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8 - 68. AK플라자 (2)
"현우씨, 그럼 어쩌실래요? 1층은 그냥 지나칠까요?"
이야기를 마친 한세아가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뇨. 일단 다 훑어 봅시다. 아래로 내려가든 위로 올라가든 저희 등 뒤가 안전한 지 확인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서요."
"좋아요. 그럼 다시 앞으로 가요. 계단은 좀 더 가면 나올 거예요."
빠득-! 빠드득-
촤르르르
나와 한세아가 유리의 바다를 헤칠 때마다 바닥에 있는 유리 조각들이 밀려나며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었다.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날 때마다 우리는 몸을 흠칫하며 몸을 멈춰 세웠고, 이내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직 우리 둘 다 지하 터널에 있던 변종들의 군락지를 지나가면서 생긴 스트레스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건물의 외벽을 이루고 있는 통유리가 전부 깨져 바깥의 햇빛이 전부 건물 안로 쏘아지고 있어서 내부가 환하다는 점일까.
아직 안개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모습이기도 했고.
우리는 말없이 주변을 끊임없이 살피면서 1층 초입부를 지나 중반에 도달했다.
그때.
···딱! ···딱! ···딱!
1층 명품관 한쪽 구석, 넝쿨로 만들어진 차양막 너머에 정체불명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시계 매장에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도 못했건만.
나와 한세아는 귓가에 무슨 소리가 들리자마자 몸을 바싹 엎드렸다.
"현우씨, 들었어요?"
"네. 뭔가 부딪치는 소리요."
"나무 인간이겠죠?"
"뭐가 됐든 사람이 아닌 것 같으니 처리하고 갑시다."
한세아는 고개를 굳게 끄덕이고는 유해 막대기를 고쳐 잡았다. 나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그리고 외쳤다.
"잠깐만요!"
"힉!"
내 다급한 외침에 그녀는 발작하듯 화들짝 놀라는 반응을 보여 주었다.
"왜 그래요?!"
"그, 버드 센서에 잡히는 거 없어요? 감이 좋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말 그대로 감이라서 제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위험하다는 느낌은 아까 말했다시피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계속 받고 있었는걸요."
"···그랬었죠. 놀라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조심해서 한번 가보죠."
"넵."
촤르륵··· 촤르륵···
우리는 천장에서부터 축 늘어진 넝쿨 사이를 지나 소리의 근원지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나와 한세아가 내는 소리를 들은 건지 그것이 내는 소리의 간격이 줄어들었다.
딱!
딱!
딱!
이윽고 보이는 광경에 우리는 침음을 삼키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바둥바둥-
철그럭··· 철그럭···
고가의 명품들에 파묻힌 그것은 간신히 밖으로 내민 팔만 휘적이고 있었다. 이리저리 휘둘러지는 팔에는 마치 갑옷처럼 금속 시계들이 줄지어 채워져 있었다.
자기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 시험하듯 채워진 수입 시계들은 팔이 움직일 때마다 자기들끼리 비벼지며 마모되는 소리를 토해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몰라도 쉬지 않고 움직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기저기 금이 간 시계 유리와 흠집이 셀 수도 없이 난 금속 줄.
그리고 나무 인간의 뻣뻣한 손가락에는 큼지막한 보석알이 박힌 반지들이 끼워져 있었다.
"현우씨. 한번에 걷어내지 말고 조금씩 걷어내야 할 것 같은데요."
"네. 걱정마세요."
나는 도끼로 명품의 산을 조금씩 걷어냈다. 한세아는 내 옆에서 막대기를 앞으로 내민 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했다.
투둑- 툭- 툭-
어지럽게 쌓여 있는 가방, 코트, 구두 따위들을 하나씩 바닥으로 흘려보내자, 안에 들어 있던 나무 인간이 얼굴을 드러냈다.
딱!!
딱!!
딱!!
우리와 눈을 마주친 나무 인간은 더욱 강하게 이빨을 부딪치며 공격성을 드러냈다. 하지만 여전히 소리는 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게, 이 나무 인간의 목에는 하이힐의 높은 굽이 깊숙하게 박혀 있었으니까.
이 나무 인간은 시계로 자기 팔을 보호했을지는 몰라도 자기 목을 보호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한세아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래서 소리를 내지 못했구나. 위에 있는 물건들을 좀 더 걷어내야 알겠지만 아마 사람들끼리 싸우다가 죽은 것 같아요."
그녀의 말대로 나무 인간들이 서로 도구를 들고 싸웠을 리는 없으니 목에 하이힐이 박힌 이것은 각자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벌어진 싸움의 결과일 것이다.
"근데 왜 못 일어나고 있었을까요? 나무 인간에게는 목에 난 상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 말이에요."
그 부분은 나도 계속 의문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점이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지금 한번 확인해봅시다. 세아씨, 혹시 모르니까 준비하고 계십쇼."
"넵."
와르르르···
나는 나무 인간을 가리고 있는 남은 물건들을 전부 걷어내 바닥으로 쏟아 냈다. 한 때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그것들은 이제 한낱 쓰레기가 되어 바닥을 나뒹굴게 되었다.
이윽고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나무 인간.
나무 인간은 넝쿨에 이리저리 뒤엉킨 채 바닥에 딱 붙어 있었다. 아니, 뒤엉킨 것이 아닌 넝쿨 줄기가 놈의 몸에 파고들어 단단히 고정하고 있었다.
마치 혈관처럼 나무 인간의 온몸에 퍼진 넝쿨 줄기.
"우욱···."
나와 한세아는 상상을 뛰어넘는 광경에 욕지기가 이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넝쿨 줄기는 꿈틀거리며 나무 인간에게 무언가를 주입하고 있었다.
뭘 주입하는 거지?
