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6 - 76. 꼭두각시 (4)
세상이 뒤바뀌기 30일 전.
김태진.
그는 수원역에 있는 편의점 포스기 앞에 서 있었다.
김태진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초조하게 발을 떨며 테이블 위에 놓인 구형 스마트폰만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그때.
띠링!
"제발! 제발!"
그의 스마트폰이 문자음을 토해내며 메시지를 알리자, 김태진은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며 화면을 켰다.
[먼저 저희 회사의 직원 채용에 지원하여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안타깝게도 김태진님께서는 불합격···]
김태진은 문자 내용을 거기까지만 보고 화면을 껐다. 어차피 끝까지 본다고 해도 그가 원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을 테니까.
"하아···."
그는 힘없이 포스기 옆에 놓여 의자에 앉았다가 황급하게 정신을 차리며 다시 일어났다.
의자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그저 장식용에 불과했다. 게다가 자신이 앉아 있는 모습을 편의점 사장이 질색을 하며 싫어 했기 때문에 괜히 욕먹기 싫으면 항상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어야 했다.
'인간답게 살아라. 태진아.'
그는 고아원에서 나오기 전에 원장님이 신신당부하며 한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인간답게 사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원장님···."
한숨만 푹푹 쉬고 있을 때.
딸랑딸랑-
편의점 문에 설치된 문열림 종이 몸을 흔들며 방울 소리를 냈다. 손님이 왔다는 소리에 김태진은 문 쪽을 바라보았고, 티 나지 않게 얼굴을 구겼다.
불콰한 얼굴을 한 중년의 남성.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술에 취한 사람은 높은 확률로 진상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어이, 알바 놈. 담배 한 갑 줘."
"넵. 뭘로 드릴까요?"
"거 뭐냐, 파란색. 파란색으로 줘 봐."
김태진은 손님의 요구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게,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는 색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뭐 해? 담배 달라고."
"그 이름을 말씀해주셔야···."
"이 새끼 답답하네. 아 저거 달라고! 저거!"
아니나 다를까. 김태진의 답답한 행동에 손님의 호통이 바로 이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중년남성이 원하는 담배를 직접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는 점일까.
그는 서둘러 담배를 꺼내 중년남성의 손에 쥐여주었다.
"아! 넵! 여기 있습니다!"
"멍청한 새끼. 이거 하나 제대로 못 하니까 편의점 아르바이트나 하는 거야. 알아?!"
"죄송합니다!"
불합리한 말이었지만, 김태진은 그저 고개를 푹 숙여 사과를 입에 담았다. 자기 교대가 빨리 오기만을 바라면서.
"나 때는 말이야. 왕인 손님이 조금만 움직여도 득달같이 달려가서 부르셨습니까! 했다고. 어? 네가 아무리 알바라고 해도 여기서 일하는 놈 아니냐? 돈 받고 일하는 놈이 손님의 의중을 미리미리 눈치채야 돈을 받을 자격이 생기는 거지. 어? 그런데 너는 이 새끼야. 내가 직접 달라고까지 말했는데 그냥 멀뚱멀뚱. 어? 보는 사람 속 터지게 그냥 멀뚱멀뚱! 이 새끼야! 어휴! 속 터져!"
"···죄송합니다!"
"이 세상은 말이야. 네 생각처럼 그렇게 순탄하지가 않다고. 어? 요즘 밥 벌어먹기 쉬운 줄 아냐? 이 세상은 전쟁터라고. 여기서 알바나 하는 네깟놈이 뭘 알겠냐마는, 지금 내가 하는 말 가슴 깊이 새겨 놓으란 말이다.
아니다. 내가 지금 말도 안 통하는 놈이랑 무슨 대화하겠냐. 똑바로 행동이나 해라. 너 내가 지켜본다. 나 여기 사장이랑 친한 사이라고. 알겠어? 잘리기 싫으면 처신 잘해라. 어?
"
"죄송합니다!"
중년남성은 밖으로 나가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래서 편의점 알바놈들은···. 쯧쯧."
중년남성의 시끄러운 소리가 사라지자 편의점은 조용해졌지만, 김태진의 머릿속에서는 원장님과의 마지막 대화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태진아. 명심하렴. 우리같은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손가락질받는 게 요즘 세상이야.'
'······.'
'그러니 우리는 항상 몸가짐을 조심히 해야 한단다.'
'어떻게요?'
'인간답게.'
'인간답게요···?'
'그래. 인간답게 살아가렴. 우리 태진이는 어른스러우니까 잘할 수 있을 거야.'
'네!'
제가 틀렸습니다. 원장님.
모르겠습니다.
인간답게 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김태진.
그의 세상은 어느 순간부터 무채색이었다.
처음에는 단순 피로에 의한 증상인가 싶었지만 병원을 가 봐도 의사는 모르겠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럼 뭐 어쩌겠는가.
의사도 모른다는 것을 혼자서 고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냥 그대로 사는 수밖에.
교대를 마치고 비좁은 원룸으로 돌아온 그는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고 낡은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실행했다.
지금 이런 행동이 현실 도피나 다름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태진은 게임을 일상의 한 축으로 만들었다.
적어도 게임 안에서만큼은 그가 무슨 짓을 해도 허용된다는 사실이 김태진을 게임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적어도 게임 안에서만큼은 남들이 그를 차별 없이 온전하게 본다는 사실이 김태진을 게임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비록 화려한 이펙트도 전부 회색빛으로 보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괜찮았다.
