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58화 (59/497)

Chapter 58 - 58. 지하 터널 (8)

"후우! 후우!"

나는 힘겹게 숨을 들이쉬며 무너진 터널 끝을 향해 걸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채울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스쳐지나갈 때마다.

혼란스러운 내 마음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과민반응하지 마.

이미 지나간 일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어.

내가 앞으로 잘하면 돼.

그러니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숨을 돌렸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멍하니 불을 바라보는 한세아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나는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상기하며 손전등 버튼을 눌러 빛으로 전방을 밝혔다.

딸깍-

예비 손전등은 처음에 내가 들고 있던 손전등보다 크기는 작았지만 내뿜는 빛은 변함없이 밝았다.

나는 이윽고 보이는 무너진 터널의 모습에 나와 한세아가 산 것은 정말 천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졸졸졸···

···! ···! ···!

매교역 방향을 완전히 봉쇄하고 있는 산산이 조각난 시멘트 덩어리들, 그사이의 빈 공간을 채워 물길을 틀어막은 굵고 고운 흙들.

만약 우리가 덮쳐 오는 파도를 견뎌보겠다고 중간에 나무뿌리를 붙잡은 채 시간을 보냈다면, 나와 한세아는 지금쯤 저 무너진 잔해 너머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위험했지만 바로 물살을 탔기에 터널이 무너지는 위치를 무사히 지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조금씩 들썩이는 갱도의 잔해, 어떻게든 틈을 비집고 흐르는 황토색 물줄기.

나는 그것들을 보며 우리가 왜 이 꼴이 되었는지 떠올렸다.

나무뿌리의 움직임에 의해 생긴 지진과 충격, 갱도를 둘러싼 토사의 무게.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터널을 무너트렸을 것이다. 그리고 무너진 터널 너머에는 엄청난 양의 물이 자리 잡고 있겠지.

지금도 물줄기가 터널의 잔해를 뚫고 나오고 있는 걸 보니 그 양은 가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순간 우리를 덮친 파도가 떠오른 나는 몸서리가 처지는 것을 느끼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세아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여유롭게 옷을 말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이 사실을 안 지금이라도 움직여 서둘러 출구로 향해야만 했다. 물을 틀어막고 있는 둑이 터지기 전에 빨리.

찰박-! 찰박-!

절로 다급해지는 내 발걸음이 바닥에 고인 물을 사방으로 튀기며 작은 물방울을 만들어냈다.

한세아가 내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어땠어요? ···무슨 일 있어요?"

그녀는 나른한 목소리로 묻다가 내 심각한 표정을 보고 덩달아 얼굴을 굳혔다.

"세아씨. 가스는 이제 얼마나 남았습니까?"

내 말에 한세아가 가스통을 톡톡 치더니 어느 정도 가늠이 된 듯 내게 말했다.

"이제 한 절반···? 정도 남았어요. 왜요?"

"그거 전부 써도 옷은 다 못 말리겠죠?"

"그렇죠···?"

"세아씨. 짐 챙겨요. 당장 이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 무너진 터널이 언제 다시 뚫릴지 몰라요."

"넵! 여기 현우씨 옷. 최대한 말려본다고 말린 건데 아직도 축축하네요···."

아쉬움에 중얼거리는 한세아를 달래고, 그녀가 건넨 옷을 받아 하나씩 다시 입는데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건 한세아 또한 마찬가지라 옷을 갈아입던 도중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상황에 맞지 않게 픽 웃었다.

그것도 잠시,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애초에 챙길 짐이라고는 한세아가 필사적으로 지킨 가방과 내가 들고 있는 도끼와 거미 변종의 유해뿐이었지만.

나무뿌리의 변덕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고, 대량의 물을 막고 있는 둑이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른다.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만 했다.

이제 다시 출구를 향해 움직일 시간이다.

지직- 지이익-

한세아가 가방 지퍼를 닫은 것을 확인한 후 나는 도끼를 고쳐 쥐며 손전등을 전방으로 비추었다.

찰박- 찰박-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차오르는 물에 조급함을 느끼며 나와 한세아는 앞으로 걸었다.

찰-박 찰-박 찰-박···

아무 말 없이 터널 한가운데를 지탱하는 기둥들을 몇 개나 지났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 옆에 바싹 붙은 한세아가 작게 속삭이며 말을 걸었다.

"여기가 어디쯤일까요? 확실히 절반은 넘었겠죠? 물살을 그렇게 탔는데?"

"이제 거의 다 오지 않았겠습니까? 조금만 참아요."

"불평은 아니구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근데 현우씨."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발을 몇 번 내려 밟다가 말을 이었다.

"뭔가 물이 좀 이상해지지 않았어요? 묘하게 끈적한데. 아닌가요? 착각인가? 아닌데? 착착 달라붙는데···. 물 비린내도 좀 심해진 것 같구···. 에휴, 코가 막혀서 잘 모르겠네요."

한세아의 말에 나는 손전등을 아래로 돌려 바닥을 비춰 보았다.

터널의 내부에는 여전히 넝쿨이 보였다. 다만 처음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건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검은 이끼들이다.

나는 그녀처럼 발을 바닥에 완전히 붙였다가 천천히 떼었다.

