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3 - 73. 꼭두각시 (1)
후둑-
투두둑
벽에 손을 짚을 때마다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나는 손전등을 아래로 비추며 천천히 한 발자국씩 움직였다.
통로 자체는 길지 않아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면 5초도 걸리지 않겠지만, 아직 통로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지 않는가.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해도 손전등을 최대한 아래쪽을 비추면서 움직인 것도 그 이유이긴 하다.
저벅저벅-
내 뒤에서는 한세아가 총을 꽉 쥔 채 바싹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가 내쉬는 숨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꾸준하게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통로 끝에 다다랐다.
딸깍-
나는 버튼을 눌러 손전등 불빛을 껐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후 한세아에게 말했다.
"다 왔습니다. 세아씨. 제가 먼저 나가서 안전하면 신호 보내겠습니다."
"넵. 조심해요."
AK&몰.
이 건물은 외벽이 통유리로 된 플라자 건물과 달리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고 천장이 군데군데 유리로 뚫려 있는 곳이었다.
이 곳의 천장 유리들도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전부 깨져 있는 듯 해보였지만, 건물 전체를 뒤덮은 넝쿨에 의해 빛을 쉽사리 안으로 들여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탓에 매장 내부는 생각보다 어두웠고, 흐릿한 윤곽만이 보였다.
손전등의 밝은 빛만 보다가 갑작스럽게 어두운 곳으로 나왔기 때문에 내 눈은 어둠에 눈이 익을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쉴 새 없이 눈을 깜빡이는 한편, 귀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
옅게 들리는 한세아의 숨소리.
강하게 박동하는 내 심장 소리.
"후우···."
고요한 정적 속.
시간이 갈수록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윤곽만 겨우 보이던 것들이 서서히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매장이 길게 늘어진 복도를 따라 허리춤까지 오는 바리케이드가 있었다.
바리케이드들은 지그재그로 서로 엇갈려 설치되어 있었다.
길목을 완전히 봉쇄하는 목적이 아닌 시간을 벌기 위한 목적인 것 같았다.
사람의 시체나 나무 인간의 사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바닥에 수많은 핏자국들과 나무 조각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보니 수차례 충돌이 있었다는 걸 알려주었다.
아니, 시체는 없었지만 누렇게 변색된 뼛조각들이 바리케이드 틈에 박혀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것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생존자들이 있었다는 건 확실한데······.'
지금껏 거의 볼 수 없었던 생존자들의 흔적을 무더기로 찾은 것은 좋으나, 여전히 그들이 지금도 남아 있는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세아씨! 이리로 오세요.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넵!"
한세아가 도도도 달려와 내 옆에 섰다. 그녀는 앞에 있던 내가 시야를 가려 보지 못했던 바리케이드들을 요목조목 살펴보기 시작했다.
"치열하게 싸웠나보네요. 이 길목에 바리케이드가 있다는 건 이곳으로 통하는 각층의 통로를 막은 건 나중이라는 얘기고···."
"그런가 봅니다. 일단 여기서 볼 건 더 없는 건 같으니 앞으로 이동하죠."
우리는 바리케이드를 넘어 AK&몰의 중앙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바스락- 바스락-
빠직!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완전히 말라비틀어진 나무 조각들이 톱밥처럼 바스러졌다.
이윽고.
나와 한세아는 모든 층이 한눈에 보이게 설계된 중앙 광장에 도착했다.
"저게··· 뭐죠?"
한세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는 침음을 삼키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시야에 담았다.
각 층에 있는 에스컬레이터 끝부분마다 여러 잡동사니들이 쌓인 바리케이드가 존재하고 있었다.
침대 매트리스, 철제 선반이나 책상 등···. 인간이 옮길 수 있는 것들이 전부 한데 모여 형성된 장애물.
그리고 그것들의 표면에는 하얗게 말라붙은 점액질이 가루로 변한 채 바닥으로 부스스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서도 나무 인간 변종들과의 수차례 마찰이 있었다는 걸 알려주는 모양새에 나와 한세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한세아가 내게 물어본 것은 바리케이드 따위가 아니었다.
건물 1층 밑바닥, 그보다 더 밑에.
···심연이 있었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깊고 어두운 심연이.
그리고 나와 한세아를 한층 더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심연만이 아니었다.
