 꼴이라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출발하기도 전에 나약함이 나를 좀 먹는 것 같아서.
"고마워."
나는 나에게 더 따지지도, 무언가를 더 캐묻지도 않는 지수가 고마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가?"
"날 위해서 루트 짜주고 있는 거 아니야?"
"······?"
여전히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바라보는 지수를 보니, 나는 어딘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되묻는 나의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 담겼다.
"···아니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저씨 루트 짜는 게 아니라 우리 루트 짜는 거지."
"우리?"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우리 버릴 거냐고. 그렇게는 안 되지."
"안 돼. 절대로."
나는 절대로 안 된다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 길이 어떨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런데도 날 따라오겠다고? 절대로 안 돼. 예린이는 어떡하게?"
"······."
"아직 어린 예린이가 그 길을 따라올 수 있을 것 같아?"
지수는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려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묘하게 귀여운 행태에 픽하고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난 말했다. 안 된다고."
"···흑."
"어어? 아니, 왜 울고 그러냐."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갑자기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는 지수가 당황스러워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길이 위험하니까 그렇지."
"······."
"걱정-. 그래, 너랑 예린이가 걱정되니까 안 된다고 한 거 너도 알잖아? 뚝 그쳐봐."
나는 지수가 내게 자신들을 버릴 것이냐고 말한 것을 떠올렸다.
버림받는다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표출하는 지수의 행동 그리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도끼만 남았다고 중얼거린 지수의 모습.
예린의 부모님과 마지막 모습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필시 지금의 지수에게는 그것이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지수가 눈가를 거세게 비비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나는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해."
"잘 살아남았잖아. 내가 없어도-"
"싫어! 이제는 무서워. 아니, 사실 처음부터 무서웠지. 흐끅. 무섭다고!"
나는 발작하듯 외치는 지수를 달래기 위해 어깨를 손을 올리려다 다시 내려놓았다.
"낮에는 어떻게-히끅-든 괴물들 피해서 살아남고, 밤에는 무슨 일이 ?훌쩍- 생길까 두려워서 잠도 제대로 못 자. 그게 매일매일 반복됐고."
"······."
"말했잖아···. 또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지금도 겨우 살아남았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남아?"
"······."
"나 혼자서는 무리야······. 그러니까 차라리···."
나는 속내를 털어놓는 지수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하는가?
넌 괜찮을 것이다. 넌 할 수 있다. 넌 죽지 않을 것이다. 넌···.
이따위의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무책임한 발언과 공수표에 불과할 뿐, 나도 지수도 납득을 할 수 없겠지.
「···하나가 되자.」
나이를 떠나 지금 이 세상은 인간에게 가혹하고, 지수가 생존에 능숙해 보이는 것도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악한 결과다.
21살.
대학MT 나 소개팅으로 즐겁고, 수줍은 감정을 느끼고,
가족이나 친한 친구의 생일선물을 사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립심을 키우고,
간혹 친구들과 다퉈 사이가 서먹해졌다가 화해를 통해 전보다 더 끈끈한 사이가 되는 것을 느끼며 행복한 추억을 쌓는,
그런 세상에서 살았을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말이다.
"아저씨가 그랬지? 남산에 있는 연구소로 가면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냥 감이라고 했잖아. 너도 왜 그런지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안전한 세상을 원해. 낮에는 먹고 싶은걸 먹고, 밤에는 마음 졸일 필요 없이 푹 잘 수 있는 그런 세상."
나는 바싹 굳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 내릴 수밖에 없었다. 손으로 내 얼굴을 가리면 이 모습을 조금이나마 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차원적인 생각에.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런 세상은 오지 않겠지. 얼마간은 살아남는다고 해도 어느 순간 갑자기 픽 죽어 버리고 말 거야."
"······."
"우리가, 나와 예린이가 그렇게 되기를 바래?"
"···절대 아니야."
어느새 지수가 고개를 들고 나를 향해 다가와 내 멱살을 부여잡았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야. 아저씨가 가는 길에 우리가 도움이 될 거야. 분명. 그러니까 데려가."
"아까도 말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예린이는?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에-"
"그 안전한 곳이!!! ······대체 어디 있는데."
그녀가 순간 고함을 내질렀다.
