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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75화 (76/497)

Chapter 75 - 75. 꼭두각시 (3)

"자. 그럼 오늘은 각자 어떤 생각하면서 하루를 보냈는지 들어 볼까. 이 짐승 새끼들아."

거한이 우리 안에 있는 생존자들을 향해 말했다.

"······?"

나와 한세아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생각을 들어 본다고?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는 한층 더 혼란에 빠졌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벌벌 떠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구멍에 걸쳐진 쇠 파이프 철창에 앞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멍하니 구멍만 바라보거나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는 행보를 보인 것과 상반되는 행동이었지만, 나와 한세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것을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저 남자는 우리에게 관심을 완전히 끈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한 늙은 남성이 두려움에 호흡곤란이 온 것처럼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인간답게. 헉. 아니. 인간다워지기 위해. 제가 가지고 있던. 외투를 다른. 사람과 나눠. 새벽의 추위를 이겨 냈.습니다. 허억. 같이 힘을. 모으면. 힘든 일을 이겨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말은 이틀 전에 했던 말 같은데? 내가 같은 말 반복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거한이 초점을 잃은 눈으로 늙은 남성을 응시했다. 늙은 남성은 눈이 마주치자 발작하듯 몸을 떨면서 말했다.

"아니, 아니에요! 그때는-!"

"뭐, 됐다. 다음 사람 말해."

"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늙은 남성은 애원하며 거한의 발치로 기어갔지만, 말없이 그를 응시하는 눈에 힘없이 몸을 무너트렸다.

"···아, 안 돼······."

"다음."

텅! 텅!

남자는 쇠 파이프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늙은 남자의 뒤를 이어 나머지 사람들이 서둘러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제 배급해주신 식량을 옆 사람과 나눠 먹었습니다!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다 같이 식량을 나눠먹으니까 하나가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게 인간다움이라는 거겠죠!"

"나무 인간들로부터 저희를 지켜 주시는 태진씨의 행동에 큰 고마움을 느끼고, 밤새 감사 인사를 속으로 드렸어요! 마음 같아서는 크게 외치고 싶었지만, 소리를 함부로 내지 말라는 태진씨의 말을 지키기 위해서 그랬던 거예요! 정말이에요!"

"저도! 저도 밤새 기도를 올렸습니다! 김태진씨! 당신 덕분에 오늘도 하루를 살아갈 수 있음에 희망을 얻었습니다! 내일도 오늘과 같은 하루가 흘렀다면 좋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생존자들은 각자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 김태진에게 앞다투어 말했다. 마치 조금이라도 늦으면 자신들의 할 말을 뺏긴다는 듯이.

김태진은 묵묵히 생존자들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이윽고, 마지막 한 사람만 남은 그때.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중년 남성을 바라보았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멍하니 광기의 현장을 지켜보던 나와 한세아 또한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보았다.

마지막까지 말하지 않은 중년 남성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떨리는 손으로 비 오듯 쏟아지는 식은땀을 훔치며,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상황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나는···."

하지만 중년 남성은 입을 연 것이 무색하게 완성된 문장을 내뱉지 못했다.

똑- 똑-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중년 남성의 턱을 타고 인조 잔디 바닥으로 떨어진다.

모두가 말없이 그를 지켜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러웠던 옥상은 한순간에 적막에 빠져들었다.

나는 중년 남성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며 속으로 외쳤다.

'말해! 뭐든 좋으니까 말 하라고! 이상한 말이라도 꺼내서 시간이라도 끌어! 빨리!'

바닥에 뚫린 구멍.

심연까지 연결된 와이어 로프.

와이어 로프에 고정된 쇠 파이프 철창.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던 뼛조각들.

이 모든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이 사람들이 간절함이 섞인 얼굴로 김태진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하지만.

···중년 남성은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곧 닥칠 상황을 알고 있는 뇌가 공포에 사로잡혀 마비된 것 같았다.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날이야."

"······!"

나지막한 목소리로 김태진이 말을 내뱉자, 중년 남성이 고개를 확 들어 김태진을 바라보았다.

"내 딸의 친구가 되어 줄 사람이 두 명이나 찾아왔고, 곧 있으면 나도 내 딸을 다시 볼 수 있게 되니까. 정말로 좋은 날이지. 그래서 아까 너희들이 소란을 피운 것을 조용히 넘어간 거야. 내가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김태진의 말이 이어질수록 중년 남성의 얼굴에 희망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무감정한 눈과 마주친 중년 남성은 현실을 깨달았다.

"그와 별개로, 인간다운 생각도 못하는 짐승은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어."

저벅저벅-

김태진은 한 걸음씩 내디뎌 몸을 움츠리며 벌벌떨고 있는 생존자들 사이를 걸어 지나갔고,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중년 남성 앞에 섰다.

