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67화 (68/497)

Chapter 67 - 67. AK플라자 (1)

민자역사인 수원역에 입점한 AK플라자, 혹은 애경 백화점이라고 불리는 곳.

한때는 수원역의 엄청난 유동 인구를 독점하다시피 해서 매우 높은 매출을 자랑했던 곳이지만, 이제는 다 옛말이 되었다.

지금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균열이 곳곳에 가 있으며, 유동 인구 또한 전부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와 한세아는 수원역 잔해 옆에 바로 열려 있는 백화점 입구 앞에 섰다. 사실, 열려있다는 말보다는 뚫려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8번 게이트라는 간판이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는 입구 주변에는 유리 조각으로 도배가 되듯 깔려 있었다.

"세아씨, 실수로라도 넘어지면 큰일 나겠는데요."

"폭탄이 터졌든 불이 났든 수원역이 무너지면서 생긴 충격에 유리가 다 깨졌나 봐요. 뭐, 지진 탓도 있겠지만."

"일단 여기에 천 조각 하나 끼워둡시다."

"여기요. 유리에 베이지 않게 조심해요. ···그리고 현우씨. 현우씨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여기 엄청 위험한 느낌이 들어요. 그러니까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알았죠?"

"알고 있어요. 걱정 고마워요, 세아씨."

안전을 신신당부하는 한세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받은 천 조각 하나를 유리 조각 사이에 끼워 넣었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부디 내가 놓는 천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져서 지수와 만날 수 있기를.'

짧은 바람을 흘려보낸 나는 한세아를 바라보며 이제 들어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빠득- 빠드득-

유리가 전부 깨져 문틀만 남은 8번 게이트를 넘어가자 우리를 반겨 주는 것은 벽을 길게 타고 무성하게 자란 넝쿨이었다. 빗물을 한껏 머금었는지 살이 통통해 보였다.

"현우씨, 잠시만요."

뜨드득!

그때, 한세아가 손에 들고 있는 유해로 넝쿨을 툭툭 치더니 줄기를 한쪽으로 쭉 밀었고, 이내 가려져 있던 것이 드러났다.

층별 안내도였다.

-6F: 아트홀/갤러리/영화관

-5F: 가전/리빙/키덜트

-4F: 남성패션/스포츠/아웃도어

-3F: 여성패션

-2F: 구두/핸드백

-1F: 수입명품/시계

-B1: 식품관

AK플라자는 지상 6층, 지하 1층으로 총 7층으로 된 건물이었다.

나와 한세아는 안내도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문득 든 생각에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세아씨. 여기 수원역이 대피소 역할 했다고 하셨죠? 그럼 어디서 머무르신 겁니까?"

"아, 대피소는 아니구요. 그냥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모였던 거예요. 여기로 모이라고 하지도, 할 수도 없던 상황이었잖아요. 그리고 6층 위에 하늘 정원이라고 있거든요? 거기에서 텐트치고 모여 지냈었어요. 근데 이 지도에는 안 보이네···. 뭐지? 다른 건물인가?"

한세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근처에서 살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수원역에 자주 오시진 않으셨나 봅니다."

"저 천식 있었다고 했잖아요. 변하기 전만 해도 밖에는 거의 안나갔어요. 아니, 못 나갔어요. 미세먼지가 너무 심해서요. 지금에야 공기도 좋고, 천식도 없어져서 문제는 없지만···."

나는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그녀를 달래기 위해 허겁지겁 말을 이어 화제를 돌렸다.

"저도 수원역에는 자주 안 왔거든요. 그래서 물어본 겁니다. 저는 이 근처에 안 살았-."

"······?"

"이 근처에···."

나는 말하면서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에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머릿속을 꽉 막아 피가 흐르지 않는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왜 이제 와서 이런 느낌이 들지?'

순간 강하게 느껴지는 기억의 공백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천천히 더듬었다.

'일단 내가 처음 정신을 차린 곳은 약국이 즐비한 길 한복판이었지.'

'그때 나는 내 자취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당황했고, 앞에 가톨릭 약국이라는 간판이 보였었어.'

'나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지. 그럼 나는 가톨릭 병원에 있었던 건가? 내가 어느 병원 환자복을 입고 있었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분명 내 자취방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데. ···내가 어디에 살았던 거지? 자취방 위치가 어디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씨!"

'언제부터 기억이 사라진 거지? 아니면 원래부터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나? 내가 지수에게 자취방 위치를 말해 준 적이 있던가?'

「하나가 되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현우씨!"

"헉!"

내 몸을 강하게 흔드는 느낌에 나는 헛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확 들었다. 한세아가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현우씨, 왜 그래요? 어디 몸 안 좋아요?"

"아뇨. 괜찮습니다. 잠깐 딴생각을 좀."

쿵! 쿵! 쿵!

