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2 - 42. 화원의 파수꾼 (9)
'살아 있었다고?'
나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거미 변종을 보며 허탈함에 중얼거렸다.
시발. 이 좆 같은 세상아.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냐. 내가 아이 2명 살리겠다고 발버둥 치는 게 그렇게도 아니꼬왔더냐. 사람 살리겠다고 몸부림치는 게 그렇게도 우스웠더냐. 왜 나를 방해하는 거냐. 왜! 대체 왜! 그게 아니라면 왜 저 괴물 새끼가 아직도 살아있는 거냔 말이다···.
문득, 불길한 상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죽이지 못한 거미 변종이.
놈이 나를 죽이고 나서 지수와 예린을 찾아 나선다면.
그렇게 지수와 예린이 거미 변종에게 죽는다면.
···그건 내 탓이다.
'안 돼.'
나는 어떻게든 일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한계에 다다른 몸은 꿈틀거리기만 할 뿐 움직여지지 않았다. 애당초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조차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움직여라. 움직여. 제발.
나는 흐릿한 시야로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사물의 윤곽은 선명하지 않았지만 얼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는 것에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끼르륽! 끄르르르르···]
쿠르르릉!
어느새 거미 변종은 몸을 거의 다 일으켰다. 하지만 놈도 결코 성하진 못했다.
거미 변종.
꽃가루 안개 사이에 드러난 놈의 모습은 이미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처참했다.
변종의 자랑이었던 단단한 나무 껍질은 모조리 박살 나서 부스러기를 휘날리고 있었으며, 엄청난 괴력을 자랑하던 각다귀 같은 손은 이리저리 꺾여 부러져 있었다.
살이 가득 올라있었던 몸통은 뾰족한 쇠 꼬챙이들과 찢어진 금속판들이 관통해 그사이로 내장을 흘리게 하고 있었고, 무거운 폐차들의 무게가 그것들을 짓눌러 상처를 더 벌어지게 만들었다.
8개의 역관절 다리는 남은 부분보다 뜯겨진 부분이 더 많아 균형을 잡기 힘들어 보였다.
뿌득- 뿌드득- 철퍽!
[끼히이이······]
거미 변종은 터진 몸통에서 온갖 내장을 쏟아 내고 있었다. 내뱉는 울음소리에는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어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어떻게든 살아 있었다.
살아남아서 나를 포기하지 않은 채, 나를 죽이기 위해 화원을 기어 오고 있었다.
내 지척까지 다가온 거미 변종은 그나마 멀쩡한 손을 하늘 높게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나를 향해 내리쳤다.
콰앙!
후두두둑-
내 바로 옆에 거미 변종의 손이 내리꽂혔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흙들이 내 몸을 두들겼다. 처음 보다 많이 약해진 괴력이었지만 나를 죽이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변종의 눈도 멀쩡하지 않았는지 이번에는 빗나갔지만···아마 다음은 빗나가지 않겠지.
다시 한번 거미 변종의 손이 휘둘러졌다.
쐐애애-
아.
나는 슬로우 모션처럼 나에게 천천히 떨어지는 손을 멍하니 지켜보며 죽음을 직감했다.
미안하다.
약속 못 지킬 것 같아.
「······살고 싶니?」
그리고 어디선가 들어온 본 적이 있었던, 포근하고 자애로운 목소리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금까지 들려왔던 환청과는 달리 이번 환청에는 죄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살고 싶냐고? 씨발. 그걸 말이라고 해?
나는 죽을 수 없어.
이렇게 죽어선 안 된다고.
나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기 위해 환청에 답했다. 정말로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겠지 하는 희망을 가지며.
「···도와줄 수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미안해」 '마지막? 그게 무슨-'
나는 대화가 이어진다는 것에 놀랐고, 환청이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것에 의아함을 가지고 반문하려는 순간 내가 있는 장소가 바뀌었다.
지금까지 본 나무들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거대한 나무의 주위는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모조리 파괴되고 남은 잔해물들만이 쌓여 있었다.
처음 보는 장소.
