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4 - 44. 뭐라고요? (2)
"······저기요? 세아씨?"
나는 닫힌 방문을 향해 한세아를 조용히 불러 보았지만 소리는 문에 막혀 흩어질 뿐이었다.
'정말로 갔어···?'
궁금해하게 만들어 놓고서는 궁금증을 풀어 주지도 않고 그냥 나가 버리다니. 사람 하나 미치는 꼴을 보고 싶은 것인가?
전신을 기운 빠지게 하는 허탈함을 뒤로한 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의문을 속으로 하나씩 정리해 보았다. 당장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생각뿐이기에.
우선, 동물적 특징을 가지게 된 사람들과 나무 인간들.
한세아가 말하기를, 그 괴물 같은 것들과 우리는 정도의 차이일 뿐 같은 감염자라고 했다.
어떻게?
대체 왜?
그리고 그녀는 내가 그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는 투로 말했었지. 마치 지금까지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전부 알고 있을 거라는 듯이.
다만 문제라면 내가 기억을 잃은 상태라는 것과 그에 관해 더 캐묻기 전에 한세아가 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또한 내가 반문하니 당황한 그녀의 모습은 내게 그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신감을 심어 주었다.
하지만, 만약 감염자에 대한 정보가 전부 사실이라면···. 나는 괴물이 아닌 사람을 죽인 것인가? 사람이라면 언젠가 치료할 수 있지도 않았을까?
···내가 지금까지 한 선택이 정녕 최선이었을까?
순간 손이 강하게 떨렸고, 나는 애써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냈다.
이 의문은 한세아와의 대화를 통해 풀 수 있을 것이니 답을 내리는 건 시간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다음은 나와 지수를 감시한 한세아의 의도.
솔직히 이건 내가 예민하게 반응한 게 맞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는 그녀로서는 섣불리 다가가는 것보다 멀리서 지켜보는 선택을 한 것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이런 세상에서는 옳은 선택이기도 하고.
막말로 무방비하게 접근했다가 우리가 정말로 나쁜 사람들이었다면 한세아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물며 여성이기도 하니까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겠지.
오히려 나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한세아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우리와 충돌을 걱정해서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면 나는 거미 변종과의 싸움 끝에서 구해지지 못하고 죽었을 테니.
그리고 마지막.
나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드는 의문.
어떻게 총기를 사용했는가?
내가 지수에게 듣기로는 일정 온도의 열을 감지한 무언가가 도구를 쓸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고 했는데, 분명 내가 기절하기 전에 들은 소리는 총소리가 분명했다. 군대에서 지겹도록 들은 소리가 그 소리였으니.
게다가 총에서 쏘아진 탄환이 거미 변종을 마무리하기 까지 했다.
지금도 그 총기가 멀쩡해서 사용 가능하다면 앞으로 여정에 큰 도움이 될 텐데···.
'아닌가? 오히려 소리 때문에 못 쓰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침대에 누워 조용히 정리하니 미처 풀리지 않은 피로가 몰려와 정신이 점차 몽롱해졌다.
나는 밀려오는 수마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 머리를 만지는 느낌에 얼마 가지 않아 잠에서 깨어났다.
몸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피로감은 싹 사라져 눈꺼풀만은 가벼웠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색이 주황색으로 바뀐 것을 보니 시간대가 저녁으로 바뀐 것일 뿐 하루가 꼬박 지난 것은 아닌 듯했다.
이제는 얼추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니 내 팔이 무언가를 꽉 붙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감촉이 느껴졌다.
"······!"
나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려고 했으나 따뜻한 체온을 가진 손이 내 눈가를 가려내가 일어나는 것을 막았다.
"그···. 깼어요?"
듣기 좋은 미성이 내 귓가에 속삭이듯 들리고, 은근히 달짝지근한 손 냄새가 코로 맡아졌다. 나를 일어나지 못하게 막은 사람은 내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인, 한세아였다.
"···제가 왜 이러고 있는 겁니까?"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들어와서 현우씨 상태 다시 한번 보려고 왔다가···."
"왔다가?"
"···기억 안 나세요?"
"······."
조심스럽게 건넨 한세아의 말에 나는 섣불리 대답하기보다는 내가 잠결에 무슨 행동을 했는지 떠올려보기로 했다.
애초에 깊이 잠든 것도 아니라서 그런지 내가 잠결에 한 행동들이 서서히 머릿속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현우씨? 자요? 몸 이상없는지 확인차 왔-'
'누나···.'
'흐앗! 흐으읏!'
'······.'
'아하핫. 이를 어쩌나···. 전 현우씨 누나가 아닌데요······.'
'······.'
'뭐, 일단 저라도 괜찮다면 이렇게라도 푹 쉬어요. 환자니까.'
오. 이런.
