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4 - 74. 꼭두각시 (2)
움찔!
내가 처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손가락.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전기가 오른 듯 찌릿한 감각이 잠들어 있던 손 전체에 퍼지고, 팔을 타고 흘러 순식간에 전신을 일깨웠다.
조용하게 박동하던 심장이 잠에서 깨어나 탁한 피를 몰아냈다. 신선한 피가 머리에 공급되자 정신이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
감각은 뚜렷해졌지만 몸이 무거워서 움직이기 힘들었다.
다만 뭔가 포근한 게 이대로 쭉 있어도 될 것 같은 느낌···.
'현우씨!'
누군가 나를 부른다.
꿈인가.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꿈이 아닌가.
내가 의문을 품은 그때,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리가 머리를 강하게 울렸다.
'쥐 새끼가 들어왔구나.'
그 말을 떠올린 순간, 나는 급하게 숨을 들이키며 눈을 떴다.
"허억!"
"현우씨!"
나를 품에 안고 있던 한세아는 내가 정신을 차리자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 나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느낌에 손으로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머리에 혹이 생긴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한세아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현우씨! 괜찮아요?"
"아윽···. 머리가 아픈 것 빼고는 괜찮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어떤 남성이 우리를 기습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나는 한세아의 말에 의식을 잃기 전을 회상했다.
천막을 두르고 있는 풋살장에 갇혀 있는 생존자들.
그들은 가둔 사람으로 보였던 거한의 남성.
그리고 그 남성이 우리를 순식간에 제압했던 것이 떠올랐다. 사람의 힘이라고 볼 수 없는 비정상적인 괴력에 맥도 못쓴 채 당했던 기억도 같이.
바닥에 내려찍힌 충격이 가라앉지 않은 듯 손이 잘게 떨렸다.
"기억. 기억납니다."
지금 나와 한세아가 있는 곳은 처음 이곳으로 올라왔을 때 보았던 풋살장 안이었다.
하늘에 구름이 가득 끼었지만, 해가 아직 하늘에 밝게 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시간이 많이 지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세아씨는 어디 다친 데 없어요? 괜찮죠?"
나는 다급하게 시선을 움직여 한세아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그녀는 나와 달리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은 듯해 보였다.
"저는 멀쩡해요. 하지만···."
한세아는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녀를 따라 시야를 주변으로 넓혔다.
수많은 생존자들이 철망으로 된 우리 안에 갇혀 있었다.
어린아이를 제외한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들.
어림잡아 열 명은 가뿐하게 넘는 인원들이 멍하니 바닥에 뚫린 구멍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또 다른 일부는 체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구멍?'
나는 그들이 보고 있는 구멍으로 시선을 돌렸고,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쳐 뒤로 물러났다.
구멍과의 거리 자체는 그리 가깝지는 않았지만 추락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건물 밑바닥의 심연까지 뻥 뚫린 구멍이 난장판이 되어 버린 풋살장 아니, 철망으로 된 우리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구멍을 보고 화들짝 놀랐던 나는 이내 천장 골조에 설치된 도르래를 보고 구멍 자체는 나와 한세아가 잡히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남자가 우리를 가뒀어요.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줄로 묶지는 않더라구요. 그리고 우릴 이곳에 가둔 다음에 어딘가로 가서 지금은 이곳에 없네요. 어차피 도망 못 칠 거라고 생각한 건가···."
한세아가 힘없이 말을 이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장비는 그 남자가 다 가져갔지만요."
"전부 다요? 가방이나 도끼는 그렇다 치고. ······총이랑 조각까지도?"
나는 뒷말을 할 때는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를 냈다. 한세아는 목걸이를 아주 살짝 밖으로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목걸이에 달린 푸른 조각은 묘하게 기운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헌혈 카페에서 보았던 것보다 좀 더 푸른 입자가 줄어든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녀는 주변을 보며 살짝 눈치 보더니 답했다.
"총은 가져갔지만 조각은 아직 있어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란 말이냐.
지금 상황에서 조각 하나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게다가 기껏 들고 있는 조각마저 상태가 온전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놈은 대체 뭐야?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건물에서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나는 욱신거리는 몸을 애써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세아씨까지 잡혀 버렸네요."
"아니에요. 이제 어쩌죠? 지금 그 남자가 없는 틈에 나갈 길을 찾아볼까요? 현우씨가 정신을 차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차려서 다행이에요. 나갈 기회는 그 남자가 없는 지금뿐일지도 몰라요. 저 구멍으로 빠져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
한세아는 그 말을 하며 철망을 흔들었다.
철그럭- 철그럭-
그때.
"아서."
나와 한세아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던 생존자 중 한 명이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우리에게 도망가라고 조언했던 늙은 남성이었다.
"내가 귀는 잘 안 들리지만 자네들이 여기서 빠져나가려고 한다는 것쯤은 아네."
우리는 흠칫하며 갑자기 말을 걸어온 늙은 남성을 바라보았다.
"뭐, 누구라도 알아차렸겠지만 말일세."
"······."
"하지만 그만둬. 잡힌 이상 빠져나갈 길이라고는 저 구멍뿐이니까."
"어르신은 어쩌다 붙잡히신 겁니까?"
"······어쩌다? 잡혀? 으으. 아니야아니야."