처음 보는 나무.
"···뭐야? 뭐냐고, 대체. 여기 어디야."
내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그 거목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네가 여기에 도달할 때까지, 이제 나는 도와줄 수 없어. 미안해. 미안해. 현-」
나무에 먹히듯 반쯤 묻힌 남산 타워가 보인 것을 끝으로 나는 쫓겨나는 듯 공간에서 퉁겨져 나갔다. 미처 말을 다 듣지 못하고.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거미 변종의 손이 나를 터트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애애액!
"헉!"
나는 재빨리 몸을 굴려 놈의 손을 피했다. 이상하게도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콰아앙!!
이번에도 나를 죽이지 못한 거미 변종은 짜증이 극에 달한 괴성을 내질렀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익!!]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만약 내가 본 것이 환각이 아니고, 내가 들은 것이 환청이 아니라면.
나는 내 몸을 황급히 둘러보았고 이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복부에는 여전히 녹 슨 쇠 꼬챙이가 꽂혀 있었으나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두근!
"크으으윽!"
그 순간, 내 심장이 강하게 박동하며 힘차게 흐르는 혈류를 따라 파란 핏줄이 전신에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정신을 잃고 쓰러질 뻔했지만 고통은 잠시였고, 이내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각성제를 맞은 듯 정신이 한 가닥씩 올올이 일어나 선명해졌다.
휘오오오오오-
푸른 입자와 검은 입자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바람이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나는 내게 기어 오고 있는 거미 변종조차 잊은 채 주변을 멍하니 둘러보았다.
내가 밟고 있는 이 대지가.
내가 보고 있는 이 광경이.
그것들이 품고 있는 정보가 내게 강제적으로 각인하다시피 쑤셔넣어졌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와 별개로 선명한 정신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 내가 있는 화원에는 사방으로 뿜어진 검은 입자가 회오리치듯 주변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하얀색을 자랑했던 꽃가루에는 하나 같이 새까만 검은 입자를 속에 품고 있었으며 꽃가루가 바람에 휘날리면 휘날릴수록 멀리 날아가 안착한 곳에서 검은 입자가 그 장소를 침식하게 만들고 있었다.
침식을 시작한 검은 입자는 주변을 더 황폐하게, 더 기괴하게 변화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악의를 가진 듯이.
그리고 주변의 모든 것이 검은 입자의 회오리에 집어삼켜지고 있는 와중에 단 하나, 미약한 푸른 빛이 보였다.
내 몸을 휘감고 있는 바람을 따라 움직이며 꺼져가는 듯 점멸하는 푸른 입자가 있었다.
검은 입자와 푸른 입자가 서로 맞부딪힐 때마다 그것들은 동시에 사멸해 흔적도 남지 않았다.
"정화해야 해···."
나는 나도 모르게 무심코 의미 모를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그르아아아아아!]
동시에 괴성으로 제 존재감을 표출하는 거미 변종이 지척까지 다가왔고, 그제서야 놈이 내 눈에 들어왔다.
사방으로 검은 입자를 뿜어내는 거미 변종.
다만 그 기세는 불규칙적이었으며, 세기도 약했다. 아마 성치 않은 몸 탓인듯 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도끼를 주워 들며 말했다.
"2차전 시작이다. 이 괴물 새끼야."
지금 내 머릿속에는 저 거미 변종을 죽여야만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나는 도끼를 강하게 쥔 채 거미 변종에게 달려들었다.
부우우웅!
쩌어억-!
놈이 휘두르는 손과 내가 휘두르는 도끼가 서로 맞부딪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처음과 매우 달랐다.
내 도끼는 더 이상 맥없이 튕겨 나가지 않았고, 오히려 변종의 손을 반으로 쪼개버렸다.
기대 이상의 결과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이 감상을 마냥 느긋하게 즐기기에는 내 몸을 유지시켜주는 힘이 얼마 못가 사라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저 변종을 확실하게 죽일 수만 있다면.
그렇게 지수와 예린이 살 수만 있다면.
