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57화 (58/497)

Chapter 57 - 57. 지하 터널 (7)

"뭐라고요?"

나는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한세아에게 되물었다. 그녀는 진작 이랬어야 한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옷. 벗으라구요."

"···진심?"

"네. 진심."

"아니, 하지만. 그래도, 그. 좀 그렇지···않···나?"

한껏 당황한 내가 더듬거리며 말하자, 한세아는 내 말을 중간에 끊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생각을 잘못했어요. 이미 온몸이 다 젖었는데 가슴 장화 하나 벗는다고 해결이 될 사이즈가 아니었다구요. 몸을 말리려면 옷도 벗어서 그 물기를 제대로 짜내야 해요."

"맞긴 합니다만···."

나 또한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남자였기 때문에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한세아는 생존 앞에 남녀가 어딨냐는 듯 코웃음 치며 행동으로 자기 의지를 보여 주었다.

"어어? 잠깐! 스톱!"

아직 마음의 준비도 못했건만, 나는 갑작스럽게 옷을 벗기 시작하는 그녀를 보며 당혹성을 내뱉었다.

"스톱은 무슨. 뭐 해요? 안 벗고? 현우씨도 빨리 벗어서 물기 꽉 짜요. 그리고 저 벗는 거 언제까지 볼 거예요? 아무리 저라도 그 시선은 좀 부담스러운데요?"

"으아! 아니, 그. 미안합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허둥지둥하며 옷깃을 잡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옷을 하나씩 벗어 걸레 짜듯 비틀어 물기를 빼냈다.

상의와 하의를 벗었으니 더한 추위가 몰려왔어야 하지만 속에서 피어나는 열기에 놀라울 정도로 주변의 한기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쭈르륵- 꽈악-

나는 뒤에서 들리는 한세아의 물 짜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엄한 생각이 들지 않도록 잡생각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생각해. 뭐든 떠올려봐. 아무 생각도 나지 않게, 아무거나.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벌써 저녁은 아니겠지. 배고픈데. 뭐라도 좀 먹고 싶다.'

'···속옷도 벗어야 하나?'

그러다가 불쑥 하고 고개를 든 생각에 나는 속으로 자책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 미친놈.'

속옷을 벗기는 왜 벗는단 말인가.

지금 이 정도면 해도 몸은 빠르게 마를 것이다.

그러니 속옷까지 벗을 이유는 없다.

···없을 것이다.

주르륵!

똑- 똑-

한세아는 아직 옷을 짜내는 듯하니, 일을 먼저 끝마친 나는 고개를 우리가 빠져나온 방향으로 고정시켰다.

졸졸졸-

하지만 미약한 물줄기 소리만 들릴 뿐, 지금 켜진 가스 불의 빛만으로는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주위에 퍼지는 빛보다 앞으로 쏘아지는 빛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세아씨. 그, 물 다 짜셨으면 혹시 예비 손전등 좀 주실수 있습니까? 주변을 좀 비춰 보고 싶어서요."

"넵. 잠시만요!"

부스럭- 부스럭-

나는 얼추 지금쯤이면 한세아도 옷에서 물을 짰을 것이다 하는 생각에 손만 뒤로 향한 채 그녀를 불렀다.

찰박- 찰박-

잠시 뒤, 손전등을 찾았는지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내 등 뒤에서 들려왔고.

"후우···!"

"······?!"

내 귀에 후 하고 바람을 부는 한세아의 행동에 온몸에 소름이 돋은 나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화들짝 놀랐다.

내가 입을 쩍 벌린 채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그녀는 등을 돌린 채 어느새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세아는 뒤로 손을 흔들며 킥킥 웃으면서 말했다.

"현우씨가 너무 긴장한 것 같아서 장난 좀 쳐봤어요. 긴장 풀어요. 누가 잡아먹는데요? 아흐~, 춥다~. 현우씨도 거기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불 좀 쬐요."

그녀의 너스레 덕분일까.

아직도 심장이 강하게 박동하고 있었지만, 몸을 뻣뻣하게 만드는 긴장은 그 자취를 감췄다.

나와 같은 속옷 차림으로 있는 한세아의 모습에 다시금 얼굴이 붉어져야 마땅했으나 나는 그녀가 건넨 손전등을 강하게 쥐며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작게 일렁이는 불빛이 나와 그녀의 뒤편으로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어냈고, 주변의 어둠을 살며시 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얼핏 보인 한세아의 어깨에는 커다란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봤나 싶었지만,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여전히 그 흉은 그녀의 어깨에 남아 있었다. 보는 사람이 눈살을 찌푸릴 만한 울퉁불퉁하고 흉측한 상흔이.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한세아가 친절하게 나를 돌봐줄 때도 한편으로는 끝까지 나에 대한 경계심을 놓지 않았다는 것에서 내심 속으로 예상하였다.

