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9 - 59. 지하 터널 (9)
"······."
"······."
나와 한세아는 한동안 움직일 생각도 못 한 채 바싹 굳었다.
나는 애꿎은 도끼만 손으로 강하게 쥐었고, 한세아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힘을 줘 간신히 서 있었다.
까득- 까드득-
퉤엣! 휙!
나무 인간 변종이 무언가를 한참 씹다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뱉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점액이 떨어지는 회색의 팔을 불투명한 막 밖으로 내밀어 무언가를 벽면으로 내던졌다.
-철퍽!
주르륵···
벽면에 붙은 무언가는 한동안 점액에 의해 붙어있다가 벽을 타고 아래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혀, 현우씨···."
한세아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아주 작게 나를 불렀다.
내가 뭐라도 해 주길 바라는 애원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나라고 해서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채 떨리는 손에 따라 흔들리는 손전등 빛만 간신히 바라보고 있을 뿐.
'······.'
지금 내밀어진 팔이 당장에라도,
우리를 향해 휘둘러질 것 같은 불길한 상상에,
지독한 정적 속에서,
막히는 숨을 억지로 내쉬며,
속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무엇에게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면서 속으로 그저 빌고 또 빌었다.
10초? 1분? 10분?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내 볼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만이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츠르륵-
이윽고, 점액질을 뿜어내는 회색 팔이 다시 불투명한 막 안으로 사라졌다.
찔-퍽···
살짝 찢어지면서 생긴 막의 틈은 그것의 팔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떨어진 점액질이 자기들끼리 붙으며 메워졌다.
나무 인간 변종은 언제 움직였냐는 듯 다시 고치의 형태로 돌아가 벽에 가만히 붙었다.
다행히 나와 한세아가 상상한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그제야 굳은 몸이 풀렸다.
빛이 이것들을 자극한다는 것을 겨우 떠올린 나는 전방을 향하고 있던 손전등을 아래로 내리며 손으로 가렸다.
그러자 사방에서 꿈틀거리는 소리가 조금은 줄어들었다.
대신 우리가 있는 갱도 안의 어둠이 그 기세를 한층 더 부풀렸다.
손전등을 완전히 끈다면, 저것들의 반응도 끝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미약한 빛마저 없다면, 나와 한세아는 어둠에 질식하고 말 것이다.
호기심에 완전히 가까이 가서 불을 비춰보지 않은 것이 정말로 다행이었다.
만약 우리가 추위에 조급함을 느끼면서 아무 생각 없이 군락지 깊은 곳으로 발을 들이밀었더라면···.
나는 고개를 돌려 한세아를 바라보았다.
미약해진 빛에 당황했던 눈이 어둠에 서서히 익어가면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는 한세아에게 나는 턱짓으로 뒤로 물러나자는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뿌즉- 뿌즈즉-
찰-팍 찰-팍 휘이이-
발에 밟히면 머금은 물을 내뿜는 검은 이끼 소리.
약간의 점성을 가진 물이 우리의 발길을 붙잡는 소리.
천장에 생긴 굴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던 소리들이 하나같이 전부 거슬리기 시작했다.
짜증, 불안, 초조, 공포, 심장의 거센 박동.
그 모든 것들을 힘겹게 억누르며 나와 한세아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찰박- 찰박-
마침내 하얀 덩어리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후우! 후우!"
"하아- 하아-."
잠시 숨을 고른 나에게 한세아의 하얗게 질린 손이 눈에 들어왔다. 긴장감에 꽉 마주 잡고 있던 손을 풀어 주기 위해 살살 주물러 주었다. 피가 조금씩 통하면서 그녀가 안정을 찾는 것이 느껴졌다.
한세아가 뻑뻑해진 눈을 손으로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현우씨, 봤죠? 그 이상한 것들이요. 또 다른 변종이겠죠? 거의 다 왔는데 하필이면···."
"세아씨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지하에 적응한 나무 인간이겠죠."
나는 조금 전까지 보고 있었던 하얀 덩어리의 외형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마치 양막 주머니에 들어 있는 듯한 생김새를 취하고 있던 나무 인간 변종들.
그러나 태아와 달리, 불투명한 막 주머니는 그저 둥지에 불과할 뿐인지 이동 자체는 자유로워 보였다.
먹잇감이 감지되면 그 막을 찢고 순식간에 낚아채서 잡아먹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끊임없이 내보내는 점액질.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물이 약간의 점성을 가지게 된 것도 그 군락지가 원인일 것이다.
난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후우···."
지수와 예린은 이 통로를 어떻게 통과했을까.
내가 거미 변종과 맞서 싸웠던 날에 바로 수원역으로 향했다면.
그때는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터널에 물이 차지 않았나?
그때는 터널 끝에 저것들이 없었나?
나는 막연히 그녀들이 살아서 수원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끊임없이 위기가 발생하는 지하 터널을 겪고 있으려니 끔찍한 상상이 자꾸만 뇌리를 잠식했다.
'혹시나 지수와 예린이 이 터널 어딘가에서 쓰러져 있으면 어떡하지···.'
나는 고개를 빠르게 흔들어 잡념을 털어냈다. 그리고 그녀들을 믿었다.
그녀들이 이 터널을 통과했을 것이라는 건 결국 추측에 불과하지 않은가.
나와 한세아가 모르는 길로 수원역을 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무엇보다 지수와 예린은 나보다 똑 부러지는 아이들이니 지금 당장은 그녀들보다는 나와 한세아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앞은 나무 인간 변종의 군락지로 막혀 있고, 뒤는 아예 터널이 무너져 있는 상황.