과연, 한세아의 말대로 묘하게 점성이 생긴 물이 발을 붙잡는 것 같다는 말은 진짜였다.

찰-박 찰-박

발을 바닥에서 땔 때마다 검은 이끼들이 물에 섞여 신발 밑창에 달라붙었다.

손톱만 한 길이를 가진 이끼들이 넝쿨 줄기에 뒤엉켜 있다가 발에 밟히면 머금고 있던 물을 토해냈다. 약간의 점성을 가진 물을.

뿌즉-

불쾌감을 일으키는 소리에 자세히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나는 신발 밑창에 붙은 검은 이끼를 바닥에 비벼서 긁어냈다.

"뭐, 넝쿨 체액이라도 빨아먹고 뱉나보죠. 어서 갑시다. 이제 진짜 거의 다 온 것 같아요."

"맞아요! 어서 나가야죠. 빨리 옷도 갈아입고 싶고···."

"그래도 경계 허술하게 하면 안 되는 거 알죠, 세아씨?"

"저를 뭘로 보구! 걱정 마세요. 제 버드 센서만 믿어요. 그···완벽하진 않지만. 헤헷."

나와 한세아는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록 검은 이끼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기는 했지만, 나는 서서히 바뀌는 지하 터널의 풍경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검은 이끼들.

이것들도 넝쿨처럼 지상과 지하 가리지 않고 장소 구석구석 침투해 있는데, 대체 뭐 하는 것들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넝쿨이 편의점에서 보았던 식물 변종에게 수분을 공급하거나 실내를 비집고 들어가 영역을 늘린다고 한다면.

검은 이끼들은 건물뿐만 아니라 나무 인간이나 학교에서 보았던 거미 변종에게까지 붙어 있었는데, 그것들이 하는 일이 뭐길래 붙어 있다는 말인가.

'아닌가? 거미 변종한테는 없었나?'

워낙 위기가 빠르게 몰아쳤기 때문에 거미 변종의 대략적인 생김새만 기억할 뿐 세세한 모습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복잡한 의문을 품은 채로 계속해서 앞으로 걸었다.

바로 그때.

한세아가 내 옷깃을 급하게 잡아당겼다.

"···현우씨! 앞에 뭐가 있어요!"

"······?"

나는 뻑뻑한 눈을 비비고 고개를 들어 앞을 살펴보았다.

손전등이 비출 수 있는 거리의 한계, 그 너머에 무언가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눈을 찌푸리면서까지 집중해서 보았지만, 거리가 좀 더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내 손을 꽉 붙잡은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뭐가 있긴 있네요. 세아씨. 혹시 모르니까 조용히 갑시다. 오케이?"

"오케이. 느낌이 좀 이상하니까 서로 조심해요, 우리."

찰-팍 찰-팍

나와 한세아의 발걸음 소리가 바뀌어가고, 우리가 앞을 향해 걸을 때마다 정체 모를 그것은 가까워졌다.

우선 처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선로 위에 서 있는 또 다른 지하철.

다음으로는 지하철의 겉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하얀색의 덩어리들이 보였다.

그것들은 그저 지하철에 달라붙어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학교에서 본 먹이 주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외형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거리가 좀 더 가까워졌고, 나는 저 덩어리들이 마냥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부에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빛을 비출 때마다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마치 태아처럼 미약하지만 쉴 새 없이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층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휘이이이이-!

후두두둑! 촤르르륵-

바람이 우리 머리 위쪽의 천장에서 뿜어져 나왔고, 무언가 바닥에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한세아는 급하게 걸음을 멈추며 손전등을 위로 들어 올렸다. 우리는 빛이 새롭게 비추는 천장의 모습에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

천장에는 원형의 굴이 뚫려 있었고, 검은 이끼들이 붙어 있는 천장 사이사이에 사람 크기의 돌출물들이 보였다.

하얀색의 덩어리들.

투명한 점액질을 뿜는 수많은 덩어리들이 천장에도 붙어 있었다.

또옥- 또옥-

바람에 흔들리던 끈적한 액체가 한 두방울씩 세로로 길게 늘어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검은 이끼가 범벅된 하얀 덩어리들은 어두운 갱도 속에서 간혹 느껴지는 외부 자극에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그렇게 벽면에 달라붙어 있었다.

천장에서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잔해들이 바닥이 아닌 어떤 하얀 덩어리를 툭 가볍게 건드리자, 덩어리가 좀 더 강한 반응을 보였다.

[······?]

하얀 점액질 덩어리, 혹은 먹이 주머니 정도로 여겼던 것.

검은 이끼로 뒤덮여 있는 흐물흐물한 막이 울룩불룩해졌다.

찌직··· 찔꺽-

막이 조금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썩은 물 비린내가 맡아졌다.

철퍽- 철퍽-

덩어리에 붙어 있던 검은 이끼는 막에 틈이 생기자마자 뭉텅이로 바닥에 떨어졌고, 피막 안에 들어 있던 회색의 무언가가 자신을 건든 잔해를 향해 뻗어졌다.

촤아악!

그리고 순식간에 낚아채서 막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것은 바로 팔이었다.

썩은 물 비린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나와 한세아는 얼어붙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외면하고 싶은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지금 우리 주위에 산재한 하얀 덩어리들이 있는 이곳은.

···바로 나무 인간 변종의 군락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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