나는 강하게 박동하는 심장을 느끼면서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말! 걱정했잖아요! 말을 하다가 갑자기 심각한 얼굴을 하셔서. 입구에서부터 이러시면 어떡해요.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걱정끼쳐서 미안합니다. 어디까지 얘기했죠? 하하···."

한세아가 삐죽 입술을 내밀면서 나를 타박했다.

"저희 어디부터 갈 거냐고 물었어요."

"아아. 네. 역시 맨 아래서부터 가는 게 낫겠죠? 괜히 번잡스럽게 이동하는 것보다는요."

"······."

나는 그녀의 말에 답하기 위해 빠르게 안내도를 다시 한번 훑었고, 이내 내 생각을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무시했다는 생각에 아직 기분이 상해 있는 한세아를 달래기 위해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달랬다.

"세아씨.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번 상념에 빠지면 쉽게 벗어나지 못해서 그래요."

"···아니에요. 제가 좀 감정적이었어요. 어린애같이. 뭐, 그럴 수도 있죠! 어서 가죠! 시간 없으니까."

다행히 한세아는 기분이 금방 풀렸고, 나 또한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네네. 올라가면서 저희한테 필요한 걸 구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세아씨."

"식량은 몰라도 옷가지는 좀 구할 수 있을 걸요? 나중에 3, 4층에 올라가면 옷 좀 구해 보죠."

우리는 마지막으로 입구에서 벗어나 내부로 진입하기 전에 층별 매장 안내도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안내도 자체는 층 곳곳에 붙어 있겠지만, 그래도 미리 알고 있어야 상황별로 대처하기 쉽지 않겠는가.

거리에는 나무 인간들이 별로 없었지만, 건물 안에는 혹시 또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우리는 일단 백화점의 1층으로 향했다.

안쪽으로 향한 나와 한세아에게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아마도 명품 시계들을 진열해 놓았을 매대였다.

과거에 아름다운 조명과 투명한 유리로 온갖 디자인의 시계를 뽐내듯 진열했을 매대들은 지금은 그 흔적만 겨우 남아 있었다.

통유리창은 박살 나서 매대 내부를 날카로운 유리 조각으로 채우고 있었으며, 진열이 되어 있어야 할 수입 시계들은 전부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현우씨. 나중에 멀쩡한 시계 있나 찾아볼까요?"

"저기에서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시계를 구할 수 있으면 좋긴 하겠습니다만. 근데 그 시계 사용하려면 그 푸른 조각 써야되는 거 아닙니까?"

"제가 예전에 한번 실험해봤었는데, 전자제품은 직접 손대는 게 아니면 푸른 입자가 소모되지는 않더라구요. 비록 작동시킬 때마다 시간을 다시 맞춰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대략적인 시간의 흐름만 알더라도 큰 도움이 되니까요. 그리고 시계를 찾더라도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해요. 아마 여기는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거니까."

"네? 확신하는 어조시네요?"

한세아는 틀만 남은 매대를 손끝으로 쓸며 씁쓸하게 웃었다.

"현우씨, 제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 줄까요?"

"······?"

나는 상황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꺼내는 한세아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주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처음 수원역에 도착했을 때, 뭘 봤는지 알아요?"

"뭘 보셨는데요?"

"짐승들."

나지막하게 말하는 한세아의 말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내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 명품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그때는 시체가 길거리에 널려 있는 상황이었는데도요."

"······."

"발에 무엇이 밟히는 지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옆에 있는 것이 사람인지 괴물인지 신경조차 쓰지 않던 사람들, 아니 짐승들이 있었답니다. 그저 눈이 뒤집힌 채로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챙기려고 아등바등···."

"······."

"밖에는 지금 다 죽냐 사냐 하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명품을 죽어서까지 챙기려는 짐승들이 있었어요."

"······."

"겉에 두른 명품이 그들의 목숨을 구해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나는 한세아의 말을 듣고 시야를 높게 올려 1층을 전체적으로 한번 훑어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온갖 명품과 귀금속들로 채워져 있었을 명품관.

단순 화장품인데도 수십만에 달하는 브랜드, 수백에서 수천을 호가하는 명품 가방, 큼지막한 보석알이 박힌 목걸이와 반지, 빛나는 조명을 반사시키며 제 모습을 뽐내는 하이힐 등등···.

그 모든 것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흉물로 변해 버린 매대들만 있을 뿐.

그때. 한세아가 정신을 퍼뜩 차리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아. 죄송해요. 아까부터 묘하게 감정적이 되어 버리네요. 잠깐 머물렀던 곳이라 그런가. 제가 한 말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이미 다 지나간 일이고, 중요한 건 지금이니까요."

"그렇죠. 중요한 건 지금이죠."

나는 한세아의 말에 동의하는 대답을 하면서 아까 입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갑자기 느껴졌던 기억의 공백에 더이상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나는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이 있지 않던가.

그녀의 말대로, 중요한 건 지금이었다.

잃어버린 내 과거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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