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53화 (54/497)

Chapter 53 - 53. 지하 터널 (3)

부스럭-부스럭-

스르륵- 촤륵- 스르륵- 촤륵-

비닐로 인해 간신히 수면 위에 떠 있는 가방이 물살을 조용히 헤친다.

우리의 다리가 차가운 수면을 힘겹게 가르며 물소리를 낸다.

나와 한세아는 터널에 진입한 순간부터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추위에 조금씩 떨리는 숨소리만 낼 뿐.

빛을 보지 못한 지하의 물은 상상 이상으로 차가웠고, 가슴 장화와 바지를 뚫고 들어와 근육을 뻣뻣하게, 굳게 만들었다.

그나마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어서 생긴 관성으로 나와 한세아는 한걸음, 한걸음 겨우 내디딜 수 있었다.

나는 손전등으로 비춰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펼쳐진 앞을 멍하니 바라보며 계속 걸었다.

언젠가 도달할 그 끝을 향해.

미끌-

"우왓!"

그 순간, 내 뒤에서 힘겹게 발을 옮기고 있던 한세아가 중심을 잃고 물에 빠지려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서로 손을 꼭 붙들고 있었기에 그런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왓! ······왓

멀리 퍼지는 메아리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조심해요. 바닥이 생각보다 많이 미끄럽네요. 걸리는 것도 많고."

"···네."

한세아가 넘어질 뻔한 이후로, 우리의 걸음은 한층 더 조심스러워졌고, 이동 속도가 느려졌다. 바닥에 낀 물 때가 장화를 신고 있어도 미끄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비록 차가운 수온과 무거운 물이 우리를 힘겹게 만들었지만.

적어도 이 물에 온몸이 다 젖는 것보다는 낫기에.

이미 가방을 미느라 물에 젖은 손은 감각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차갑게 굳었다. 그나마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건 한세아와 서로 맞붙잡은 손뿐.

나는 물이 싫었다.

정확히는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이를 가진 물이 싫었다.

그도 그럴게, 내 다리가 닿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함부로 물에 들어간다는 말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간혹 바닥에 물컹거리는 것이 밟힐 때마다 흠칫하며 계속 놀라고 있건만.

손전등으로 터널 내부를 한번 훑어보니, 모든 벽면과 천장조차 뒤덮고 있는 넝쿨이 보여서 내가 밟은 것도 넝쿨이라고 예상할 수 있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기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물에 대한 공포증은 점차 희석 되었어도 그 잔향은 아직 남아서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후우우···."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차갑게 가라앉은 습기 가득한 산소가 폐를 채운다. 무겁게 굳은 다리와 차갑게 식은 몸과 달리, 열이 오른 내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느새 볼을 타고 턱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은 수면으로 떨어지며 미약한 파문을 만들어내었다.

그때.

한세아가 잡은 내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나는 손전등을 전방에 고정시킨 채 고개만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짝 파랗게 질린 입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 조용하지만 떨리는 숨소리.

한세아 또한 나와 별반 다르지 않게 매우 지쳐 보였다.

"우리···. 조금만 쉬었다가면 안 돼요···?"

나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손전등을 전방으로 비춰 보아도 보이는 것은 오직 잔잔하게 출렁이는 물뿐이었기에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더 걸어 봅시다. 앞에 뭐라도 쉴 수 있는 공간이 나오면 거기서 좀 쉬었다 가죠."

"네···."

그녀는 추위에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의 저항력을 조금이나마 줄여보기 위해 내가 앞장서고 한세아가 내 바로 뒤에 붙으며 따라오고 있었지만, 이젠 그마저도 한계인듯 해보였다.

촤르륵- 촤륵- ···첨벙

다시 말없이 이동하기를 몇 분.

반짝-

손전등의 빛을 반사시키는 금속 재질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한세아의 손을 한층 더 강하게 잡아 그녀에게 신호를 보냈고, 한세아는 내게 더 바싹 붙으며 작게 속삭였다.

"뭐 있어요?"

"···지하철이 있는 것 같아요. 운행을 정지한."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것의 모습은 점점 더 명확하게 드러났다.

선로를 이탈한 채 옆으로 누워 물에 반쯤 잠겨있는 지하철.

군데군데 비치는 유리창 너머 지하철 내부에 뿌옇게 일어난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이 보였다.

나와 한세아는 잠시 서로 바라보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서 좀 쉬다가요."

어느새 앞장 선 한세아가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손전등은 전방에 고정된 상태였다.

"좋습니다. 위로 올라가면 물에 젖지는 않겠어요. 다행히."

첨벙! 첨벙! 첨벙!

겨우 숨을 돌릴 곳을 찾은 우리는 서둘러서 수몰된 지하철을 향해 움직였다.

거친 발걸음에 물소리가 크게 났지만, 지금 당장은 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기에 움직이는 속도를 더욱 높일 뿐이었다.

