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69화 (70/497)

Chapter 69 - 69. AK플라자 (3)

"······."

"······."

나와 한세아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서서 숨을 죽이고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1층에서 겨우 한 층만 내려갈 뿐인데도 불구하고, 지상과 지하를 나누는 경계선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가 보는 지하에는 시커먼 어둠이 고여 있었다.

그때.

휘오오오오···!

지하의 습기와 차가운 공기를 품고 있는 바람이 나와 한세아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터널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서늘함에 우리는 몸서리치면서 뒷걸음질 쳤다.

B1: 식품관

한세아는 바람에 흔들리는 안내도를 바라보며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그냥 내려가지 말까요? 여기 플라자 건물 지하는 지하철역하고 바로 연결되어 있을 텐데···."

"저도 내려가서 지하 1층을 전부 뒤질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상태가 어떤지 한번 보기만 하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야···."

"세아씨는 여기 있어요. 제가 금방 보고 올 테니까. 아, 손전등만 주십쇼. 다시 켜지기는 하죠?"

"넵. 잘 닦고 말리니까 다시 켜지기는 하는데 언제 꺼질지 몰라요. 조심하세요. 현우씨."

지하의 어둠 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일단 확인만 해 보기로 했다. 딱 확인만.

모르는 상태에서 당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플라자 지하의 상태를 알아내야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한 손에는 손전등을, 나머지 한 손에는 도끼를 강하게 쥔 채 계단을 한 칸씩 천천히 내려갔다.

저벅- 저벅-

계단을 절반 정도 내려갔을 때, 나는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주변의 분위기가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용하게 내딛는 발걸음 소리가 지하 식품관에 맴돌다 사라진다.

내가 내쉬는 숨결에 서늘함이 한층 더 섞이기 시작한다.

꿀꺽-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돌려 위를 바라보았다. 한세아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려 내가 향할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하 계단을 거의 다 내려왔을 때, 주변의 어둠을 더 버티지 못한 나는 손전등을 켜 주위를 밝히기로 했다.

딸깍- 딸깍-

팟!

버튼을 몇 번 누르니 손전등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다만 불안정하게 간혹 깜빡이는 모양새에 나는 서둘러 움직이기로 했다.

아니, 움직이려고 했지만 다음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깜빡이는 빛 사이로 고요한 수면이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

나는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 손전등을 이리저리 돌려 지하 식품관을 구석구석 훑었다.

한때는 백화점답게 품질이 좋은 식재료들이 누군가 자기들을 사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식품관은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육류나 생선류는 이미 나무 인간들이 먹어 치운 듯 썩는 냄새조차 풍기지 않았고, 야채나 과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간혹 안에서 발효가 진행되어 비닐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냉동식품만이 물에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전부 사라진 식재료들도, 상해 버린 냉동식품들도 아니었다.

며칠 사이에 내린 빗물이 전부 이곳으로 모인 듯 발목까지 차는 수위로 지하를 덮고 있는 황토물.

그 밑에 언뜻 보이는 매우 깊고 검은 굴들에서 집중해야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공기 방울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보글

···보글보글

마치.

무언가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자신들의 영역에 먹잇감이 제 발로 걸어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물에 잠긴 굴 속에서 작디작은 공기 방울이 하나씩 ···보글, ···보글.

그러다가

톡.

거품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거품이 올라오는 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뒷걸음질쳐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저벅···

저벅···

나는 손전등이 필요 없을 정도로 밝은 1층에 다 올라오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허억."

"현우씨, 괜찮아요? 밑이 어떻길래 그래요?"

"쉿! 좀 더 물러나고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나는 내 옆에서 작게 속삭이는 한세아의 말을 중간에 막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계단으로부터 멀리 떨어트렸다.

이윽고, 플라자 건물의 끝에 도달하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한세아를 보며 내가 본 지하 1층의 모습을 말해주었다.

"후우···. 지하에 물이 차 있었습니다."

"···얼마나요?"

"발목까지 차는 것 같았습니다. 물에 담가 본 것은 아니라서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한세아는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치며 침음성을 흘렸다.

"선로가 있는 터널에서부터 지하 1층까지 높이가 상당한데 물이 차 있다니···."

그녀의 말대로 나와 한세아가 겨우 빠져나온 지하 터널과 플라자 지하 1층은 긴 계단을 올라야 할 정도로 깊이의 차이가 있었다.

아무리 그동안 비가 거세게 내렸다고 해도 불과 며칠 사이에 물이 이렇게 차오른 것은 비정상적이었다.