늙은 남성은 내 물음에 몸을 떨더니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가 머리를 손톱으로 긁을 때마다 베이고 찢긴 상처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겠다고 다 뜯어내버렸어. 저것이. 인간에게는 짐승 귀가 달려 있으면 안 된다면서. 거슬리는 것들을 전부!"
"······!"
나와 한세아는 갑작스럽게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는 늙은 남성을 당황스러워하며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늙은 남성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핏줄기에 경악했다.
이 늙은 남성이 귀가 잘 안 들렸던 이유는 어쩔 수 없는 노화탓이 아니었다. 그가 소리를 잘못 듣는다고 했던 이유는···.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이곳에 있는 생존자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세상이 뒤바뀌고 나서 대다수에게 생겼을 짐승의 부위들이 전부 사라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겨우 볼 수 있는 것은 피가 멎어 보이는 상흔뿐.
우리가 바로 아래층에 있을 때, 왜 이곳 사람들이 별다른 반응을 보내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들은 반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었다.
한세아도 이제서야 알았는지 희게 질린 얼굴을 하며 내게 바싹 붙었다.
"혀, 현우씨···."
나는 서둘러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주 경로를 찾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올라올 수 있는 통로는 총 2개.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엘리베이터는 현재로서는 무용지물이기에 계단이 유일한 입구이자 탈출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단으로 내려가기에 앞서 이 두꺼운 철망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했다.
내가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바로 그때.
저벅저벅-
유일한 통로인 계단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그와 동시에 이곳에 있는 생존자들이 고개를 한층 더 숙이며 벌벌 떨었다. 마치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운 것처럼.
"정신이 들었나 보네."
어느새 우리 앞에 도착한 거한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생각보다 젊은 것 같았다.
그는 큼지막한 모자가 달린 검은 후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얼굴에 마스크까지 써 온몸을 꽁꽁 싸매다시피 한 모습을 보니 거한은 피부를 겉으로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허리춤에는 한세아에게서 빼앗은 걸로 추정되는 총이 매여 있었고, 손에는 레버 손잡이로 보이는 것을 들고 있었다.
'레버?'
나는 한세아를 내 뒤로 숨기며 거한에 대한 경계심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총을 뺏어간 저 남자가 언제 돌변해서 방아쇠를 당길지 모르는 일 아닌가.
'적어도 이 사람만큼은 살려야 한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어찌 되었든 이 건물도 살펴보자고 한 건 내 결정이었고, 한세아는 그런 내 결정을 따른 것뿐이었으니까.
그러나 거한은 처음에 말을 건 것이 무색하게 나와 한세아를 흘깃 보더니 그가 가져온 가방을 한쪽 구석으로 내던지기만 했다.
퍽!
부스럭! 부스럭!
가방 안에는 식량이 들어 있는지 비닐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걸쇠를 풀고 우리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레버 손잡이를 도르래에 끼우더니 돌리기 시작했다.
끼릭··· 끼리릭- 끼기긱···
'뭘 하는 거지?'
나와 한세아는 예상했던 상황과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자 의문을 품은 눈으로 서로 잠시 바라보았다.
"세아씨. 일단 좀 더 물러납시다. 당장 우리에게 뭔가를 하진 않을 건가 봐요."
"···넵."
우리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최대한 구석으로 빠졌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레버를 돌렸다. 그저 묵묵히.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출렁
수면 아래에 깊숙하게 가라앉아 있던 무언가가 물에서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
물소리.
미약한데다가 찰나에 불과했지만 우리들의 귓가에 분명 물소리가 들렸다.
······촤아아악-
끼이익- 끼기긱-
끼익···
뒤이어 좀 더 명확하게 들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거한은 더 힘차게 레버를 돌리기 시작했다.
············끼익- ·········끼익- ······끼익- ···끼익-
무언가 비틀리는 소리는 남자가 레버를 돌릴 때마다 이곳과 점차 가까워졌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동안 미동도 하지 않던 생존자들이 발작하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 울음을 터트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자는 지치지도 않는 지 한순간도 쉬지 않으며 손잡이를 돌렸기 때문에 의미를 모르는 작업의 끝은 금방 다가왔다.
이윽고.
도르래의 와이어에 딸려 올라온 것을 본 나와 한세아는 순간 눈을 의심해야 했다.
쇠 파이프로 이루어진 철창.
네 갈래로 나눠진 와이어가 철창의 끝부분을 연결해 흔들리지 않게 고정하고 있었고, 철창의 밑바닥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떨어지는 것은 물뿐이 아니었다.
···뼛조각.
사람의 것이 분명할 뼛조각들이 쇠 파이프들의 틈 사이를 통과해 밑으로, 저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퐁당
······퐁당
그것을 알아본 순간.
저 철창 안에서,
이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단박에 짐작을 해 버린 나와 한세아의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 차고 말았다.
사정없이 몸이 떨리고 있는 한세아와 주먹을 꽉 지어 애써 손떨림을 숨기는 나.
고개를 든 거한이 우리 안의 생존자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무감정한 눈으로.
무감정한 표정으로.
무감정한 말투로.
그저 정해진 대사를 그대로 읊는 것처럼.
"자. 그럼 오늘은 각자 어떤 생각하면서 하루를 보냈는지 들어 볼까. 이 짐승 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