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5 - 45. 뭐라고요? (3)
"직접 만드셨다고요?"
"네에."
"인스턴트가 아니고? 직접?"
끄덕끄덕
한세아는 내가 멍한 얼굴로 되묻는 말에 살짝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직 내 손에 들린 계란죽이 담겼던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직접?'
계란죽.
사실상 흰 죽에 계란과 소금, 참기름 약간이면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다. 특별한 재료가 필요하지도 않은 간단한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음식.
하지만 문제는 지금 세상은 특별함의 기준이 달라졌고, 먹을 수 있는 계란은 이제 충분히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체 계란을 어디서 구한 것일까.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한세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때가 왔다는 듯 표정을 굳히며 내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한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한세아가 나를 붙잡는 게 더 빨랐다.
"으아악!"
나는 두 손을 들어 올려 곧 닥칠 상황에 대비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던 기습은 온데간데없고 나를 걱정하는 한세아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왜 그러세요? 역시 아직 몸이 안 좋은거죠? 다음에 얘기할까요?"
"예? 얘기? 무슨 얘기요?"
"저번에 제가 현우씨가 불렀는데도 나가 버렸잖아요. 대화하던 중에 갑자기. 그래서 이왕 깨신 거 그때 마저 못한 이야기하려고 다가간 것인데 힘드실까요?"
"아."
모든 것이 내 지레짐작이라고 깨달은 나는 창피함을 느낄 새도 없이 한세아가 마음을 돌릴까 싶은 마음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합시다! 얘기! 아니, 해주세요! 저 대화하는 거 좋아합니다!"
엉망진창으로 내뱉은 나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뜬 한세아.
이윽고, 그녀는 내 옆에 나란히 앉아 대화의 물꼬를 틀었다.
"으음···. 아하핫. 막상 말하려고 하니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한테 묻고 싶은 게 있나요, 현우씨?"
"예. 많습니다. 아주."
"편하게 물어보세요!"
한세아는 뭐든지 물어보라는 듯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가슴팍을 내밀었다. 순간 도드라진 굴곡에 정신이 팔릴 뻔한 나는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저번에 해주신 감염자에 대한 이야기,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그···나무 인간들과 동물 귀 달린 사람들이 같은 감염자라고 하셨죠?"
나는 계란이야 가공된 계란 블럭이라도 썼겠거니 생각하며, 계란의 정체보다 더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이런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아하. 네. 그랬었죠. 제 추측이지만!"
"그렇구나. 추측···. 예?! 추측이라고요?"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변명했다.
"멀쩡한 사람하고 대화해 본 게 오랜만이라서 그만. 헤헷. 제 생각을 사실인 것처럼 말해 버렸어요."
"···사실이 아니었군요?"
"넵! 제 추측일 뿐이었습니다!"
"······."
"···죄송-."
내가 멍하니 한세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내 눈치를 보더니 사과하려고 했다. 나는 급하게 손사래 치며 그녀의 입을 막았다.
"사과할 게 뭐가 있어요. 그냥 제가 오해한 건데. 그럼 그 추측이라도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어디서부터요?"
나는 한세아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
처음부터 알려달라고 하면 되지만, 지금 그녀는 내가 기억을 잃은 상태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나를 치료해주고, 호의적으로 대하는 한세아라고 하더라도 굳이 내 약점을 먼저 밝힐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이런 추측성 정보라도 들을 기회는 흔치 않을 텐데···.
나는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추측이라도 좋으니까 전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나중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좋아요!"
한세아는 잠시 헛기침하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과 밖에 돌아다니는 나무 인간들의 차이는 하나예요. 바로 무엇과 결합했냐는 것."
"···결합?"
"네. 결합. 동물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집에서 키우던 반려 동물이나 야생 동물과 결합했을 것이고, 나무처럼 보이는 저 괴물들은 길가의 식물과 결합한 결과죠. 제 추측이지만!"
"그래서 동물 귀나 꼬리가 있는 거였군요···. 하지만 저는 바뀐 게 없지 않습니까. 그건 세아씨도 마찬가지처럼 보이구요."
"음. 현우씨 같은 경우는 드물지만 있어요. 그건 바로···."
"바로?"
