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64화 (65/497)

Chapter 64 - 64. 수원역 (4)

휘이이이잉-

우리가 충분히 수면을 취하고 일어났을 때도 바람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오히려 잠들기 전보다 빗줄기가 더욱 굵어져 지면을 누군가 주먹으로 두들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현우씨, 안 추워요?"

한세아가 커튼만 몸에 두른 채로 내 옆에 바싹 붙으며 다가왔다. 나는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확실히 계속 내리는 비와 강하게 부는 바람탓에 공기가 한층 더 싸늘해졌지만, 그렇다고 가스 불을 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세아씨, 아까 제가 한 말 기억나죠?"

"그럼요. 조각에 문제가 생긴 것 같으니까 총이나 화기 쓰는 건 자제하자고 하셨잖아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내가 푸른 조각이 이상해진 것 같다고 하니 한세아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푸른 조각을 몇 번이고 내 몸에 가져다 대었던 그녀의 행동에 피식 웃음이 나왔었다.

그러면서 뭐라고 했더라?

'으앙! 조각이 망가졌어요···! 하긴, 오래 쓰긴 했지요.'

대수롭지 않게 장난치면서 넘어가기는 했지만, 나는 그녀의 눈에 진한 아쉬움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기야 처음 한세아가 내게 자기의 쓸모를 어필한 것 중 하나가 푸른 조각이었으니, 그것의 상태가 좋지 않아졌다는 사실에 미련을 가득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식량을 따뜻하게 데워 먹지 못하고, 아직 축축한 옷을 말리지도 못하는 지금 상황에서는 더욱.

당장 나조차도 아쉬움이 가득한데, 한세아도 나 못지 않게 아쉽겠지.

문제가 조각에 생긴 건지 내게 생긴 건지 알기 전까지는 위기 상황을 제외하고는 사용을 자제하자는 내 의견에 그녀는 한숨을 폭 내쉬며 동의를 표했다.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때, 한세아가 내게 말을 걸어오며 나를 회상에서 벗어나게 했다.

"엄청 추운 것도 아니고, 이렇게 딱 붙어 있으면 괜찮아요!"

나와 한세아는 서로를 의지하며 죽음의 위기를 함께 돌파했기 때문인지 서로의 등을 완전히 맡길 수 있을 정도의 신뢰감이 형성되었다.

"참, 세아씨."

"네?"

"그건 어딨어요? 거미 변종의 유해요."

"거미 변종의 유-에부붑. 이름이 너무 길어요! 그냥 막대기라고 부르기로 해요. 이제부터."

한세아는 말을 하다가 혀를 씹은 듯 울상을 지으며 혀를 빼꼼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빠득- 빠드득-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밑에 있던 거미 변종의 유해, 아니 막대기를 꺼내서 내게 건넸다. 나는 막대기를 감싼 천을 풀어 헤치며 한세아에게 말했다.

끝이 뾰족한 검은 나뭇가지.

"이거 대체 어디에 쓰는 걸까요. 그동안 신기해서 들고 다니기는 했지만, 용도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네요."

"그래도 어딘가 쓸모가 있지 않겠어요, 현우씨? 그 무시무시한 거미 변종한테 나온 건데···. 가령 몽둥이처럼 쓴다던가? 단단하기는 엄청 단단한 것 같은데."

"그렇겠죠? 하아. 진짜 계륵이네요."

"······!"

움찔!

"버리자니 아깝고, 계속 들고 다니자니 짐덩이고. 정말 계륵이예요. 계륵."

"······!!"

움찔! 움찔!

내가 검은 막대기를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관찰하고 있을 때, 한세아가 자꾸만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소담한 가슴을 내세우면서 내 팔을 세게 안아왔다.

"혀, 현우씨···."

그녀가 내 팔을 살짝 잡아당기며 소심하게 나를 불렀다. 나는 의아한 얼굴을 하며 한세아를 바라보았다.

"세아씨, 왜요?"