지금 이것이 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 해도 괜찮았다.
[끼아아아아아아악!]
그나마 멀쩡했던 각다귀 같은 한쪽 손도 잃어 버리고, 그저 고통스러워하는 울음소리만 내뱉을 뿐인 거미 변종.
타타탁- 타탓
나는 변종의 머리를 날려 버리기 위해 달려가면서 크게 도약했다.
쿵!
쐐애애액!
거미 변종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놈의 앞에 도착한 나는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묵직한 도끼날이 공기층을 가르며 변종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놈은 남은 다리와 팔을 들어 어떻게든 도끼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도끼날은 두부 가르듯 변종의 육체를 갈라버렸다.
변종의 팔, 다리를 넘어 그것의 목까지.
서걱! 투툭- 툭- 데구르르르-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조각나버린 변종의 육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리고 잘린 목의 단면에서 내뱉어진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이 주변을 웅웅 울렸다. 지금까지 거미 변종이 내지른 울음소리와 포효와는 전혀 달랐다.
단말마(斷末魔).
죽기 바로 직전 빈사 상태에서 괴로워하는 소리였다.
살아 있는 생명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 내뱉는 처절한 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이내 거미 변종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긴장을 풀었다.
쿠웅!
"허억! 허억!"
나 또한 바닥으로 허물어지며 가뿐 숨을 내쉬었다. 복부의 고통도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고, 나를 중심으로 돌던 바람의 세기도 약해지기 시작했다.
정신 또한 점점 흐릿해지고, 무거운 탈력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만약 내가 단기간에 승부를 내지 못하고 시간이 질질 끌렸다면 지금 죽어 있는 것은 거미 변종이 아니라 내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결국 살아남은 것은 나다.
끝났다.
끝났어.
'이제 지수랑 합류하기만 하면···.'
내가 복부를 움켜잡으며 도끼를 지지대 삼아 몸을 간신히 일으켰을 때.
푸욱!
"······어?"
드르르륵!
푸화아악···
"커흐으윽!"
무언가 내 배를 관통하고, 복부에 박혀 있던 쇠꼬챙이를 흔들어 뽑았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눈앞이 아찔해졌다.
사물의 윤곽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려진 내 시야에 변종이 간신히 눈에 들어왔다.
놈의 세로로 길게 찢어진 입에서 뾰족한 혀가 튀어나와 내 배를 헤집고 되돌아간 듯한 모습.
'머리뿐만이 아니라 아예 몸을 갈라버렸어야 했나······.'
그 모습을 보니 뒤늦은 후회가 나를 자극했다.
···정말로 끈질긴 목숨이었다. 저 변종도, 나도.
대체.
대체 너희는 뭐냐.
대체 뭐길래 죽는 그 순간까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냐.
"대체 왜!!"
나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목소리를 토해내며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도끼를 들었다. 이번에는 제발 좀 죽기를 바라면서.
털썩-
하지만 내게는 도끼를 드는 것만이 한계였고, 배에서 쏟아지는 피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한 몸은 힘이 풀려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흐으···. 흐으으···."
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다가올 죽음을 기다렸다. 이제는 정말로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각-지익···다각······지이익-다각···
거미 변종이 화원을 기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나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탕!!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온 총소리.
'······?'
탕! 타앙!
[끼에에에에에······]
-풀썩
전역하고 나서 사회에서 들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도 못했던 총소리와 거미 변종의 몸이 완전히 축 늘어지는 소리가 애써 내 정신을 유지시켰다.
그리고 코로 맡아지는 짙은 화약의 냄새.
저벅저벅-
의문을 내뱉지도 못하고 겨우 숨만 쉬고 있는 나에게 정체 모를 존재가 걸어오고 있었다.
"━? ━━━. ━━?"
입을 열어 내게 무어라 말을 하는 걸 보니 사람인듯했지만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새롭게 나타난 존재가 또 다른 괴물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에 일말의 안도감을 느낀 나는, 퓨즈가 끊기듯 정신을 놓아버렸다.
그렇게 내 시야는 암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