이윽고, 지하철 선두 객차 앞에 도착한 우리는 어떻게 올라가야 할지 고민했다.

무언가를 밟고 올라가기에는 선두 객차의 전면부 유리가 날카롭게 깨져 있어서 발판으로 쓰기에 마땅치 않았고, 그렇다고 유리를 전부 깨기에는 소음이 얼마나 크게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 지하 터널에는 별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불필요한 소음은 위험을 부르기 마련이니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예전보다 강해진 내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악력도 강해졌으니 각력도 마찬가지로 강해졌을 것이라 생각하며.

"세아씨. 제가 한번 위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제가 위에서 잡아당겨 주면 세아씨도 올라올 수 있겠죠?"

"네.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추위를 달래기 위해 연신 팔을 쓸어내리던 한세아는 내 말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두 팔을 위로 뻗고 바닥을 강하게 박찼다.

"흡!"

타악-!

촤아아악!

텅-

내 손보다 더 차가운 금속판이 손끝에 닿았고, 수면을 빠져나온 한쪽 발은 물을 사방으로 튀기며 객차 위에 걸쳐졌다. 걸친 다리를 잡아당기듯 힘을 주며 몸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객차 위에 올라온 나는 뒤에서 들린 소리에 손전등을 아래로 비추었다.

"악! 어푸! 에치!"

뜬금없는 물세례를 맞은 한세아는 얼굴에 튄 물을 급하게 닦아내고 있었다. 갑자기 천장에서 물이 떨어질 리 없으니 그녀가 저 꼴이 된 건 내 탓이 분명했다.

나는 괜스레 찔리는 마음에 무심코 속으로 생각한 말을 겉으로 툭 내뱉고 말았다.

"좀 뒤로 물러나시지 그랬어요."

"······너무해요. 지금 제가 잘못했다 이거예요?"

"아뇨. 죄송합니다···."

원망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한세아의 모습에 나는 황급히 그녀에게 사과하며 손을 내밀었다.

"가방부터 주세요. 다음에 세아씨 올라오는 거 도와줄게요."

가방에 이어 한세아까지 위로 올라오게 도와 준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금속판이 가지고 있는 한기가 엉덩이를 타고 허리로 올라왔지만 적어도 수온보다 차갑지는 않았기에 오히려 한결 낫기까지 했다.

부스럭부스럭-

한세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열더니 휴대용 캠핑 버너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받침대를 펼쳐 가스통과 연결했다.

탁! 탁!

푸확-

한세아의 손짓 몇 번에 가스불이 확 하고 솟아올랐고, 그와 동시에 주변의 어둠이 좀 더 물러나며 은은한 열기가 주위를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불이 켜진 것을 확인하고,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손전등 전원을 눌러 껐다. 한 줄기의 빛은 사라졌지만, 그 빈자리를 또 다른 빛이 채워 우리는 어둠에 질식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아···.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두 손을 불 가까이 댄 한세아는 녹아내리는 듯한 표정으로 은은한 따스함을 한껏 즐기기 시작했다. 불이 세지는 않았지만 퍼지는 온기에 나 또한 무겁게 굳은 손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불이 최고죠?"

"최고긴 한데···. 이렇게 막 써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가스 아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세아는 두 손을 불 앞에서 비비며 작게 말했다.

"아직 새것 한통 더 있기도하고, 이때 아니면 언제 쓰겠어요? 괜히 아끼다가 얼어 죽는 것보다 나아요."

"그 말도 맞네요."

우리는 푸르게 솟구치는 불을 바라보며 침묵에 빠졌다. 가스에 의해 타오르는 불은 어둠에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피어올라 제 존재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침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연 한세아에 의해 깨졌다.

"얼마나 온 걸까요? 절반은 왔겠죠?"

"···글쎄요. 절반 정도 왔다면 좋겠지만···. 체감상 이제 한 삼분의 일 정도 지났을 것 같습니다."

기대감을 가지고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내가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자 시무룩해지며 작게 중얼거렸다.

"물이 너무 차가운데···. 아직 절반도 지나지 않았다니···. 아아. 빨리 나가고 싶어라···."

한세아의 말에 나는 무언으로 긍정했다.

수온이 생각보다 너무 낮았다.

차가운 물은 우리의 몸을 굳게 만들어 속도를 느리게 만들었고, 허리춤까지 오는 수위는 우리의 움직임을 끊임없이 방해했다.

거기에 지속적으로 체온을 뺏기기까지 하니 체력을 급속도로 잃어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수온도, 우리의 발길을 잡는 수위도 아닌.

끝을 모르는 터널에 퍼져 있는 어둠이 주는 공포와 압박감.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온 지 채 하루,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건만.

빛.

우리에겐 더 강한 빛이 필요했다. 아주 절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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