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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52화 (53/497)

Chapter 52 - 52. 지하 터널 (2)

계단을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밝고 포근한 분위기에서 어둡고 서늘한 분위기로 바뀐다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저벅- 저벅-

아직 계단 중반에 불과했지만, 묘하게 달라붙는 지하의 습기가 벌써부터 몸을 질척질척하게 만들었다.

부스럭-부스럭-

딸깍- 딸깍-

한세아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방을 뒤적거려 손전등 2개를 꺼냈다. 그녀는 작동이 잘되는지 확인하고는 내게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현우씨. 일단 손전등은 켜지는데 최대한 아껴야 하는 건 아시죠? 요즘은 사용할 수 있는 건전지 구하기가 힘들어서···."

"아. 네네. 그럼 필요할 때만 킬까요?"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한세아에게 물었다. 그녀는 내게 가깝게 붙으며 내 손을 잡았다.

"아뇨.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번갈아 가면서 한 명씩 키죠! 그리고 이 손은 어두운데 서로 놓치면 안 되니까 잡는 거에요. 싫은 건 아니죠?"

어차피 손전등을 키면 서로의 위치가 자연스럽게 확인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와 별개로 어둠 속에서 온기를 서로 느끼기만 해도 불안감이 한층 해소될 것이다 라는 생각도 들었기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좋죠. 그럼 이제 갑시다."

나와 한세아는 다시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계단을 다 내려온 우리는 손전등을 켜서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은 내부를 비췄다.

손전등의 작은 전구에서 뿜어지는 조그마한 원형의 빛이 내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며 어둠을 밀어내었다.

그렇게 빛이 지나간 어두운 공간은 한순간이지만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고,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지반을 떠받치기 위해 일정 간격으로 세워진 사람보다 큰 원기둥들, 천장에 매달린 파란 배경의 간판.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휘감고 있는 넝쿨들.

식물이 자라는 필수조건에는 빛이 들어 있지 않다.

산소, 수분, 토양만 있으면 식물은 어떻게든 성장하며 제 존재를 드러낸다.

물론 그 성장치는 작을 수밖에 없기에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넝쿨도 지상에 있는 넝쿨과 달리 줄기가 매우 얇았으며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하 또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지상도, 지하도 전부 그것들로 덮여 있는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때. 작은 발걸음 소리가 지하에 울려 퍼졌고, 발걸음 소리의 주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어서 가요. 이 정도 예상은 했어요. 그나마 나무 인간은 보이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죠. 가요, 얼른요. 약속 지켜야 한다면서요."

"···네. 약속 지켜야죠. 반드시."

나는 손전등을 여기저기 비추며 문득 떠오른 점을 한세아에게 물어보았다.

"근데 그 뭐지? 소화기나 방독면 같은 장비가 안 보이네요?"

역 내부는 뒤덮은 넝쿨 탓에 얼핏 보면 지저분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넝쿨만 없다면 역의 형태만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깔끔했다.

불이 꺼진 편의점 내부는 모조리 박살 나있었고, 회색 벽면에 붙어있어야 할 소화전이나 재난 물품 보관함은 흔적만 겨우 남긴 채 뜯겨 있었다.

지상에는 자원이 꽤 남아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오히려 지하에는 아무것도 없는 기현상에 의구심이 들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얻을 수 있는 자원도, 나무 인간도.

있는 것은 오직 끈적한 체액을 뿜어내는 넝쿨뿐.

"흐음···. 글쎄요? 저보다 이곳에 온 다른 생존자가 털어간 걸까요? 저라고 이 근처에 처음부터 자리 잡고 있었던 것도 아니구···."

"여기에 내려온 적 없으셨나 봐요?"

"···여기에 혼자 어떻게 내려와요······. 지금도 무서워 죽겠는데. 그리고 그때는 이 조각도 없을 때라서 총도 못 썼단 말이에요."

한세아는 내 말에 몸을 부르르 떨며 질색하는 얼굴했다. 나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다. 나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속으로는 무서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게 손전등 하나 쥐여주고 지하의 서늘함에 음산함까지 담긴 이곳을 둘러보고 오라고 하면 절대 혼자서는 못 간다며 벌벌 떨고 말았겠지.

나는 내 손에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를 좀 더 강하게 잡았다. 그러자 한세아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왜요? 뭐 있어요?"

"아뇨. 다 왔어요. 여기로 들어가면 될 것 같아요."

나는 그녀의 물음에 답하기보다는 손전등을 위로 비춰 어느 간판을 밝혔다. 간판에 반사된 빛이 아래에 있는 개찰구들을 비추었다.

<← ①수원 타는 곳 왕십리 · 선릉②→>

한세아는 전기가 돌지 않아 불이 꺼진 개찰구를 넘으며 피식 웃는 소리를 내었다. 옆 개찰구를 통해 넘어가는 나는 의아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왜 웃어요?"

"지하철 무임 승차하면 벌금 30배인 거 알아요? 지금 둘이나 무임 승차하려고 하는데 그럼 60배인가?"

"에이, 아니죠. 저희는 지하철 타는 게 아니라 선로만 빌리는 거잖아요."

