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8 - 38. 화원의 파수꾼 (5)
다각다각다각다각다각!
우측 복도를 통해 건물 밖으로 나온 우리에게 교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첨벙첨벙첨벙첨벙!
한 발자국 크게 내디딜 때마다 물웅덩이의 물이 사방으로 비산했고, 그 물에 조금씩 젖어가는 옷들은 우리의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회색 벽돌로 된 고등학교 건물에서 교문까지의 거리는 전력 질주를 할 때 10초도 걸리지 않을 만큼 가까웠지만, 우리가 교문을 넘어가는 것보다 거미 변종이 우리를 붙잡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그리고 교문을 운 좋게 넘어간다고 해도 어차피 교문 밖도 놈의 영역이기에 넘어간 그 뒤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달리는 방향을 바꿔 붉은 벽돌로 된 강당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수야! 강당! 강당으로 들어가!"
"알았어!"
"조금만 더 힘내! 거의 다 왔어!"
지수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날 잘 따라오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그저 죽어라고 앞으로 내달렸다.
[아아아아아아아!!]
놈의 울부짖는 소리가 내 등 바로 뒤에서 들려와 우리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살짝 열려 있는 강당 문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문이 닫혀 있지 않아 우리는 망설임 없이 문을 발로 걷어차며 안으로 들어갔다.
···쾅!
"헤엑! 아저, 씨! 헤엑! ···문! ···문!"
지수는 다급하게 문을 가리키며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턱 끝까지 찬 숨만 간신히 헐떡일 뿐 제대로 된 말을 내뱉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바닥에 굴러다니는 쇠 파이프를 주워 문고리에 걸어 막았다.
끼기긱-
문고리의 틈과 쇠 파이프의 크기가 서로 엇비슷해서 부드럽게 들어가진 않았지만 억지로 힘으로 밀어붙이니 쇠와 쇠가 서로 마찰되는 소리를 내며 문고리에 끼워졌다.
쇠 파이프의 절반이 문고리에 끼워 넣어진 것과 동시에.
······쾅!!
강당 문이 충격에 크게 들썩였다.
끼기기기긱!
성문에 공성추가 부딪힌 것처럼 강당 문 중앙이 일그러졌고, 이내 쇠 파이프가 휘어지며 죽는소리를 토해냈다.
드그그극! 드그그극!
문 바로 너머에서 닫힌 문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긁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와 지수는 온 신경을 강당 문에 쏟아 문이 강제로 열리는 상황에 대비했다. 지수는 한쪽 팔로 등에 업은 예린을 받치고 있었고, 남은 팔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쇠 파이프를 주워 들고 있었다.
"흐으···. 흐으···."
지수가 내뱉는 숨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그녀가 간신히 들고 있는 쇠 파이프도 그녀의 목소리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다각···다각······다각
"······?"
그러나 거미 변종은 몇 차례 문을 긁더니 포기한 듯 멀어지는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또 다른 장난?
아니면 정말로 우리를 포기한 것인가?
나는 끝까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전방을 주시했다. 잠시 이어지는 몇 초의 침묵이 내게 수십 년처럼 느껴졌다.
나는 놈이 우리를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닌 포기하고 물러났기를 바랐다.
이제는 한계다.
지수의 피로도도, 내 발목도.
그러니까 그대로 사라져라.
제발.
또다시 억겁 같은 몇 분이 흘렀지만, 시간이 흘러도 다행히 거미 변종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갔나?"
"···그런가 봐."
우리는 놈이 확실하게 물러났다고 판단했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텅! 터텅-
지수는 손에 들고 있던 쇠 파이프를 그대로 놓치며 바닥에 허물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급하게 예린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예린아. 정신 좀 차려 봐. 응? 제바알···."
나 또한 예린에게 절뚝거리며 다가가서 상태를 살펴보았다. 외상은 없지만 정신적 충격을 받아 기절한 예린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뿐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아니, 제발 그러기를 바랐다.
"아직 잠에서 깨지 못했을 뿐, 괜찮을 거야···."
"···그렇겠지? 그런 거겠지? 우리 예린이 어디 이상해진 건 아니겠지, 응?"
"그럼. 걱정-"
나는 불안에 떠는 지수를 다독이다가 주변에 보이는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말을 멈춘 내가 의아했는지 고개를 들다가 나와 같은 것을 보았는지 몸을 바싹 굳혔다.
지금까지 강당 문에만 온 신경을 써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자 보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쇠파이프들은 천장의 구조물에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었고, 창문에는 커튼이 전부 쳐져 있어 밝은 바깥과 달리 내부는 어두웠다.