적어도 김태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일상이 변하지 않고 쭉 이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쾅쾅쾅!
···그의 전여친이 문을 시끄럽게 두드리기 전에는 말이다.
"오빠! 나야, 혜진이. 문 좀 열어봐.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하아···."
김태진은 거친 한숨을 내뱉고, 기운없는 발걸음으로 문을 향해 움직였다.
쾅쾅!
"문 좀 열어 보라고!"
벌컥!
그가 문을 여니 순진한 인상의 여자가 초조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여자는 김태진을 보자마자 이곳에 온 용건을 꺼냈다.
"오빠! 방에 없는 줄 알았잖아. 왜 이렇게 늦게 나와?"
매 순간 거짓말을 일삼는 여자의 행태에 질려 헤어졌던 전여친.
"여기는 왜 왔어? 우리 깔끔하게 정리한 줄 알았는데."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야. 뭐 해? 나와서 인사해."
여자는 자기 뒤에 숨어 있던 어린 여자아이를 앞세우면서 말했다. 체구가 왜소한 여자아이는 기가 죽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쥐꼬리만 한 소리로 간신히 입을 여는 어린아이.
"오빠 딸이야."
"뭐?"
"오빠 딸이라고."
김태진은 순간 그가 잘못 들었나 싶은 마음에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여자의 대답은 같았다. 그는 오랜만에 당황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딸? 딸이라고?'
김태진은 여자의 옆에 서 있는 아이를 보았다. 자신과 닮은 곳이라곤 머리카락이 검다는 것 하나뿐.
그리고 그 아이는 눈치를 심하게 보며 훌쩍거리는 울음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인간답게 살아라. 태진아.'
"오빠 딸이라니까? 왜 말이 없어? 지금 내가-"
"그래."
"···뭐?"
"알았다고.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나지막한 김태진의 말에 여자는 얼굴에 화색이 돌며 자기 목적을 다다다 쏟아 내기 시작했다.
"역시 오빠는 말이 통한다니까? 그럼 딱 한 달만 맡아줘. 그 뒤는 내가 다시 데려갈게. 그래줄 수 있지? 지금까지 나 혼자 키웠으니까 한 달 정도는 맡아줄 수 있잖아. 일단 식비는 이걸로 때워. 나 곧 약속 시간이라 빨리 가 봐야 해."
여자는 김태진에게 흰 봉투를 내미는 것과 동시에 여자아이를 앞으로 밀쳤다. 아이는 넘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균형을 잡고 김태진의 허릿춤을 잡았다.
"야. 아빠 말 잘 듣고 있어. 안 그러면 또 혼날 줄 알아."
"······."
"대답 안 해?!"
"······네."
"쯧. 오빠. 그럼 잘 지내고. 한 달 뒤에 보자. ···아예 안보면 더 좋고."
쾅!
여자는 그 말을 끝으로 문을 닫고, 빠르게 건물 밖으로 나갔다.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여자는 매우 서둘렀다.
아쉬움에 뒤를 돌아볼 법도 하건만. 여자는 결코 고개를 돌리는 일이 없었다.
김태진은 자기 손에 들린 흰 봉투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그 여자는 여전히 거짓말이 일상이었다. 아무도 믿지 않을 말들을 내뱉는 것은 여전했다.
그도 그 사실들을 알고 있었지만,
오래 생각하지 않고 반쯤 충동적이었지만,
김태진은 일단 아이를 방으로 들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인간답게 살아라. 태진아.'
뇌리에 계속 울리는 원장님의 말씀을 애써 털어내면서, 그는 손을 꼼지락거리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
"···안녕."
"네에. 안녕하세요···."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
"은지···. 강은지예요···."
김태진은 흰 봉투를 책상에 대충 던져두고 강은지와 시선을 맞췄다. 기껏 맞춘 시선이 무색하게 강은지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꼬르륵-
그리고 아이의 배꼽시계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렸다. 강은지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땅에 닿을 정도로 숙였다.
"그래. 은지야. 일단 밥부터 먹자."
그는 짐짓 자신만만한 어투로 말을 했으나, 김태진의 방에는 당장 먹을 거라고는 라면 몇 봉지뿐이었기에 그는 타칭 그의 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라면도 먹을 수 있어?"
"라면 좋아해요···."
자세히 봐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작게 고개를 끄덕인 강은지.
아이의 허락을 받은 김태진은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한 후 냄비에 물을 올렸다.
보글보글-
라면의 자극적인 냄새가 방에 퍼지자 어느새 다가온 강은지가 그의 옆에서 김이 올라오는 냄비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라면이 다 끓여졌을 때.
"후우! 후우!"
후루룩-!
강은지는 배가 어지간히도 고팠는지 눈치를 보던 것도 멈춘 채 면발을 정신없이 입에 밀어 넣었다.
김태진은 그 모습을 보며 아이가 혹여 목이라도 막힐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물 한 컵을 책상 위에 올려주며 물었다.
"···맛있니?"
끄덕끄덕
강은지는 처음보다 좀 더 기운있는 고개짓을 했다.
어느새 라면을 다 먹은 아이는 다시 눈치를 보기 시작하며 통통하게 오른 배를 살살 두드렸다.
'오늘 마가 끼었나?'
'···배부르다. 내일도 밥 주나?'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김태진과 타칭 그의 딸 강은지의 첫 만남은 식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생각보다 불편한 동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