"···그럼 더 큰 일 아니에요? 그 벌금이 더 높을 텐데."

"아."

우리는 그렇게 실없는 소리를 잠시 주고받으며 개찰구를 지나 한층 더 아래로 내려갔다. 손전등의 한 줄기 빛에 의지한 채.

'벌금이라···.'

나는 한세아에게 좀 더 바싹 붙으며 바랐다.

벌금을 얼마라도 내도 좋으니 지금 우리의 행동을 막아줄 공익 요원이 나타나기를.

젊은 남녀가 돈도 내지 않고 무임 승차하려는 버릇은 어디서 배운 거냐고 잔소리해 줄 역무원이 나타나기를.

그 잔소리를 들으며 우리가 서로 멋쩍게 웃으며 바라보는 상황이 오기를.

이런 생각은 계단을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더 강해졌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강하게 바라고 있어도.

곧 나타날지도 모른다며 속으로 계속 기다리고 있어도.

···역무원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새 다 내려온 매교역의 가장 아래에 위치한 지하철 대기 장소.

결국 변하지 않는 현실에 나는 고개를 털어 잡념에서 벗어났고 손전등을 전방으로 비추었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당혹성을 내뱉었다.

"···어?"

"앗."

스크린도어가 부서져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선로가 있는 역 전체가 물에 잠겨 있었다.

찰박-

내가 수면을 향해 한걸음 내딛자, 고요히 잠겨 있던 물에 파문이 일어났다.

넓은 공간을 다 커버하지 못해 어슴푸레해진 빛이 검게 물결치는 수면을 간신히 비쳐주었다.

지지직- 지직-

그때, 한세아가 가방의 지퍼를 조심히 열며 말했다.

"비가 와서 물에 잠겼나 봐요. 그럴 줄 알고 제가 챙겨 온 게 있죠!"

당당한 몸짓으로 내게 가슴 장화를 내미는 한세아.

"역이 잠긴 거 보니까 지금 여기는 수위가 낮아도 선로가 있는 곳은 수위가 꽤 될 거예요. 지하라서 수온도 엄청 낮을 거구. 장비도 없이 그냥 가면 도중에 저체온증으로 쓰러질지도 몰라요."

나는 그녀가 건넨 가슴 장화를 착의하며 긍정했다.

"준비가 철저하셨네요. 덕분에 물에 젖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습니다."

"이거 봐요. 저 엄청 도움 되지요? 제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요? 칭찬해야겠다는 생각 무럭무럭 들지요? 히힛!"

···히······힛

나보다 빨리 가슴 장화를 착의한 한세아는 가슴팍을 내밀며 콧대를 위로 올리고서는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웃음소리가 지하철 갱도를 따라 길게 울리자 화들짝 놀라며 입을 막았다.

"잘하셨습니다. ···가슴 장화 챙겨온 거요."

나는 내가 한 말을 한세아가 오해할까 싶어 빠르게 뒷말을 덧붙였다. 그녀는 이번에는 소리 내지 않고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현우씨, 잠시만요. 아직 더 해야 할 게 남았어요."

바스락바스락- 꽈악-

한세아는 가방을 다시 황급하게 열더니, 비닐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가방이 물이 젖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봉투로 꽉 묶어 봉인했다.

"가방도 무거운데 봉투로 이렇게 막아 놓으면 물에 조금 뜨니까 이대로 끌고 가면 될 거예요. 자, 손!"

"···손."

나는 한세아의 손을 다시 잡은 채, 수위가 내 허리춤까지 올 것이라고 예상되는 물에 잠긴 선로로 움직였다.

찰박- 찰박- 찰박-

빠드득- 빠각- 빠스슥-

발을 옮길 때마다 스크린도어의 잔해가 밟혀 바닥에 뭉개지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내가 곧 들어가야 할 수면을 손전등으로 비추었다.

물의 움직임에 따라 그 밑에 가라앉은 흙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바쁘게 움직이며 물을 뿌옇게 만들고 있었다.

온갖 먼지가 뒤섞여 있는 듯한 흙탕물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순간 몸서리가 쳐졌지만, 이제 와서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발을 담갔다.

···첨벙

최대한 조심하게 발을 집어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하가 워낙 조용해서 그런지 물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대충 내 허벅지 바로 위까지 잠기는 수위.

나는 한세아가 선로로 발을 들이밀기를 기다렸다.

···촤륵

가방을 수면 위로 띄우고 들어온 그녀는 확실히 나보다 키가 작아서 그런지 허리춤까지 물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걱정되는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괜찮다며 손짓 했다. 나는 이동하기 전 한세아에게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질문을 던졌다.

"세아씨. 이 쪽 방향으로 가면 수원역이 나오겠죠? 착각해서 반대로 가는 건 아니겠죠?"

"너무 걱정 말아요, 현우씨. 이 쪽 방향이 확실하게 맞으니까. 이제 가죠. 수원역을 향해서."

촤르륵- 촤륵- 첨벙···

우리는 두 다리로 물살을 조심스럽게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과 어둠이 제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는 터널을 한 줄기 빛으로 가르며.

그저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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