양분? 수분?
"타이밍이 안 맞았나 보네요. 넝쿨 줄기가 시체를 빨아먹는 도중에 시체가 나무 인간이 됐나 봐요. 그래서 지금은 저렇게 억지로 살려 두고 있는 거구."
원인이 뭐가 되었든 상관없었다. 나는 서둘러 도끼를 들어 나무 인간의 숨통을 끊으려고 했다.
내가 도끼를 높게 치켜든 그때.
"현우씨! 잠깐만요!"
한세아가 내 팔을 붙잡으며 나를 말렸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요? 빨리 죽이고 다른 층도 돌아봐야 합니다."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건 저도 알지만···. 이거 무기로 쓸 수 있는지 한 번 알아봐야죠. 네?"
그녀는 여태까지 손에 꼭 쥐고 있던 거미 변종의 유해를 휘두르거나 찌르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못 움직이는 나무 인간이 있을 때 뭐라도 해 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얼마 안 걸릴 거예요. 이런 기회가 흔치 않기도 하구요."
한세아가 조심스럽게 자기 의견을 말했다. 나는 도끼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지금 들고 있는 유해가 무기로서 효용 가치가 있는지 알아보는 게 좋을 듯했다.
몇 번 두드려본 결과 단단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막상 막대기를 휘둘렀더니 톡 하고 부러질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좋습니다. 그럼 세아씨가 해 보시겠습니까? 마침 막대기도 들고 계시고."
"넵! 그럼 바로 시작할게요! 시간 아까우니까. 이얍!"
부우웅-
퍼억! 빠악! 퍽!
막대기의 내구성을 확인하겠다는 듯 인정사정 없이 휘둘러 나무 인간을 후려패는 한세아.
나무 인간은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그저 맞고만 있었다.
'···이래도 되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끼로 나무 인간의 머리를 쪼개려고 했던 나였지만, 한세아가 하는 행동을 보니 얼굴이 절로 떨떠름해졌다.
나는 그저 나무 인간을 한 방에 편하게 만들어 주려고 했을 뿐인데, 묘하게 속이 시원한 표정을 하는 그녀를 말릴 수도 없었다.
체감상 10분 정도가 흐른 뒤.
빠악! 퍼억!
"···세아씨! 그, 이제 그만 때려도 될 것 같습니다···."
"하아, 하아. 네? 아아! 죄, 죄송해요!"
내가 조심스럽게 한세아의 팔을 붙잡아 행동을 제지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그녀는 가뿐 숨을 몰아쉬며 얼굴을 확 붉혔다.
"···세아씨 덕분에 막대기가 정말 단단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생각보다 착 감기는 맛에 그만···."
막대기와 물아일체에서 벗어난 한세아는 고개를 푹 숙이며 웅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만신창이가 된 나무 인간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둘러싸고 있던 나무 껍질은 막대기와 맞부딪힐 때마다 조금씩 부서져 내렸기 때문에 남자가 생전에 가지고 있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넝쿨 줄기가 얼굴에도 파고들어가서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이빨이 다 부서져 이제는 딱딱거리지도 못 하는 것도 내 고개를 돌리는 데 한몫했다.
나는 한세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음으로 시도해 봐야 할 행동을 말했다.
"이제 때리는 건 됐으니까 한번 찔러봅시다. 막대기 끝이 뾰족해서 단창으로 쓸 수 있을지도 몰라요."
"넵. 어디부터 찔러볼까요? 나무 껍질이 아직 붙어 있는 몸통? 아니면 바로 얼굴?"
"···몸통부터 해 보죠. 세아씨 힘드시면 제가 할까요?"
"아뇨!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양손으로 강하게 잡은 막대기를 앞으로 내질렀다. 나무 인간의 몸통을 향해.
푸욱!
"······!"
내심 나무 껍질을 뚫지 못할 거로 생각했던 나와 한세아는 막대기가 나무 인간의 몸통을 저항감없이 관통하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무 껍질을 뚫은 것도 모자라 나무 인간의 속살까지 관통한 막대기탓인지 놈의 얼굴에서 검은 핏줄이 돋아났고,
추욱···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활동을 완전히 정지했다.
"······."
"······."
한순간에 벌어진 일에 우리는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한세아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침묵이 깨뜨렸다.
"뭐지? 버그인가?"
나는 찌르기 한 방에 나무 인간을 죽여 버린 거미 변종의 유해를 몸통에서 천천히 뽑아냈다.
스으윽-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저항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뽑히는 막대기.
거미 변종의 유해에는 나무 인간의 체액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아니면 겉으로는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만큼 체액을 빨아먹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막대기를 잠시 이리저리 돌려 살펴보다가 한세아에게 건넸다.
"세아씨, 조심해서 들고 다녀요. 이렇게 위험한 건 줄은 몰랐네."
"어? 이거 현우씨가 들고 다니는 게 낫지 않아요? 이거면 그냥 다 한 방일 것 같은데."
눈이 휘둥그레진 한세아를 보며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니 더더욱 세아씨가 들고 다녀야죠. 저는 이 도끼로도 충분해요. 그러니까 그걸로 세아씨 몸을 지켜요. 알았죠?"
"네에···."
우리는 대화를 마치고 다시 지하 1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거미 변종의 유해를 더 살펴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1층에서 생각보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기 때문에 당장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빠득- 빠드득-
다시 유리의 바다로 들어온 나는 명품관에서 벗어나기 전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새로 얻은 나무 인간이라는 삶의 끝에서조차 추한 모습으로 죽은 사람.
앞으로 살아갈 생의 무게보다 지금 당장 두르고 있는 명품의 무게를 더 중요시한 사람의 비참한 말로였다.
그래도.
···노잣돈 하나만큼은 두둑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