휘이이잉-
철그럭- 철그럭-
건물 중앙 천장에는 다른 곳보다 더 심한 균열이 쩍쩍 갈라져 있었고, 넝쿨과 함께 회색빛의 무언가가 축 늘어져 있었다.
'···와이어 로프?'
여러 가닥의 강철 철사가 서로 꼬여 만들어진 와이어 로프.
무거운 하중을 버티기 위해 설계된 그것이 중앙 홀 난간에 걸쳐져 있었다.
승강기를 움직이게 하는 와이어 로프가 엘리베이터 통로가 아닌 왜 건물 중앙 홀에 있단 말인가.
그것도 심연과 연결된 채로.
손전등을 켜 빛으로 아래를 비춰 보고 싶었지만, 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섣불리 행동할 수도 없었다.
나는 늘어진 와이어 로프를 따라 시선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두꺼운 와이어의 위쪽은 천장 건물 골조에 설치된 도르래를 한 바퀴 빙 둘러 고정되어 있었고, 아래쪽은 검은 구덩이 밑으로 쭉 뻗어 있어 끝부분이 어떻게 된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탈출용인가?'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 탈출용 로프를 저런 식으로 해 놓는다는 말인가?
탈출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살용에 가까워 보였다.
그때.
"현우씨. 일단 하늘 공원으로 올라가 볼까요? 밑은 절대 내려가면 안 될 것 같구···.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위로 올라가면 다른 흔적을 찾을지도 모르잖아요. 여기까지 온 이상 뒤로 물러날수도 없잖아요?"
한세아가 고민 가득한 얼굴로 내게 의견을 물었다.
"···그렇죠."
지금 나와 한세아가 있는 위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우리 옆에 있는 ABC마트의 앞에 있는 계단을 이용해 올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중앙에 있는 에스컬레이터의 길목은 전부 막혀 있었지만 위로 올라가는 유일한 계단은 막혀 있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ABC마트는 보관 물자를 털릴대로 털린 상태로 보였기 때문에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온전한 물건도 없어보이기도 했고.
나는 아래의 구덩이를 잠시 보다가 한세아를 보며 말했다.
"세아씨. 당연한 말이겠지만, 세아씨가 여기 떠날 때 저 구덩이 본 적 없었죠?"
"네. 저런 건 지금까지 살면서 처음 봐요. 저런 구덩이를 뭐라고 하죠? 싱크홀? 그거랑 비슷한 것 같은데."
"세아씨 말대로 싱크홀같긴 하네요. 매교역에 있던 크레바스처럼은 보이지 않으니."
싱크홀.
땅의 지반이 내려앉아 지면에 커다란 웅덩이 및 구멍이 생기는 현상.
"생존자는 없겠죠? 별다른 소리도 안 들리고, 밑에 저런 깊은 구덩이가 있는데 여기서 아직까지 살리는 없지 않겠어요?"
"그럴 가능성이 크긴 하겠습니다만. 용케 이 건물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네요. 그럼 서둘러 캠프가 있던 곳만 보고만 옵시다. 여기에 지수랑 예린이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좋아요. 이쪽 길은 제가 좀 알아요. 따라오세요."
한세아는 그렇게 말한 뒤 앞장서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총을 내려놓지 않은 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윽고.
AK&몰의 하늘정원으로 올라온 나와 한세아는 헛숨을 들이켰다.
세상 일은 모른다고 하던가.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정상에 도착한 우리를 처음으로 반겨 준 것은 그녀가 잠시 지냈던 캠프가 아니었다.
구름이 가득 껴 흐릿해진 하늘도 아니었다.
답답함을 해소시켜 줄 시원한 바람도 아니었다.
뼈대만 남은 형형색색의 텐트도 아니었다.
곳곳에 버려진 음식물 포장지도 아니었다.
나와 한세아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생존자들이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웅크린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생존자들.
그리고 그들은 철망으로 된 풋살장에 들어 있었다.
"이게 무슨···."
우리는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당황스러워하며 바싹 얼어붙었다.
그리고 이내 정신을 차리며 도끼와 총을 들었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별다른 행동을 보여 주지 않았다.
낯선 이가 모습을 보이면 응당 일반적으로 드러내는 반응이 있을텐데, 이들은 그저 웅크리고만 있었다.