그녀가 이 세상을 마냥 순탄하게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걸.

'현우씨. 안전한 곳이라는 건 없어요. 매일 같이 안전한 곳을 찾아 헤매도 단지 그건 그 장소가 안전하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일 뿐이죠.'

'그때 당시에는 뭐랄까. 너무 지쳐 있었거든요.'

무언가를 회상하며 음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한세아.

나는 여전히 그녀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세상이 망해 버린 것에 강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동안 겪은 고통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알지 못 하는 주제에 나는 이미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있다고 자위하면서, 그저 그렇게 생각하면서, 외면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이 현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 고통의 흔적을 직접 마주 보니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잘난 듯이 속으로 떠들어댔지만, 알맹이가 빈 메아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다시 눈을 떠 한세아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창백한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돌아 보기 좋아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내 생각이 그저 착각이길, 내가 지레짐작한 것에 불과하기를 바라면서.

"···세아씨."

작은 온기에도 취한 듯 노곤노곤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한세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니지만···. 어깨에 커다란 흉이 있으시더라고요. 언제 다친 건지···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앗! 변태! 여자의 뒷모습을 함부로 훔쳐보다니!"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두 팔로 몸을 가렸다. 그리고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어두워서 안 보일 줄 알았는데 들켜 버렸네요. 보기 흉해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아! 그, 죄송합니다! 말하기 힘드시면 안 하셔도 돼요."

한세아의 반응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나는 이런 상황에서 함부로 물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급히 사과했지만, 그녀는 괜찮다는 손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아뇨. 그 정도는 아니고. 뭐,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요. 말 못 할 것도 없죠. 음. 어디서부터 말해줘야 할까···. 그러고 있지말고 일단 제 옆에 앉아봐요."

터널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기회가 아니면 한세아에 대한 이야기를 언제 자연스럽게 들을지 몰랐기 때문에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불을 쬐며 그녀가 입을 여는 것을 기다렸다.

한세아는 턱을 괴며 고민하는 소리를 내다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현우씨. 듣고 웃지 마세요? 제가 닭, 아니 이렇게 말하면 없어 보이네. 제가 새라는 건 알잖아요?"

"···네."

"제 어깨에 날개가 달려 있었거든요. 제 팔보다 큰 날개가요."

"···네? 날개?"

"새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게 이상해요? 물론 지금은 없지만!"

확실히 새 하면 날개가 붙어 있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잠시 당황한 얼굴을 했으나 뒤이은 한세아의 말에 얼굴을 바싹 굳혔다.

사람한테 날개가 있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지금 한세아의 어깨에는 날개가 남아 있지 않고,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인데. 그래서 그녀의 말은 과거형이었다.

내 얼굴을 보지 못한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꺼냈다.

"제 맘대로 움직여지지도 않고, 멋대로 펄럭이는 날개가 있었어요. ···네, 있었죠. 뛰는데 얼마나 방해가 되던지. 그렇다고 하늘을 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러다가···."

한세아는 타오르는 불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러다가 뜯어졌어요. 거리의 나무 인간들한테서 도망치다가 겨우 숨은 장소에서요. 거기도 숨어 있는 나무 인간이 있더라구요. 다가오는 걸 눈치채지도 못하고 그저 한순간에 콱! 두 쪽 다 잃어 버리고 말았어요."

그녀는 손으로 무언가를 잡고 흔드는 시늉했다.

"···아프셨겠네요."

"당연히 아팠죠! 그래도 그 덕에 살아있는 거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때는 엄청 아팠지만 교훈 하나 배운 셈 쳤어요. 걸리적거리는 날개도 없어졌으니 앞으로 더 조심해야지 하면서."

나는 주먹을 어찌나 꽉 쥐었던지 피가 통하지 않는 손을 억지로 펴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차갑게 식은 손이 느껴졌다.

지금에서야 살아 있으니 한세아가 술자리 안주 꺼내듯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지, 크게 다친 그 순간에 그녀가 느꼈을 고통과 절망을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바람이 약하게 부는 것을 보니, 터널이 완전히 막힌 것도 아니건만.

나는 폐쇄된 공간에 갇힌 기분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숨이 조금씩 막히는 느낌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현우씨?"

한세아가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까 말한. 터널 상태 좀. 보고 오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금방 다녀올 테니."

"앗! 네. 조심하세요. 현우씨."

내게 조심하라며 신신당부하는 한세아를 뒤로하고, 나는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 미약한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손전등 하나만 겨우 챙긴 나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들었다.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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