"저는 쓸모없지 않아요······. 그쵸?"

"그거야 당연합니다. 세아씨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데요. 근데 왜 그러세요, 갑자기? ···아."

나는 내가 말을 잘못한 것이 있나 기억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갔다가 이내 깨달았다.

계륵(鷄肋).

닭의 갈비뼈, 쓸모는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운 사물을 비유하는 말.

"···계륵."

움찔!

"계륵, 계륵."

움찔움찔!

"하핫!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계륵이란 말 때문에 그래요? 그건 그냥 비유잖아요, 비유."

나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한세아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발끈하면서 내 어깨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이, 이건 본능적인 문제거든요? 앞으로 그 말 금지예요! 금지!"

퍽! 퍽!

"아! 아픕니다! 알았어요! 금지! 이제 안 씁니다, 진짜로!"

내 항복에도 멈추지 않는 그녀를 멈추기 위해 나는 황급히 다른 주제를 입에 올렸다.

"세아씨! 수원역에 대해 아는 것 있었죠? 어제 얘기해주기로 했잖아요."

"아."

그제야 멈춘 한세아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헛기침했다.

"흠흠! 맞아요. 원래 터널을 걸으면서 해 줄 이야기였는데, 지금에서야 말하게 됐네요. 일단 저는 원래 여기 수원역에 있었어요. 집이 이 근처이기도 했구요."

"이 근처요?"

"사태 초기에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물자가 많은 이곳으로 몰려왔거든요. 저도 그중 하나였구요."

"근데 왜 매교역으로 가서 자리 잡은 겁니까?"

내 말에 한세아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뭐, 간단해요. 생각보다 많은 생존자들이 몰렸고, 그러므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나타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죠. 대부분 이기적이고 욕심만 가득한 사람들이었지만."

"허어."

"세상이 망했는데도 나이 가지고 유세 떠는 사람들도 있었고, 돈을 줄 테니 먹을 것을 내놓으라는 사람들도 있었죠. 근데 그거 알아요? 그것도 군인들이 잠시 머물러서 그 정도였다는 거?"

그녀는 킥킥 웃으며 말을 이었다.

"군인들이 바로 떠난 후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와 돈을 앞세우는 사람들은 적어졌고, 힘을 앞세운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었어요. 이성이 사라지고 본능만 남은 사람들이 질척질척한 눈으로 여자나 식량을 바라볼 때, 저는 깨달았죠. 아, 내가 여기 있어 봤자 좋은 꼴은 절대 보지 못하겠구나! 그래서 바로 도망쳤어요."

"그 뒤로 매교역으로 가서 자리 잡으신 거군요? 그럼 이 은신처는 언제 만드셨습니까? 왜 하필 여기고요?"

"여기는 제가 수원역을 떠나기 직전에 만들었어요. 혹시나 제 마음이 변할까 봐 두려워서 약간의 식량과 식수를 숨겨 놓았죠. 일종의 도피처였달까요."

"······."

"그리고 여기 들어오기 전에 핏자국이 엄청난 거 보셨죠? 그거 제가 한 거예요."

"예?!"

나는 화들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세아는 오해하지 말라며 손사래 쳤다.

"아니, 제가 뭐 사람을 죽였다 그런 게 아니구! 여기 카페 안에 있던 수혈팩을 터트려서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은 거예요."

"······."

"처음에야 피 냄새 때문에 나무 인간들이 몰려오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피가 마르면서 냄새가 빠질 것이고? 그럼 흥미를 잃은 나무 인간들이 알아서 물러나겠지?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아. 그래서 여기가 난장판이 된 거 였습니까?"

나는 들어오기 전 보인 헌혈 카페의 내부 모습을 떠올렸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찢겨진 모습은 확실히 인간이 했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는데, 사실은 피 냄새만 나고 먹잇감을 발견하지 못한 나무 인간이 난동을 부린 결과였던 것이다.