그때.
"···외부인?"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가만히 주저앉아 있던 누군가가 나와 한세아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이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목소리가 낮고 기운이 없는걸 보니 나이가 많은 남성인 듯했다.
늙은 남성의 어조에는 외부인에 대한 호기심과 적개심이 아닌 체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콜록! 콜록! 흐으. 너무 늦기 전에 도망가게···. 콜록!"
"···늦기 전에 도망가라고요?"
"다 죽을 거야···."
나는 늙은 남성의 말을 듣고 이곳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들은 위험을 피하고자 이곳으로 숨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이곳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기분이 어때? 연민이 들어?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나와 하나만 되었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잠잠해졌다고 생각했던 속삭임이 들렸다가 사라진다. 희미하게 울리는 속삭임일뿐이었지만, 무의식적으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누가 이런 겁니까? 저, 저희가 꺼내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요!"
나도 모르게 꺼내준다는 말을 내뱉은 것이 시발점이었을까.
나와 어떤 남성이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도 미동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갑자기 철망 밖으로 팔을 뻗으며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덜컹! 덜컹!
철그럭! 철그럭!
"꺼내준다고? 나! 나부터 꺼내! 빨리!"
"비켜! 어른부터 나가는 게 먼저지! 저리 꺼지라고!"
"야! 당장 꺼내달란 소리 안 들려?! 내보내줘! 제발!"
생존자들이.
아니, 짐승들이 우리를 열어달라며 울부짖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세아씨가 말한 수원역 생존자들인가?'
갑작스럽게 돌변한 생존자들의 태도에 나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 생존자들을 향해 외쳤다.
"잠시만요! 여기 혹시 검은 머리와 호박색 눈동자를 한 여성 본 적 있으십니까? 대답하십쇼!"
"알 게 뭐야! 우선 먼저 풀어달라고!"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는 나와 한세아를 지켜보던 늙은 남자는 무언가를 본 듯 탄식을 내뱉었다.
"아."
그의 시선은 우리의 뒤를 향하고 있었다.
"이젠 늦었다네."
우리에 갇힌 늙은 남성이 안타까운 표정을 하며 말을 툭 내뱉은 그 순간.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과 동시에 한세아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고.
"아악!"
"세아씨!"
"쥐 새끼들이 들어왔구나."
소란을 틈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온 누군가가 내뱉은 목소리가 나와 한세아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내가 황급하게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그곳에는 2m를 가뿐하게 넘는 거한이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한세아는 갑작스럽게 거한에게 밀쳐진 것인지 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총은 바닥을 굴렀다.
'이렇게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눈치를 못챘다고?'
살아있는 사람인 이상 가지고 있는 존재감이 발산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건만.
이 남자는 어딘가 어색했다.
희미한 존재감.
어색한 걸음걸이.
어눌하게 들리는 발음.
저벅저벅-
거한이 내게 큰 걸음으로 내게 접근하기 시작하자, 나는 도끼를 앞으로 내세워 경고했다.
"당신 뭡니까! 멈춰! 세아씨, 괜찮아요?!"
"으윽! 전 괜찮아요!"
"······."
그러나 거한은 초점을 잃은 눈을 한 채 발을 멈추지 않았다.
부우웅!
나는 위협용으로 도끼를 힘차게 휘둘렀다.
이 자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에게 호의적이라고 보이지 않았으니.
게다가 나를 바싹 긴장하게 만든 것은 거한의 눈이 검게 물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쿵-!
"······!"
하지만 내가 도끼를 휘두른 것이 무색하게 빈틈을 노린 거한이 비정상적으로 빠른 속도로 발을 박차며 내게 달려들었다.
그는 순식간에 내 목을 잡아채 숨통을 강하게 조였다.
"커헉!"
"현우씨! 안돼!"
철컥-
"이봐. 총 내려놔.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은 죽어."
빠악!
거한이 나를 바닥으로 순식간에 패대기치며 한세아에게 말했다.
'무슨 힘이···.'
나는 흩어지려는 정신을 애써 부여잡아봤지만, 머리가 바닥에 거세게 부딪히면서 생긴 고통에 의식은 속절없이 힘을 잃어만 갔다.
후두부에서 강한 욱신거림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순식간에 시야가 암전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