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8화 (49/497)

Chapter 48 - 48. 뭐라고요? (6)

"근데 왜 하필 모텔이고, 학교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을 거점으로 삼으셨습니까?"

한세아는 내 물음에 멈칫했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느새 다다른 403호라 적힌 호실의 문을 열며 말했다.

끼이익···

"히힛. 궁금해요?"

"네. 특히 지금이야 거미 변종이 죽어서 괜찮다고는 하지만 놈이 살아 있었을 때는 위험하지 않았어요?"

한세아는 403호 안으로 성큼 들어갔고, 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 했다.

"일단 들어와요. 짐 챙기면서 얘기하면 되잖아요."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질렀다.

"오."

"헤헤. 대단하죠?"

그녀의 말대로였다.

망치, 못, 쇠지렛대, 몽키 스패너 같은 각종 공구류부터 시작해서 테이프, 목장갑, 가슴장화, 노끈 같은 안전 장비류, 락스 같은 소독제, 그 외 캔이나 통조림류 같은 식량이 선반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한세아는 방구석에 있던 원형의 스포츠 가방을 들고 오며 말했다.

"음. 우선 그 괴물이 나타난 지는 얼마 안 됐어요. 한···2주? 3주? 그 정도쯤 된 것 같네요. 멀쩡한 시계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 이제는 오늘이 며칠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2~3주 정도라···."

한세아가 푸른빛을 품고 있는 조각을 주운 것도 얼추 그 시기다.

지진, 푸른 조각, 변종.

이게 과연 우연일까?

만약 어떠한 상관 관계가 있다면 원인이 무엇일까?

내 머리로 생각을 이어가 봤자 결국 답을 알 수는 없기에 잠자코 그녀의 말을 더 듣기로 했다.

"처음에야 저도 무서웠죠.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거미 괴물이 나타나서는 이 주변을 온통 헤집고 다녔으니까."

"그런데도 왜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저라면 바로 도망갔을 것 같은데."

"···아깝잖아요. 제가 먼저 이곳에 와서 건질 수 있는 물자들 힘들게 모아왔는데, 갑자기 굴러 온 돌 때문에 모든 걸 버려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거죠."

지지직-지직

한세아는 가방의 지퍼를 낑낑거리며 열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뻑뻑한 지퍼는 그녀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손을 내밀어 대신 지퍼를 열어 주었다. 그녀는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말을 이었다.

"뭐, 불행 중 다행인지.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 그대로 거미 괴물이 제가 숨어 있는 이 건물에는 오지 않았어요. 아니면 락스 뿌린 게 효과가 있었던 걸지도? 제 추측이지만!"

"락스요? 그걸로 냄새 같은 흔적 지우신 겁니까?"

"네. 저는 물러설 생각이 없으니,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버텨야 했으니까요."

일련의 이야기를 듣는 나는 오직 한세아가 무모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단순히 운이 좋았던 건지, 락스가 정말로 효과가 있었는지는 이제 와선 거미 변종이 죽었기에 상관없어졌지만, 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그녀는 이미 죽은 목숨이지 않은가.

한세아는 내 표정을 보더니 그녀답지 않게 쓰게 웃었다.

"바보같죠?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저는 이곳을 포기할 수 없었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특별하다면 특별하죠. 여기는 제가 처음으로 만든 보금자리거든요. 이제는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그날에서부터 내내 도망만 다니다가 큰 마음먹고 만든 저만의 장소."

그녀는 선반에 놓인 통조림을 하나씩 꺼내 가방에 담기 시작했다. 한세아는 내게 가리는 음식 있냐며 중간에 물었고, 나는 다 잘 먹는다며 대답했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계속 이동하는 게 낫지 않았습니까? 비만 오면 넝쿨이 극성이잖아요. 한 군데만 오래 있는 건 위험하기도하고."

"······현우씨. 안전한 곳이라는 건 없어요. 매일 같이 안전한 곳을 찾아 헤매도 단지 그건 그 장소가 안전하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일 뿐이죠."

한세아가 행동을 멈추고 음울한 눈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그 눈은 내 입을 꾹 닫게 만들었다.

"제가 도망가지 않았던 이유는 사실 따로 있어요. 그동안 모은 식량? 쓸모 있는 물건들? 이런 건 의지만 있다면 언제고 다시 모을 수 있죠. 시간은 좀 더 걸리겠지만···."

"······."

"그때 당시에는 뭐랄까···. 너무 지쳐 있었거든요. 그래서 약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올 테면 와 봐랏! 내가 상대해 주마~ 이렇게 행동한 것 같아요."

그녀는 마지막에 장난스럽게 킥킥 웃었지만, 나는 한세아처럼 웃을 수 없었다. 그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꽉 쥐었을 뿐.