이윽고.

···꽈악!

김태진의 커다란 손이 중년 남성을 닭 모가지 잡듯 비틀어 잡은 채로 그대로 들어 올렸다.

"아아악! 이거 놔! 놔아아아! 시간을 조금만 더 줘! 케헥!"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중년 남성은 발버둥 치며 애원했다. 하지만 발길질에 끄떡도 하지 않는 김태진은 망설임 없이 철창 앞으로 끌고 갔다.

"시간은 충분히 줬잖아."

"이 미친 새끼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네가 이러고도 뒷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냐고! 군인들이 오면 너는 죽은 목숨이야! 시발 새끼야! 어? 죽은 목숨이라고! 이 천벌 받을 새끼!"

"······."

"너! 내가 네가 일하는 편의점 매출을 얼마나 올려 줬는데! 어?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아? 이 배은망덕한 새끼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황금 같은 조언도 해줬는데 이따위 짓을 해?! 네 딸이 죽은 게 어떻게 내 탓이냐! 어? 그게 그년 운명이었던 거지! 어찌 되었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잖아! 이런 식으로 굴면 네가 뭐라도 된 것 같냐고!"

겁먹은 개는 자기 공포심을 감추기 위해 크게 짖는다.

크게, 더 크게.

"아니, 아니야. 내가 말실수를 했네. 미안하다. 진짜 미안해. 그러니까 이것 좀 놓고 이야기하자. 어? 제발···."

그러다가 허장성세가 먹히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꼬리를 만다.

바둥바둥-

김태진은 끝까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중년남성을 철창 안으로 던졌다. 그리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파이프를 비틀어 문을 봉쇄했다.

콰당탕!

끼기긱-

중년남성은 구멍이 숭숭 뚫린 쇠 파이프 철창 안에 갇히게 되었다.

덜컹- 덜컹-

그는 쇠파이프를 흔들면서 애원했다.

"이봐···. 나 돈 많아. 돈이 아주 많다고. 응? 내가 그날 자네를 밀친 것은 정말로 마음 깊숙하게 반성하고 있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세상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면 내가 가진 전 재산을 자네에게 줌세. 그러니까 우리 이러지 말자고, 응?"

중년남성이 무슨 말을 해도 김태진은 묵묵부답이었고, 그는 그저 도르래에 고정된 레버를 향해 갈 뿐이었다.

김태진은 레버 손잡이를 도르래에서 분리해 고정 해제하며 말했다.

"내가 원하는 보상은 너 따위가 줄 수 없어. 오직 어머니만이 가능하시다. ···안타깝네. 결국 너는 끝까지 짐승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고정 장치가 해제된 도르래.

틱!

끼리리리리리리릭-!

그리고 고정이 풀린 도르래는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와이어 로프를 풀어내며, 쇠 파이프 감옥을 건물 밑바닥의 심연으로 떨어트렸다.

"죽고 싶지 않아아아아악!!!"

강한 생존 의지가 담겨 있는 비명은 추락하는 과정에서 길게 늘어졌고, 건물 안 모든 층을 웅웅 울렸다.

메아리 친 비명 소리는 잔불처럼 남아 나와 한세아의 귓가에 맴돌았다.

소리는 진작에 사라졌건만, 계속해서 귓가에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느낌이었다.

퍼어엉-!

······풍덩!!

촤아아악-

이윽고.

거대한 질량이 수면으로 단박에 부딪치자 폭탄 터지듯 박살 나는 물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비산하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끝으로.

"······."

"······."

"······."

한때 생존자들의 희망이었던 캠프는 지독한 절망과 같은 정적이 다시금 내려앉았다.

사람이 눈앞에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생존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상황이 끝났다고 여겼는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와 한세아가 처음 보았던 그 광경 그대로.

뒤에서 서로 맞잡은 한세아의 손이 내 손을 강하게 잡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떨림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기묘한 광기에 사로잡힌 이 상황은 우리의 몸을 무겁게 짓눌러 아무런 행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순간에 사람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한세아는 별다른 반응도 보여 주지 못한 채 숨만 겨우 내쉬기만 했다.

미친 곳이다.

여기는 사람이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는 곳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곳만이 아닌 다른 곳도···.

나는 검은 수면이 일렁이는 심연을 멍하니 보고 있는 김태진을 노려봤다.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김태진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살기 힘든 세상인데,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대체 이유가 뭐냐고!"

나는 김태진의 행동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할 수도 없었다.

세상이 뒤바뀌고 나서 악인들이 판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 이해하지 못하는 불가해를 보는 기분이었다.

김태진은 나를 보던 시선에서 다시 고개를 내려 심연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처럼.

나와 김태진이 서로 대치한 상태에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내 김태진은 입을 열어 내게 되물었다.

"이유? 이유가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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