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2 - 72. AK플라자 (6)
"현우씨. 제가 생각해봤는데요. 그동안 저희가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처음으로 찾은 생존자의 흔적이 6층에만 있었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다른 층에 보이지 않던 흔적이 6층에만 있다는 건 역시 옆 건물로 통하는 길목이 뚫려 있다는 거 아닐까요?"
"하지만···. 저희가 봤을 때는 여기 통로도 꽉 막혀 있지 않았습니까?"
나와 한세아가 6층에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마네킹의 밭이었고, 그 뒤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옆 건물로 통하는 통로였다.
하지만 서둘러 움직인 우리 앞에 보인 것은 다른 층과 마찬가지로 콘크리트 덩어리로 막혀 있는 모습이었다.
한세아는 침음성을 흘렸고, 이내 다른 답을 내놓았다.
"꼭 정상적인 길로만 다닐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바닥에 뚫린 굴처럼 어딘가에 벽에 뚫린 굴이 있지 않겠어요?"
"굴이라···."
"아니면 비밀 통로라던가."
나는 한세아의 말에 건물을 연결한 통로를 막고 있는 잔해들을 떠올렸다.
무엇도 침입하게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던, 통로에 빼곡하게 차 있던 콘크리트 덩어리들.
하지만 통로가 무너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무언가가 콘크리트 덩어리를 가져와 가득 쌓았다는 말이 되고, 그 무언가는 이곳에서 지냈던 생존자들의 소행이 분명하리라.
"그리고 현우씨. 이 마네킹들 머리 좀 보세요."
내가 상념에 빠져 있을 때, 한세아가 마네킹의 머리를 툭툭 치며 나를 불렀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계속 봤더니. 가게 안에 있던 마네킹들은 서로를 보고 있는데 밖에 나와 있는 마네킹들은 모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더라구요."
"······!"
나는 주변에 널려 있는 마네킹들의 머리 부분을 쭉 훑었다.
서로 손잡고 있는 마네킹, 목말을 태우고 있는 마네킹, 가만히 서 있는 마네킹, 나란히 앉아있는 마네킹.
이윽고.
약간의 각도 차이는 있었지만, 그것들 모두가 동일한 방향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한번 인식하고 나니 주변에 있는 마네킹들이 한층 더 불쾌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와. 진짜 미친놈인가?"
나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한세아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일단 마네킹들 시선을 따라가 볼까요? 제 추측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은 그게 제일 가능성이 높긴 하잖아요. 아니면 다시 1층까지 내려가서 바깥 통로를 찾아봐야 한다는 건데, 그럼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아, 네네. 제가 앞장 서겠습니다. 일단 여기서 볼 수 있는 건 다 보고 가는 게 낫겠죠."
"넵."
나와 한세아는 마네킹들이 알려주는 곳을 따라 앞으로 움직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내 도착한 장소는 시끌벅적한 예고편 상영 소리와 달콤한 팝콘 냄새를 가득 풍겼을 CGV 영화관이었다.
물론. 지금은 역겨울 정도로 싱그러운 풀 냄새로 가득했고, 싸늘한 적막이 내려앉아 있는 장소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나와 한세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어딘가에 있을 비밀 통로를 찾아다녔다.
"여기가 확실한데···."
"저기 상영관에 있지는 않겠죠?"
"그건 아닐 겁니다. 안내도 보니까 구조상 불가능해 보이던데요."
"그럼 남은 곳은···."
한세아는 말을 흐리며 어느 한 곳을 바라보았다. 나 또한 그녀와 같은 곳을 따라보았다.
<매표소>
우리들의 시선 끝에 고객들이 영화표를 구매하는 곳과 그 옆에 붙어 있는 팝콘이나 콜라따위의 먹거리를 파는 아니, 팔았던 매점이 보였다.
그리고 벽을 유일하게 가로막는 물건이 있는 곳은 매점에 있었다.
부스럭부스럭-
휙!
나와 한세아는 카운터를 넘어 매점 안으로 들어갔고, 무언가를 막고 있는 것이 확실한 팝콘 기계 옆에 나란히 섰다.
우리는 서로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세아씨. 제가 하나둘 셋! 하면 동시에 미는 겁니다. 알았죠?"
"네. 신호 주세요."
"하나둘··· 세엣!"
끼기긱··· 그그그그극-
나와 한세아가 내 신호에 맞춰 팝콘 기계를 앞으로 쭉 밀었다. 기계는 바닥에 끌리는 소리를 토해내더니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휘이이이···
그리고 숨겨진 통로가 드러나는 것과 동시에 한 줄기 바람이 통로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흐읍! 한 번 더 밀면 될 것 같아요!"
"네엡···!"
끼기긱···!
-쿵
팝콘 기계가 완전히 밀리는 것과 동시에 아마 옆 건물인 AK&몰로 이어지는 통로가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이 굴을 어떻게 팠는지는 몰라도 건장한 성인 남성이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세로 높이가 상당했다. 다만 가로 길이는 생각보다 좁아 어깨를 비틀면서 지나가야 할 것 같았다.
딸깍-
팟!
나는 버튼을 눌러 전원이 켜진 손전등 빛을 계속해서 바람이 통하는 굴로 집어넣었다.
후둑-
간혹 돌부스러기가 바람에 휘말려 바닥에 떨어졌지만 손전등 불빛은 막히지 않고 쭉 뻗어나갔다.
그 결과, 희미하게나마 반대편 모습이 보이고 있었기에 이 굴이 옆 건물로 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세아의 추측대로, 사람이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있었다.