나는 아직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나는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며 이 세상을 버텨 왔는지 모른다.

어쩌면 앞으로도 알 수 없을지도 모르지.

···다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은.

하루라도 빨리 이 세상을 다시 안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나만이, 내가 반드시.

그때, 한세아가 가볍게 손뼉을 쳐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어느새 가방을 꽉 채울 정도로 식량을 담은 그녀는 그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또 다른 가방을 가져 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자, 이번에는 뭘 담아볼까요~. 현우씨가 골라봐요!"

"하하. 저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주절먹이라고 아세요? 주면 절하고 먹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농담을 건넸으나, 한세아의 일침에 애써 관리한 표정이 무너지고 말았다.

"···현우씨. 그 아이들이랑 같이 지냈을 때, 애들이 현우씨보고 아저씨 같다고 하지 않았어요? 누가 요즘 그런 말을 써요?"

"······."

아저씨 같은 게 아닌 평소에도 아저씨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그냥 조용히 있는 것을 택했다.

"이상한 얘기말고, 현우씨 얘기해줄 수 있어요? 궁금한데."

"제 이야기요?"

"···특히 그 아이들하고 어떻게 만났는지가 알고 싶네요."

나는 잠시 헛기침을 한 후, 그동안 내가 겪었던 일들을 하나씩 꺼내 이야기했다.

모텔에서 지수와 예린을 만났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편의점에 갔다가 지진 때문에 옴짝달싹 못했던 이야기, 내 실수로 예린이 넝쿨 변종에게 납치당했고, 예린을 구하기 위해 학교로 갔다가 변종과 싸우고 당신에게 구해졌다는 내용이었다.

막상 하나씩 꺼내서 이야기하자니 불과 며칠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세아는 내 이야기가 하나씩 끝맺을 때마다 내용에 따라서 웃기도, 울상을 짓기도 하는 다양한 표정 변화를 보여 주었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그녀였다.

그녀가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은 넝쿨 변종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때였다.

"넝쿨이 약간의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구요?"

"그 부분은 확실하진 않지만, 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넝쿨을 채찍처럼 휘두르기도하고, 제 일행을 죽이려면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생포한 걸 보면···."

한세아는 움직이는 넝쿨을 상상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끄, 끔찍하네요! 그 두꺼운 게 움직인다니!"

"······?"

"엣흠! 아,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넝쿨 괴물에게 당한 건 현우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때는 최선을 다한 거잖아요, 그쵸?"

- 아저씨는 최선을 다한 거야.

한세아가 내게 한 말이 강당에 있을 때 지수가 내게 해준 말과 똑같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하···."

"어어? 왜 웃어요?"

"아뇨, 그냥. 저 위로해주신거죠? 감사합니다. 덕분에 힘이 나네요."

"헤헤···."

나와 한세아는 한동안 웃으면서 서로 마주 보았다. 그러다가 뚝.

"짐이나 마저 챙기죠."

"그럽시다."

최대한 통조림 위주로 넣다 보니 추가로 가져온 가방도 어느새 가득 찼다. 한세아는 이마의 땀을 훔치는 시늉을 하며 손짓 했다.

"후아. 일단 지금은 이 정도면 됐구, 다시 저 따라오세요. 보여드릴게 있어요."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나는 앞서나가는 한세아에게 바싹 붙으며 물었다.

"뭔데요?"

"으음···. 저도 처음 보는 거라 뭔지 모르겠어요. 아마 현우씨도 처음 볼걸요? 저기예요. 가서 직접 보는 게 나을 거예요."

내 호기심을 한껏 자극한 그녀는 이윽고 도착한 405호 호실 문을 열었다.

405호 내부의 선반에는 흰색 천으로 둘러싸진 긴 막대기와 아마도 거미 변종을 마무리하는데 쓰였을 총기가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덤으로 내가 지수에게 잠시 맡아둔 도끼까지.

한세아가 손을 들어 흰색 천을 가리켰다.

"저거예요. 가서 봐봐요."

나는 저것이 대체 뭐길래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지 의아해하며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괜히 뜸들이지 않고 흰색 천을 바로 걷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펄럭-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끝이 뾰족한 검은색 막대기.

"···나뭇가지?"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한세아가 내 말에 긍정했다.

"그렇게 보이죠?"

"아닙니까? 아무리 봐도 그냥 검은색 나뭇가지인데요?"

"으음···. 현우씨. 지금 현우씨가 손에 들고 있는 그거요. 우리 전리품이에요."

"예? 전리품?"

한세아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현우씨가 빈사 상태로 만들고, 제가 총으로 마무리한 거미 변종. 그 괴물의 유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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