그러니까 내가 무의시적으로 옆으로 다가온 한세아의 허리춤을 붙들고, 놓아주기는커녕 더 달라붙으며 그녀의 배에 머리를 문댔다고?
그럼 이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감촉과 은근히 풍기는 살내음은······.
나는 거기까지 사고하고는 황급히 팔을 풀어 그녀를 놓아주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잠꼬대가 좀 심해서. 하하······하아."
나는 빠르게 사과를 건네며 어색하게 웃었다. 애써 웃은 것이 무색하게 웃음은 한숨으로 끝났지만.
"아뇨. 괜찮아요···."
한세아는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딘가 아쉬워하는 표정이 그녀의 얼굴을 잠시 스쳐 지나갔으나 나는 내가 잘못 봤으리라 생각하며 그녀에게 용건을 물었다.
"제 몸 상태 보러 오셨다고 하셨죠? 상태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세아씨 덕분에요."
"···회복이 확실히 빠르시네요. 다행이에요. 배는 안 고프세요?"
"배요?"
그 순간, 내 위장이 우렁차게 방 안을 울렸다. 빈속을 한번 느끼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는 공복감이 나를 강하게 재촉했다.
내가 부끄러움 가득한 표정을 한 채 말도 못 하고 배를 부여잡은 모습을 보던 한세아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풋 하고 웃었다.
"이틀을 꼬박 주무셨으니 당연히 배가 고프시겠죠.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먹을 것 좀 내올게요."
"예? 이틀이요? 제가 여기 얼마나 있었죠?"
나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한세아는 문턱에 반쯤 걸친 상태에서 내게 대답했다.
"네~. 무려 이틀이나 주무셨어요. 제가 데려왔을 때 하루 기절하시고, 또 이틀을 주무셨으니까 총 3일이 지났네요. 전 순간 잘못되신 줄 알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자세한 건 이따 얘기해요."
달칵-
그녀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나 홀로 있는 방 안은 다시 적막에 빠져들었다.
'이틀···.'
잠깐 낮잠처럼 잔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이틀하고도 저녁 시간대까지 자버린 것이었다니.
그만큼 몸이 혹사당했다는 의미였지만, 나는 속절없이 흘러버린 시간에 지수와 예린이 걱정되었다. 금방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도 벌써 3일이나 지났다고 하니 초조함이 가득 느껴졌다.
'몸 상태가 훨씬 호전되긴 했어도 여전히 휴식이 필요한데 그럼 또 며칠이나 지나갈지···.'
내가 암담한 상황에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 그때, 한세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을 들고 있었다.
"빈 속이시라 속에 부담되지 않게 죽 좀 만들어왔어요."
한세아가 내게 죽이 담긴 그릇을 내밀었고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식혀서 드세요."
"······."
나는 그녀가 내민 그릇을 받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포근해 보이는 흰쌀들 사이를 부드럽게 이어 주는 노란색의 줄기와 하얀색의 작게 뭉친 덩어리들.
···계란죽이었다.
그것도 따뜻한 계란죽.
"······? 왜 안드세요? 아직 숟가락 들 힘이 없으신가요? 그, 그럼! 제가 머, 먹여드릴까요?!"
내가 들기만 하고 먹지를 않자, 나를 지켜보던 한세아가 몸을 배배 꼬며 소리쳤다. 나는 그제야 살짝 정신이 돌아온 것을 느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혼자 먹을 수 있습니다."
"···그, 그러시구나······."
묘하게 시무룩해진 한세아를 내버려 두고, 나는 숟가락을 들어 혀가 데이지 않게 후후 불며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식은 죽을 입으로 넣었다.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적당히 따뜻한 온도를 머금은 계란죽이 천천히 내 입에서 씹혔다.
한 숟가락.
'이 여자. 총기도 사용할 줄 알고, 죽도 뜨겁게 덥혀 온걸 보니 확실히 뭔가 있긴 있다. 이 사람이 열 장비를 쓰는 방법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될 텐데.'
두 숟가락.
'그나저나 이거 인스턴트인가? 제품 이름이 뭔지 궁금하네.'
세 숟가락.
'인스턴트치고 건강한 맛인데···.'
네 숟가락.
'······.'
다섯 숟가락.
'···맛있네.'
나는 따뜻한 죽이 위장에 들어가자 몸이 노곤노곤하게 풀리는 느낌을 한껏 즐기며 어느새 그릇에 담겨 있던 계란죽을 다 먹어 치웠다.
한세아는 죽을 정신없이 먹는 내가 기특하다는 듯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나는 살짝 부끄러움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궁금한 건 많지만, 우선 감사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후후. 잘했어요."
"근데 이거 제품 이름이 뭔가요? 이런 인스턴트 제품은 처음 먹어보는 맛인데. 깔끔하니 맛있네요."
"네? 아······."
"······?"
그녀는 잠시 곤란하다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거 인스턴트 아니에요.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