"넵! 기껏 숨긴 식량을 털리지 않게 방파제 역할을 맡아준 거죠. 전 제가 힘들게 모은 식량을 수원역 사람들한테 뺏기는 게 죽어도 싫었거든요. 차라리 나무 인간들한테 버렸으면 버렸지."

"와···."

나는 한세아의 행동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가슴을 내밀며 우쭐거렸다. 소담한 가슴이 한차례 흔들리며 굴곡이 도드라졌다.

"그리고 그렇게 숨긴 식량이 지금 큰 도움이 되었답니다!"

칭찬을 바라는 모양새에 나는 소리 없는 물개박수를 그녀에게 보내주었다. 한세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제가 지금까지 한 얘기는 다 과거에 불과해요. 수원역이 무너진 지금 그 사람들이 아직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아마 다 제 살길 찾아서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을까요?"

"흠. 그래도 경계는 해야겠네요. 세아씨 말대로라면 질이 안 좋은 사람들이니까."

한세아가 내 팔을 덥썩 끌어안으며 뭐가 걱정이냐는 듯 말했다.

"만나도 저랑 현우씨가 같이 물리치면 되잖아요! 그리고 이제야 말하는 건데 터널에서 현우씨 대단했다구요? 대체 변종들을 몇 마리나 죽인 거예요?"

"아. 저도 이제서야 말하는 건데 어제는 정말 천운이었습니다."

나는 한세아가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녀의 말을 정정해주기로 했다.

"세아씨. 터널에 있던 나무 인간 변종들은 수는 엄청 많았지만, 몸이 엄청 약했어요. 지상에 있는 나무 인간하고 비교하면 거의 두부 수준 정도?"

"엥? 하지만 스크린 도어도 부술 뻔했잖아요? 그럼 도롱뇽 변종은 어땠는데요? 현우씨가 막 날아갔잖아요."

"날아가다니···. 스크린 도어는 애초에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었어요. 금이 간 것도 원래 있던 금이 더 벌어진 거 였습니다. 아무튼 제 생각은···."

"생각은···? 뭐예요! 말해 줘요!"

"잠시만요. 잠깐 정리 좀."

내가 턱을 괸 채 생각만 하자, 한세아가 나를 재촉했다. 나는 그녀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후 생각을 마저 정리했다.

겉에 나무 껍질을 가지고 있는 지상의 나무 인간.

점액질을 뿜어내는 피부를 가지고 있는 지하의 나무 인간.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주먹을 쥘 때면, 그것들을 죽일 때 느껴진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평범한 나무 인간들은 도끼로 찍을 때 진짜 나무를 패는 느낌이 들지만, 터널에서 조우한 나무 인간 변종들은 점액질 탓인지 흐물흐물한 젤리를 가르는 느낌이 들었었다.

도롱뇽 변종이 지하의 나무 인간 변종처럼 점액질을 뿜어내는 것은 동일했건만.

놈이 내가 들고 있는 도끼를 강타할 때 전해진 강도는 마냥 흐물흐물하지 않고 나무 인간의 껍질과 비견될 정도로 단단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신경이 쓰이는 것.

급박한 상황이었던 당시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지금 의문점을 하나둘씩 떠올리니 이상한 게 한 가지가 아니었다.

손전등으로 비춰진 그것들의 모습은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 마치 몸이 변하던 도중에 뛰쳐나온 것처럼.

게다가 그것들은 태아처럼 막 주머니에 담겨 있지 않았던가.

물갈퀴, 꼬리, 점액질,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무너지는 몸.

"허."

나는 순간 뇌리를 잠식한 불길한 상상에 탄식을 내뱉었다.

만약 지하의 나무 인간 변종들이 도롱뇽 변종과 동일한 존재라면.

단지 막을 찢고 나온 그것들에게 시간이 부족했을 뿐이었다면.

내릴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변종화.

지하에 있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나무 인간 변종들이 모두 도롱뇽 변종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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