한세아가 바로 말하지 않고 뜸을 들이자, 답답해진 나는 재촉하며 말꼬리를 잡았다. 그녀는 순간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인간과 인간이 결합한 결과예요. 적어도 둘이상. 제 추측이지만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현우씨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거미 같은 괴물은 나무 인간과 거미가 결합한 결과겠죠. 이것도 제 추측!"
인간과 인간?
그럼 내 몸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일수도 있다는 말인가?
마치 지킬 앤 하이드처럼?
그렇다면 환청처럼 들리던 것이 결합의 여파인 것인가?
'아니야.'
나는 순간 뇌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을 강하게 부정했다.
적어도 내가 들었던 환청은 또 다른 내가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사악했으며, 모두 한 가지 의도만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가 되자···라고 했었지.'
···그 환청은 오로지 내 죽음만을 바라고 있었다.
아니, 내 죽음뿐만이 아닌 다른 이들의 죽음 또한 바라고 있었다. 끝도 없는 악의를 가지고.
"몇 번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제가 본 여러 인간이 섞인 사람은 정신이 매우 불안정해 보였어요. 서로 다른 정신이 몸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구요. 현우씨는 괜찮으신가요?"
"···네. 저는 괜찮습니다. 아무 이상 없어요. 제가 이상해 보이십니까?"
"아니요! 멀쩡해 보여요!"
그러니 나는 적어도 한세아가 말한 경우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온전히 나로서 존재할 것이다.
비록 내 추측과 희망 사항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믿을 것이다.
내가 믿기 힘든 이야기에 혼자 속으로 곱씹고 있을 때, 무언가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후둑- 후두두둑- 쏴아아아아아아-
"앗! 비 온다! 마침 물이 더 필요했는데 타이밍 좋게 오네요. 옥상에 양동이 깔아 놓기를 잘했네. 역시 난 대단해!"
"창문 닫아야 하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창문은 다 닫아 놨어요. 옥상 문이랑."
한세아는 비가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
"그거 알아요? 세상이 이렇게 되고 나서 공기랑 물 엄청 깨끗해진 거. 그래서 안심하고 빗물도 마실 수 있는 거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월드 모텔을 떠올렸다.
물배라도 채우기 위해 세차게 내리는 빗물을 빈 생수통에 담아 마셨던 것이 떠오른다.
워낙 심한 공복에 한 행동이었지만, 만약 비가 오염되어 있었다면 빗물을 마신 것을 후회할 만큼 복통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마저 이야기를 다 하자면, 일단 저는 현우씨랑 똑같은 케이스가 아니에요. 저도 동물이랑 합쳐졌거든요. 그래서 원래 가지고 있던 천식도 없어졌구요. 아! 머리도 붉게 물들었네요."
한세아는 히히 웃으며 리듬을 타듯 다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녀의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침대가 작게 출렁였다.
"가장 크게 변한 점은 따로 있어요."
"뭔데요?"
"본능. 감각적인 부분? 그런 게 강화되었다고 해야 하나?"
"···본능?"
내가 작게 되묻자, 한세아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현우씨 일행을 지켜본 것도, 죽어 가던 현우씨를 구한 것도, 지금, 이렇게 제가 성심껏 치료해주는 것도. 전부 본능이 시켰어요. 어떻게든 당신을 살려야 한다? 그런 느낌이 계속 들었거든요."
나는 그녀의 말에 침을 작게 삼켰다.
"그리고 현우씨가 죽을 정도의 상처를 단기간에 회복한 것도 당신이 변했기 때문이에요. 아! 이건 제 추측! 하지만 그도 그럴게 평범한 인간은 이미 죽었을 거라구요. 그 정도 상처면."
나는 붕대가 동여매져 있는 복부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이제는 손으로 꾹꾹 눌러봐도 피부가 살짝 당기는 느낌만 들뿐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비록 겉으로 보지는 않았으나 직접 보지도 않아도 될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세아의 눈을 직시했다. 그녀의 눈은 주의 깊게 보지 못하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살짝 가라앉아 있었다.
"세아씨. 멀쩡한 사람을 만난 것이 오랜만이라고 하셨죠."
"네."
"당신에게···멀쩡하지 않은 사람의 기준은 어떤 겁니까."
