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 - 54. 지하 터널 (4)
"현우씨."
한세아가 체온을 되찾은 손을 얼굴에 비비며 나를 불렀다. 불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
"문득 든 생각인데요. 왜 여기에 물이 차 있을까요? 그것도 이렇게나 많이?"
"그야 그동안 비가 많이 내렸으니까요···?"
나는 말하면서 느껴지는 의문에 말꼬리를 흐리다가 입을 꾹 닫았다. 한세아는 그런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현우씨도 이상한 걸 느꼈죠? 지하라서 물이 찬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애초에 이 선로도 지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과 같이 연결되어 있을 텐데 말이에요···."
그녀의 말이 맞다.
사실 말이 지하철이지 가끔은 위로 올라가 지상을 달리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지하 터널은 지하수의 침수 피해를 막기 위해 배수 시설 하나만큼은 설계가 잘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지하가 물에 잠겨 있다니?
그리고 역이 물에 잠겨 있는 상황에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넘어간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물이 흐르는 느낌없이 그저 고여 있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내가 처음 수면에 발을 담그기 전만 해도 물은 그저 고요하게 가라앉아 일말의 파문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였던 것이 떠올랐다.
문득 뇌리를 스친 불길한 상상에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한세아에게 말했다.
"···세아씨. 저희 지금까지 이동할 때 물이 흐르는 것을 느낀 적 있습니까?"
"···아뇨. 그런 건 못 느꼈어요."
내 착각이 아니라는 그녀의 대답에 나는 침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무언가가 터널의 앞뒤를 막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그렇지 않다면 지하에 물이 찰 일도, 그 물이 흐르지 않을 이유가 하등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우리가 가는 길이 중간에 막혀 있다면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때.
꼬르륵···
내 건너편에서 배꼽시계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터널은 워낙 조용했기 때문에 자그마한 소리도 크게 들렸다.
내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한세아가 어두운 상황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들어 가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긴 걸음 운동을 제대로 했으니 가볍게 먹은 아침이 벌써 다 소화될 만도 하다. 나도 마침 슬슬 배가 꺼지고 있었기 때문에 간단한 식사라도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뭐 좀 먹을까요?"
"아니요···. 나가서···. 나가서 먹는 게 나아요."
자기 위장 소리가 터널에 퍼진 것이 어지간히도 창피한지 한세아는 말을 띄엄띄엄 겨우 내뱉었다.
"통조림이라도 냄새는 많이 나니까···. 아직 여기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정리되지 않은 그녀의 말이었으나, 충분히 알아들을 수는 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살짝 장난기가 돌아서 뒤늦게 말을 덧붙여 보았다.
"그럼 세아씨. 이제 얼추 체온도 회복했으니, 다시 출발합시다. 갈 길이 멀어요. 그··· 나가서 밥도 먹어야 하고."
"······후아. 아직 몸이 덜 녹았지만 당장은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얼른 가죠!"
그러나 내 말을 못 들은 척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긴 한세아는 체온 유지를 위해 웅크렸던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어냈다.
우리는 밥을 먹지는 않았지만, 땀을 흘려 생긴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생수 한 병을 나눠 마셨다. 그리고 그녀는 뜨거운 가스 버너 받침대를 남은 물로 차갑게 식힌 뒤, 다시 가방 안에 넣어 정리했다.
나는 버너가 꺼지기 전에 미리 손전등을 켜 전방을 향해 비췄다. 한세아가 말없이 내미는 손에 나도 말없이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퉁 ?퉁 ?퉁
객차 위를 걸을 때마다 내부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듯 유리가 둔탁한 소리로 화답했다. 나는 전방을 향하던 손전등을 아래로 내려 객차 내부를 비쳐보았다.
객차 유리와 객차 안에 고인 수면이 손전등 빛을 이중으로 반사시키면서 그 주위에 미약한 빛을 흩뿌렸다.
우리가 밟고 있는 지하철의 아래쪽은 옆으로 넘어지면서 생긴 충격에 온전히 남아 있는 유리가 없는 듯했다.
물에 퉁퉁 불어 있는 좌석 시트,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물때가 조금씩 좀 먹기 시작하는 바닥, 천장, 창틀, 문틀, 물에 둥둥 떠 있는 원형의 손잡이들.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수록 내부를 채우고 있는 검은 이끼들.
거기까지 확인한 나는 다시 손전등을 전방으로 비추었다.
지하철 내부에 검은 이끼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유리가 한층 더 미끄러워졌기 때문이다.
"세아씨, 발 조심해요. 미끄러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우리 손도 꽉 잡고 있으니까 안 넘어질 거예요."
한세아는 그렇게 말하며 잡은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리고 그녀도 내가 비춘 객차 내부를 보았는지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현우씨. 근데 이 지하철은 왜 여기 있는 걸까요? 객차 안에도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음. 막차 시간대 기차라 그렇지 않겠습니까?"