"여기 맞는 것 같습니다. 세아씨 말대로 숨겨진 길이 있긴 있었네요."
그녀는 길을 찾았다는 것에 생각보다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세아가 짓고 있는 표정은 찜찜함에 가까웠다.
"현우씨."
"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꼭 옆 건물로 넘어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한세아는 단호하게 말하다가 내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 하고 싶은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지수씨는 후각이랑 청각이 좋으시다고 했으니까 저희는 오히려 한 곳에 머물고 있어야 할지도 몰라요. 지금도 건물 각층마다 현우씨 냄새가 배인 천 조각을 두고 왔잖아요."
"······."
"비밀 통로를 찾은 건 좋지만. 여기도 먼지가 쌓인 팝콘 기계에 의해 막힌 걸 보니 자주 이용은 안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이쪽에 있는 생존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도 모르잖아요. 아마도 좋은 사람들은 아닐 거예요. 물론, 생존자들이 없을 가능성이 가장 크지만요."
한세아의 말을 끝으로 우리는 잠시 침묵에 빠졌고, 나는 침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그녀가 걱정하는 부분은 나 또한 계속해서 생각했던 부분이다.
한세아는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예전에 함께 지냈던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말했고, 나도 거기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세상이 뒤바뀌기 전에도 마냥 좋은 사람들만 있지는 않지 않았던가.
'현우야. 네 앞으로 온 보험금 말인데, 우리가 책임지고 보관하고 있으마.'
'그래! 아직 어린 네가 다루기에는 너무 큰돈이란다. 그러니까 여기에 싸인만 해주면 돼. 아니면 이모가 직접 할까?'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남을 속이고, 이용하고, 빼앗는 자들은 차고 넘쳤다.
사회를 법이라는 틀로 붙잡고 있어도, 그 법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안에서 법의 빈틈이나 전통이라는 말에서 말미암은 불합리는 곳곳에 깊게 뿌리내려 사람들을 괴롭혔다.
당장 내가 어렸을 적에 뼈저리게 느꼈단 말이다.
겉으로는 고상한 척하는 약육강식의 논리.
모든 사회 기반이 멀쩡했을 때도 이러했는데, 사회가 제 기능을 못 하게 된 지금은 어떻겠는가.
'짐승들이 있었어요.'
한세아가 해줬던 이야기처럼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규칙인 법이 사라진 당시에는 해방감에 울부짖는 짐승들이 판을 치고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껏 운이 매우 좋았던 경우에 속했다.
정신을 차리고 연이어 만난 사람들인 지수, 예린 그리고 한세아.
만약 처음에 만났던 사람들이 내게 호의적으로 다가왔던 그녀들이 아닌, 속에 악을 품은 사람들이었다면 나는 이미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위기 앞에 인간들은 똘똘 뭉쳐 위기를 극복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인 것이 현실이기도 하고.
자기 영달을 위해 남을 헤치는 짓을 아주 손쉽게 질러버리는 인간들은 오히려 세상이 망한 것에 큰 기쁨을 느꼈겠지.
한세아의 말처럼 위험한 사람들이 수원역에 아직 자리 잡고 살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가야만 했다.
'이곳에 지수와 예린의 흔적이 없는 것이 누군가에게 잡혔기 때문이 아닐까?'
'혹시 그녀들이 자신들을 구해 주길 바라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녀들은 이미···.
나는 고개를 털어 불길한 상상을 떨쳐 냈다.
지금 여기서 하는 망상은 우리의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가서 확인해야만 했다. 이 앞에 무슨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던 확인을 해야만 한단 말이다.
"후우···."
나는 긴 한숨을 내쉬고 내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한세아를 보며 말했다.
"세아씨 말대로 이 너머에 위험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도 한 방법이기도 하고요."
"그럼···."
"하지만 저는 그래서 더더욱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만약 지수랑 예린이가 여기에 흔적을 남기지 못한 이유가-"
"그 아이들이 잡혀 있어서 그럴 수 있다는 말이죠?"
한세아는 내 말을 중간에 끊고 내가 할 말을 대신해서 말했다.
"하아. 네. 순전히 제 억지라서 세아씨는 여기 남으셔도 됩니다. 저 혼자 갔다 와도 되니까요."
"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며 나를 타박했다.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현우씨 혼자만 가게 하는? 저는 여기에 혼자 남아서 기다리고?"
"······."
"저는 현우씨가 지금 상황을 확실히 알고 있을까 해서 물어본 거예요. 지금 말씀하시는 거 보니 생각은 충분히 하신 것 같네요."
한세아는 그 말을 끝으로 지금까지 들고 있던 유해 막대기를 가방에 끼워 넣고 허리춤에 있던 총을 꺼내 들었다.
철컥-
그리고 그녀는 총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을 거친 후 나를 바라보았다.
"만약 생존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협을 하든 뭘 하든 막대기보다는 총이 효과적일 거예요. 그 사람들이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총알 몇 방 먹여주면 정신 차리겠죠!"
"···감사합니다. 세아씨."
"뭘요. 우리 사이에. 저랑 현우씨는 사선을 수차례 같이 극복한 사이잖아요."
나는 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한세아에게 웃어 보였다. 그녀도 나를 보며 잠시 웃더니 이내 표정을 다잡으며 뻥 뚫린 구멍 너머를 바라보았다.
"빨리 가죠! 이왕 정한 거 서둘러 움직이는 게 좋겠어요."
"네. 제가 앞장설 테니 바로 뒤따라 들어오십쇼."
"조심해요."
이윽고.
나와 한세아는 AK&몰로 이어진 통로로 발을 들이밀었다.
기대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품은 상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