그리고.
···강당 정중앙에 거짓말처럼 서 있는 거미 변종.
"···아저씨. 저게 왜······."
"잠깐만."
지수가 예린을 품에 안고 다급하게 일어서려고 하자, 나는 그녀를 잠시 멈춰 세웠다.
"왜? 빨리 도망가야-!"
"아냐. 잠깐만. 잠깐만 멈춰 봐."
그녀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지수는 나를 믿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예린을 더 강하게 품에 묻은 채로.
저것이 거미 변종이라기에는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도끼를 들고 강당 정중앙으로 걸어갔다.
"아저씨. 미쳤어?! 뭐하는 거야!"
가까이 갈수록 명확하게 보이는 거미 변종. 아니, 그것의 허물.
떨어진 곳에 봤을 때는 살아 있는 거미 변종인 줄 알았지만, 코앞에서 보니 이것은 빈 껍데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거. 허물이야. 살아있는 게 아니라."
"허물이라고?"
"그래. 봐봐."
"잠···!"
나는 도끼 끝으로 변종의 허물을 툭툭 건드렸다. 내가 겁도 없이 그것을 건드리자 지수는 기겁하며 나를 말리려고 했지만, 미동도 안 하는 허물을 보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물이라.'
조금 전까지 마주쳤던 거미 변종의 크기보다 이 허물의 크기가 작은 것을 보니 저것은 점점 성장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학교 교실 문을 잔해물로 막은 것이 누구의 짓인지도 이제 확실해졌다.
처음에는 복도의 크기보다 변종의 몸이 더 작았으니 학교 내부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던 거겠지.
지금은 그게 불가능 해 보이지만.
"진짜···허물인가 보네."
"그래. 적어도 위험하진 않은 것 같아."
"변종은 왜 물러난 걸까. 저 강당 문 정도는 어렵지 않게 부술 수 있었을 텐데···."
지수는 의문을 가지며 중얼거렸고, 나는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지수의 말대로 거미 변종이 문을 뚫고 들어오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밖으로 빠져나오기 전 1층 방화 셔터들이 종잇장처럼 찢겨져 있는 광경이 눈에 얼핏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미 변종이 순순히 물러난 이유는 아마도.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강당은 우리가 들어온 문을 제외하면, 사방이 꽉 막혀 있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보이는 창문은 우리의 손이 닿지도 않을 만큼 높은 위치에 있었다.
"어쩌면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해서 놓아준 걸지도."
"응?"
"주변을 봐. 저 문을 제외하면 나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어."
"···그럼 우리 갇힌 거야?"
"아직 기회는 있을 거야.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쉬어 두자고. 어제 잠도 못 자서 피곤할 텐데. 너나 나나."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어차피 당장 나가도 무사히 도망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우리는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문득 내가 어제 비밀을 밝히지 않았더라면, 지수가 지금처럼 피로감에 힘들어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후회해봤자 시간이 돌아가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느냐다.
가득 쌓인 피로가 몸을 무겁게 짓눌렀지만 정작 잠은 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지수를 바라보니 그녀는 꾸벅꾸벅 졸면서도 예린을 연신 어루만지며 계속해서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죄책감을 느껴 지수에게 사과했다.
"미안."
"···뭐가?"
"편의점에 있을 때 내가 행동을 제대로만 했어도 이런 곳에 오지 않았을 텐데."
지수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아저씨 잘못 아니야. 따지자면 내 잘못이지. 아저씨는 기억도 잃었었는데. 아저씨는 최선을 다한 거야."
"직접 보지도 않아 놓고?"
나는 억지로 피식 웃었다. 그러자 지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꼭 직접 봐야 아나? 지금까지 아저씨가 우리에게 한 행동보면 알지! 그러니까 너무 자기탓 하지 마."
"······노력해볼게."
"뭐라고? 못 들었어."
내가 작게 중얼거린 말에 그녀는 되물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항상 그래 왔다.
내가 직접 잘못한 게 아니었음에도.
내가 조금이라도 연관된 일이라면 나는 강한 책임감을 느꼈었다.
···책임감.
아니, 죄책감이라고 해야겠지.
내가 한 실수, 내가 저지른 잘못, 내가 외면한 책임.
어렸을 때의 트라우마 때문일까.
누나는 이런 나를 피곤하게 산다며 매번 나무랐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게 내 천성인 것을.
난 안 죽어.
난 죽지 않아.
난 죽어서는 안 돼.
나는 속으로 끝없이 되뇌며 입을 열었다.
"거미 변종이 예린이한테 집착하는 거. 지수, 너도 느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