"없어. 없다고. 안전한 곳이 없어. 앞으로는 더 없겠지. 나라고 생각 안한 줄 알아? 매일 매번 매 순간 생각해. 이번에는 어디를 가야 안전할까. 오늘 밤은 저기서 보내도 괜찮을까. 괴물이 있지는 않을까."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후우···. 다른 걸 다 떠나서 내가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생각은 안 해? 내가 한 말이 전부 거짓말일 수도 있잖아. 너는 정신병자한테 속은 불쌍한 어린 양이고."
"눈은 마음의 창이다, 라는 말 들어 봤지? 적어도 아저씨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
"······."
"내 말이 틀려?"
"······."
"말이 없네. 하. 그래서 결국 우리 안 데려가시겠다? 뭐, 됐어 그럼. 우리끼리라도 갈 거니까. 안전한 세상? 까짓거 내가 만든다. 남산에 있는 연구소 내가 간다고!"
"뭐?"
"우리가 아저씨를 따라가는 게 아니고, 아저씨가 우리를 따라오는 거야. 어때? 같이 갈래?"
"너 미쳤-!"
"···언니? 오빠?"
그때, 예린이 눈을 비비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우리를 불렀다. 지수는 마지막으로 내게 눈을 부라리고 예린에게 달려갔다.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지만, 예린이 눈을 떴기 때문에 이야기를 더 나눌 시간은 없었다.
"예린아! 몸은 어때? 괜찮아?"
"으응···? 후아암. 괜찮은데?"
내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예린은 아무런 이상도 없어 보였다. 정말 다행히도.
체온도 완전히 회복한 듯 발그레한 예린의 얼굴.
하품을 길게 하던 예린은 장소가 바뀐 것을 눈치챘는지 의아해하며 나와 지수를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예요? 뭐야. 언니 울었어?"
예린은 그 말을 하며 나를 째릿 흘겨보았다.
마치 내가 범인인 것을 알고 있다는 모양새에 제 발 저린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 아니? 하품하다가 눈물 나왔나 보네. 아하하···."
지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 예린은 이번만 넘어가겠다는 듯한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렇구나~. 알았어."
예린이 고양이가 그루밍을 하는 것처럼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있을 때, 우리는 빠르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아직 내 얘기 안 끝났어.'
'진짜 따라오려고?'
'아저씨가 우리를 따라오는 거지.'
내가 지수의 눈을 피하자 그녀가 내게 걸어오더니 예린에게 들키지 않게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끄흡···!"
살이 꼬집는 고통이 훅 들어와 못 참고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마저도 지수가 내 입을 틀어막아서 길게 가지는 못했다.
"오빠. 왜 그래요?"
얼굴 단장을 끝내가는 예린이 고개를 잠시 들어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웃어."
"아하하. 아무것도 아니야. 문턱에 발을 찧어서- 끄으윽!"
내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이는 지수의 말에 나는 애써 어색하게 웃어 보였지만 살을 한 번 더 비트는 감각에 못 참고 몸을 배배 꼬고 말았다.
예린의 눈은 이제 의아함을 넘어선 이상한 생물을 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도, 아니 우리 같이 가는 거야. 알았지?"
"······."
"대답."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손 좀!"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아흐흑-."
"예린아~."
지수는 그 말을 끝으로 혀를 한번 차더니 예린을 살갑게 부르며 다가갔다.
사이가 좋은 언니와 동생.
모르는 사람이 봐도 흐뭇함에 절로 웃음이 나올 광경이었지만 나는 그저 옆구리만 부여잡고 간신히 서 있을 뿐이었다.
'옆구리 살 뜯어진 거 아니야···?'
내가 옆구리를 살살 어루만지고 있을 때, 예린이가 해맑게 웃으며 나를 불렀다.
"왜 혼자 있어요? 이리 와요."
다행히 예린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지만, 그렇다고 내가 지은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우물쭈물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내가 자꾸만 멈칫하고 자신에게 오질 않자 예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고, 그대로 내 손을 잡아끌며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한 손에는 내 손을, 나머지 한 손에는 언니인 지수의 손을 잡고 마냥 행복한 듯 히히 웃는 예린.
잠을 잔 곳과 눈을 뜬 곳이 다르면 누구라도 당황하는 모습을 보일 테지만, 예린은 그저 자신은 언니만 있으면 괜찮다는 듯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나도 모르게 잠시만, 아주 잠시만이라도 시간이 멈춰 이 순간이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남아 있어 주기를 바랐다.
「···키킥.」
언제까지고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으면 좋았을련만,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변은.
서로가 서로를 챙기며.
각자 맡은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낼 것이라 믿는.
우리가 건물 밖으로 한걸음 내딛었을 때 일어났다.
[아아아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