한세아가 내게 물어본 것은 나 또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에 다시 한번 방금 본 객차 내부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각 객차를 이어 주는 통로의 문은 활짝 열려 있어 물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떠오른다. 어차피 고여 있는 물이라서 흐른다고 할 것도 없었지만.
그나마 보였던 것은 물을 뿌옇게 만드는 주범인 객차에 붙어 있던 먼지와 치우지 못한 쓰레기들뿐이었다.
그것들을 제외하면 지금도 어렴풋하게 보이는 내부에는 여전히 텅 비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뿌득- 뿌득- 뿌득-
한층 더 심해진 이끼와 물 때에 장화의 밑창과 유리가 서로 비벼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내 뒤에서 들리는 한세아의 조용한 숨소리를 들으며 마저 생각을 이어갔다.
지하철이 정거장이 아닌 선로 중간에 멈춰 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이 지하철이 확실하게 운행 중이었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매교역에서 수원역으로 가는 선로에 있으니 타고 있었던 승객들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원역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1호선의 경기 남부권 중심역으로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에서야 세상이 망했으니 교통의 요충지건 뭐건 전부 의미가 없어졌지만, 적어도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는 유동 인구가 분명히 많았을 거란 말이다.
그렇다면.
이 안에 있던 것들은 전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에 한숨을 푹 내쉰 나는 손전등을 한 바퀴 돌려 그동안 빛이 비추지 못해 어두웠던 터널의 모습을 다시 눈에 담았다.
터널 벽면에 붙어 있는 수많은 검은 이끼와 넝쿨들, 걸을 때마다 통통 울리는 소리, 서늘한 수로의 공기가 한데 어우러져 처음보다 더 기괴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손전등이 어슴푸레하게 밝히는 이 풍경은 현실이 아닌 것처럼 괴리감이 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변해 버린 세상은 내가 눈을 뜬 직후부터 내게 물었다.
이 세상에 적응한 것이 맞니?
내가 맞다고 대답하거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세상은 그것보다 더한 현실을 보여 주며 되묻는다.
정말? 정말로 이 세상에 적응한 것이 맞니?
마치 현실에는 더한 밑바닥이 있다는 듯이.
내가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 시험하는 듯이.
그렇게 끊임없이 묻는다.
똑- 똑-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을 느낀 나는 그제서야 상념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나와 한세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이어진 객차가 보이지 않았고, 이윽고 잔잔한 파문이 이는 수면이 보였다.
어느새 우리는 지하철의 후미에 도착해 있었다.
"후우···. 세아씨. 이번에도 제가 먼저 내려갈 테니까 아까처럼 합시다."
"넵. 조심해요."
한세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았고, 나는 가벼운 손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손전등을 입에 물고 먼저 한쪽 다리를 쭉 뻗어 물에 담갔다.
···풍덩!
올라갈 때와 다르게 내려갈 때는 소리가 크게 났다. 최대한 얌전히 내려갔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건 없네요. 제가 밑에서 받쳐드리겠습니다. 천천히 내려오세요."
"저 무겁다고 하면 안 돼요? 알았죠?"
"안 그럴게요. 새라면서요? 그럼 깃털처럼 가볍겠죠."
"그럼 나중에 무겁다고 하면 죽어요?"
묘하게 긴장감이 도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한세아가 킥킥 웃으며 짐짓 장난스럽게 농담을 건넸다.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은 내가 객차에서 먼저 내려가 한세아가 내려오기 쉽게 받쳐주려고 한 바로 그때.
"···어?!"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확 들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당혹성을 내뱉었다.
드드드드드드드-!
드그그극! 쾅! 콰콰쾅! 쿠구구궁-
와장창!
동시에 지하 터널을 웅웅 울리는 소리와 무언가 터널을 외부에서 부수고 들어와 공간 전체를 뒤흔들었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그리고 거대한 진동에 의해 천장에 맺혀 있던 물방울들이 아래로 떨어지며 수많은 파문(波紋)을 만들어내었다.
"꺅!"
"으악!"
풍덩-!!
갑작스러운 지진은 불안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우리를 물에 빠지게 만들었다. 기껏 회복한 체온이 차가운 수온에 순식간에 뺏겨 버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가 만들어낸 커다란 파문은 작은 파문들을 잡아먹으며 그 크기를 키웠다.
물에 빠진 손전등은 수면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픽하고 전원이 꺼져 더 이상 빛을 뿜어낼 수 없게 되었다.
쾅! 콰직! 콰장창! 까드드득! 끼기긱-
물에 완전히 잠긴 귓가에 수면 위에서 벌어지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린다.
금속판이 휘어지는 소리, 유리 깨지는 소리, 무언가 비틀리고 무너지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혼란스럽게 뒤섞여 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푸하!"
"케헥! 콜록! 콜록-!"
우리는 급하게 일어나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고, 코와 입으로 인정사정없이 들어간 물을 정신없이 토해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와 한세아가 겨우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오직 어둠뿐이었다.
희미한 빛조차 없는 완벽한 어둠.
그리고 어둠은.
안식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두려움 또한 나타내기도 한다.
한순간에 빛을 잃은 우리에게.
···어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