'정상보다 비정상이 많아진 세상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지하의 수위가 높아졌다는 말은 도롱뇽 변종의 영역이 늘어났다는 소리와 동일했다.

도롱뇽 변종이 육지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 아직 확실치 않은 지금 상황에서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어찌 되었든 위험이 우리 생각보다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세아씨, 저희 앞으로 좀 더 조용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도 조용하기는 하지만요."

"······바로 밑에 그것들이 있었나요?"

한세아는 희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지하 1층 바닥에 뚫린 여러 개의 굴들, 그 밑에서 올라오는 공기 방울.

굴 속에는 도롱뇽 변종이나 그에 준하는 것들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나는 한세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롱뇽 변종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뭐가 있긴 있었습니다. 굴에서 공기 방울이 올라오고 있었거든요.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숨을 쉬고 있다는 이야기겠죠."

"하아···. 빨리 지수씨 찾고 여기서 벗어나야겠네요."

한세아는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격하게 동의했다.

"진심으로 같은 생각입니다. 이제 겨우 1층만 돌아봤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근데···."

나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하다가 느껴지는 이상함에 천천히 말을 멈추었다.

'건물이 이렇게 작았던가?'

그리고 한세아가 내가 느낀 이상함을 짚어 주었다.

"현우씨, 저 이제 생각났어요. 여기 건물이 2개라는 걸요.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이 플라자 건물이고, 이 잔해 너머가 AK&몰 건물일 거예요. 어쩐지 층별 안내도에 하늘 정원이 없더라니."

"허어. ···어쩐지 매장 크기가 생각보다 작다 싶더라니. 원래 여기에 콘크리트 잔해가 아니고 문이 있었나 봅니다?"

"그렇죠."

나는 옆 건물로 이어지는 길을 막고 있는 잔해를 발로 툭툭 찼다.

위에서부터 쏟아진 콘크리트 덩어리와 습기를 잔뜩 먹은 흙더미가 길목을 단단하게 막고 있었다.

"그럼 세아씨, 서둘러 움직입시다. 갈 길이 완전 멀었네요."

한세아는 유해 막대기를 고쳐 잡으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이동했다. 그리고 내 손을 꽉 붙잡아주며 격려의 말을 건넸다.

"너무 걱정 마세요. 현우씨! 금방 그 아이들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2층.

"여긴 특별한 게 없네요. 저희가 구두가 필요한 것도 아니구."

"바로 3층으로 올라갑시다. 세아씨."

3층.

"현우씨! 여기 옷이 좀 남아 있어요. 이거 어때요? 어울려요?"

"오. 괜찮네요. 여기서 세아씨가 입을 만한 옷 좀 구해가면 될 것 같습니다."

4층.

"현우씨도 여기서 옷 갈아입으면 될 것 같아요. 저랑 같이 골라봐요!"

"···네."

"자자. 이거 한번 입어봐요. 세상에, 해진 옷 벗으니까 훨씬 낫네요!"

5층.

"······."

"······."

5층까지 전부 뒤져 본 나와 한세아는 말없이 6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각층을 탐색하면서 얻은 것이라고는 과자 몇 봉지와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옷가지들뿐.

어기적거리며 돌아다니는 나무 인간도, 지수나 예린이 남기고 갔을 수도 있는 흔적 같은 것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것처럼.

층을 올라갈수록 내 얼굴은 어두워졌다.

한세아는 그런 나를 달래기 위해 중간중간 애써 장난도 쳐보고, 밝은 목소리를 내보았지만 5층까지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자 그녀도 지친 것 같았다.

나는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내심 지수와 예린을 금방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큰 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감이 크게 다가온 듯 했다.

아무런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 초조함을 가득 만들어냈고, 그 초조함은 나를 닦달했다.

'후우. 어린애같은 행동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속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니 구석으로 몰린 정신이 조금 풀어져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한세아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용하게 옆에서 걷고 있었다.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처럼 구는 그녀를 보니 그제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세아씨. 미안합니다."

"네? 뭐가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세아.

"그냥. 다요. 아직 건물도 전부 뒤져 보지 않은 주제에 심기 불편한 티 팍팍 냈잖습니까. 제가."

"에이, 아니에요. 그 마음 이해해요. 괜찮아요! 그리고 현우씨 말처럼 아직 저희가 둘러보지 않은 곳은 많아요! 그러니까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구요."

"세아씨 말이 맞습니다. 다시 힘내서 마저 돌아봅시다."

"넵!"

이윽고.

우리는 플라자 건물의 마지막인 6층에 도착한 것과 동시에 몸을 바싹 긴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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