심지어 후방의 둑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는지 바닥에 고인 물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었기에 이왕 움직일 거 지금 바로 이동해야 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지만,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전진뿐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나는 내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려 준 한세아를 보며 말했다.
"세아씨."
"···네."
"어차피 앞으로 가야 합니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을 거니까 조심해서 가면 괜찮을 거예요."
그녀는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내 대답을 예상했다는 얼굴을 했다.
"저도 알고는 있어요. 결국 앞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걸요. 뒤도 막혔으니까···."
"그럼 어서 갑시다. 생각보다 물이 빨리 차네요. 저한테 꼭 붙으시고."
나는 한세아의 손을 붙잡고 방향을 돌려 다시 군락지가 있는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참방- 참방-
"아 참, 세아씨.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세아씨가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망설이지말고 총 쏘세요. 총 잃어 버리진 않았죠?"
"넵.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내 걱정이 기껍다는 듯 배시시 웃어 보였다. 나는 잠시 멍하니 그 웃음을 바라보다가 다시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참방- 참방-
어느새 다시 보이기 시작한 변종의 군락지.
나는 손전등을 옷으로 가려 빛을 최대한 줄였다. 지근거리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한 빛을 뿜게 만들기 위해서.
휘이이이··· [······츄릅]
나무 인간 변종이 들어 있는 하얀 덩어리들은 여전히 지하철과 터널 천장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천장에 있는 굴에서도 여전히 바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비록 손전등의 빛을 절반 이상 가리고 있어 갱도의 모습이 전부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나무 인간 변종의 수가 상상 이상으로 많을 것이라고는 예상할 수 있었다.
주변에 널려 있는 하얀 덩어리들은 그 크기가 다 제각각 이었다. 좌우 길이는 서로 엇비슷했지만, 위아래 길이만큼은 눈에 띄게 차이가 났다.
참-방 참-방
촤르르르···
발목까지 차오른 물살이 우리를 어서 앞으로 가라고 떠밀었다.
이제 한 걸음만 더 걸으면 제일 선두에 있는 하얀 덩어리를 지나치게 되는 상황에, 나와 한세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눈빛을 주고받은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군락지로 발을 들이밀었다.
꿈틀!
작디작은 빛에도 자극 받아 움찔거리는 피막 안의 나무 인간 변종을 지나쳤다.
또옥- 또옥-
우리 주변으로 천장에 맺혀 있던 점성 가득한 물방울이 끈적지게 바닥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
나와 한세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한세아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 것을 보면 두려움이 그녀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듯했다.
첨벙- 첨벙-
뒤에서 밀려오는 물이 점점 많아지더니 어느새 종아리까지 잠기게 되었다.
나갈 수 있는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물살에 우리는 초조함을 가득 느꼈다.
······툭! ······툭!
검은 이끼 덩어리가 자꾸 발에 채인다.
사람의 머리카락을 연상하게 하는 모습에 우리는 물 위를 떠다니기 시작하는 부유물들을 가능한 보지 않으려 애썼다.
툭- 툭- 툭-
검은 이끼들이 하얀 덩어리들을 종종 건드렸지만, 특이하게도 나무 인간 변종들은 내가 들고 있는 손전등 빛에만 간혹 반응할 뿐 검은 이끼들이 건드릴 때는 아무런 반응도 보여 주지 않았다.
위에서 떨어지는 잔해들에게는 쏜살 같은 반응을 보여주었어도 자신들의 점액이 가득 묻어 있는 검은 이끼가 주는 자극 정도는 무시하는 듯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하지만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첨벙 ···첨벙 ···첨벙!
이대로만 가면 위험한 일 없이 나무 인간 변종의 군락지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첨벙 ···첨벙 ···첨벙!
군락지를 삼분의 일 정도 지나쳤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한세아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나를 보며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의아한 얼굴을 해 보였지만, 한세아는 손가락을 일자로 들어 입에 가져다 대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첨벙 ···첨벙 ···첨벙!
이번에는 내가 한세아의 손을 살짝 강하게 잡으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세아씨, 힘든 건 알겠는데 조금만 살살 걸어요."
"······?"
그녀는 내 말에 복잡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러고는 손전등을 들고 있는 내 손을 순식간에 강제로 움직여 후방을 비췄다.
나와 합의되지 않은 한세아의 돌발 행동에 나는 아연실색하며 그녀를 바라보았고, 뒤에 무언가 있나 싶어 그녀와 똑같이 후방도 보았지만 갑자기 강해진 빛에 거세게 꿈틀거리는 하얀 덩어리들만 보일 뿐이었다.
타악-
나는 그 모습에 급하게 손전등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하얀 덩어리들은 다시 잠잠해졌다.
"왜 그래요?!"
"현우씨. 저 믿어요···?"
타박하는 내 말에 돌아오는 것은 매우 진지한 그녀의 어조였다. 내가 당황하며 한세아를 보자, 그녀는 나와 함께 말없이 앞으로 딱 한 걸음만 걸었다.
···첨벙 ···첨벙 ···첨벙!
그리고 뒤이은 물소리에 나는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각자 한 걸음씩만 내딛고 멈췄는데 왜 반 박자 늦은 물소리가 들린단 말인가?
단순 메아리로 치부하기에는 느낌이 매우 달랐다.
꿀꺽-
···무언가 우리를 확실히 뒤쫓아오고 있었다.
"···세아씨."
"···네."
"뛰어요!"
물소리가 크게 나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전력 질주하는 우리들의 바로 뒤에서 또 다른 물소리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