한세아는 방금 전까지 기분 좋은 티를 냈던 것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얼굴을 바싹 굳혔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나와 한세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제 본능이 살리라고 시키지 않는 사람, 저를 속이려는 사람, 저를 위협하는 사람.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들. 이 중 한 가지라도 속하면 그건 제게 있어 멀쩡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나는 손에 흥건한 식은땀을 옷에 문질러 닦았다.
"······그럼 그것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알고 싶어요?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잖아요."
"저는 알아야겠습니다."
나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고, 한세아는 후후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건······."
꿀꺽-
내가 무의식적으로 낸 침 삼키는 소리가 조용한 방에 퍼졌다.
"···풋."
"······?"
"푸훗. 아하하핫. 꺄하하하하하하. 흐윽. 푸하하핫!"
한세아는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내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한세아는 눈초리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죄송-킥킥. 죄송해요. 왠지 모르게 긴장하신 것 같아서 장난 좀 쳐봤어요.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요?"
"······장난?"
"네, 장난! 제가 뭐 멀쩡하지 않은 사람들한테 뭘 하겠어요? 그냥 말도 통하지 않을 것 같으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이나 갔죠."
"하아···."
맥이 탁 풀린 내가 한숨을 길게 쉬니 아직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그녀가 내게 물었다.
"제가 뭘 했을 것 같길래 그래요?"
나는 한세아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거렸다. 그녀는 괜찮다며 말해 보라고 했다.
"다 죽이신 줄 알았습니다."
"뭐라고요? 이제 보니 현우씨 무서운 사람이었네. 이러면 구한 거 살짝 후회될지도?"
"하하···."
그녀는 오한이 드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멋쩍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쏴아아아아아-
빗줄기가 더 거세지는 소리에 나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과 해가 완전히 저물어 어느새 어둠이 가득해진 방 안.
우리는 시간이 가는 지도 모르는 채 대화에 몰입하고 있었다.
나는 정보를 하나라도 더 알기 위해 한세아가 하는 말에 집중했고, 그녀는 간만에 대화 상대가 생겨 즐거워했기 때문일까.
"읏차-. 현우씨. 비도 오고, 다시 밤도 되었으니까 잠이 오지 않더라도 침대에 누워서 푹 쉬고 있어요. 아직 몸이 완벽해진 건 아니니까! 저는 옥상에 둔 양동이 회수하러 가야 할 것 같아요. 생각보다 비가 더 많이 오네."
"저도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같이 가서 하시죠?"
"쓰읍! 가만히 누워 있어요. 위험하지도 않고, 금방 끝나는 일이니까요. 그럼 내일 봐요! 나머지 얘기도 내일!"
한세아는 빈 그릇을 들고 내게 손을 흔들며 방을 나섰다.
달칵-
풀썩
나는 문이 완전히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한세아.
살짝 긴 붉은 머리 단발을 한 여성.
우리를 둘러싼 긴장감은 그녀가 웃어넘김으로써 자연스럽게 무마되었지만, 적어도 한세아가 얼굴을 굳힌 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나에게 말하기 힘든 일들이 있긴 했겠지. 그렇다고 해도 내가 그것을 꼬치꼬치 캐물을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찌 되었든 내 목숨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 아닌가?
그리고 그녀가 본능을 따라 나를 구했다는 말.
그럼 혹시 지수와 예린이 내게 친숙하게 다가왔던 것도 그 강화된 본능의 일환인 것일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본능이 나를 우호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인데···.
문득 예린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예린이가 내게 말했던 푸른빛···.'
예린이가 보는 것이 내 눈에도 보였던 적은 총 2번이었다.
월드 모텔에서 나무 인간에게 쫓길 때 한번.
거미 변종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한번.
수많은 검은 입자들 사이에서 오직 내 몸만이 푸르게 빛 났을 때,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감쌌었다.
그리고 그 힘은 내게 압도적인 힘을 가져다주었었고.
아직도 그것들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단지 검은 빛은 매우 부정적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에휴···."
아무튼 한세아가 내게 거짓을 말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만 내가 행동을 좀 더 조심하게 할 필요성은 있어 보였다.
나는 거세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지수와 무사히 재회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녀들이 안전한 곳에서 숨어 있기를.
어둠이 그녀들을 숨겨 주고 있기를.
내가 그녀들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