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7 - 77. 꼭두각시 (5)
세상이 뒤바뀌기 29일 전.
다음날 아침.
짹! 째잭! 짹!
김태진은 새가 시끄럽게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그리고 팔이 무거운 느낌에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작게 코까지 골며 잠에 빠진 강은지의 모습을 보며 그는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식사를 마친 후 너무 꼬질꼬질한 아이를 씻기기 위해 화장실로 데려갔으나, 강은지는 무언가를 무서워하며 들어가기를 거부했었다.
생각보다 격한 거부 반응에 차마 씻겨 주지는 못하고 혼자 할 수 있냐고 물어보니 강은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었고.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강은지의 몸에는 작은 멍들이 있었기 때문에 남에게 상처를 보여주기 싫어했던 것이었다.
"힉!"
잠에서 깬 강은지는 그와 눈을 마주치자 새된 비명을 흘렸지만, 이내 김태진이 한 말에 안정을 빠르게 되찾았다.
"밥 먹을까?"
"···네."
아직 서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야 같이 밥을 먹으면 언젠가 친해지겠지.
좁은 방 안에 어린아이라도 사람이 하나 추가가 되자, 서로 눈치를 보며 불편한 상황이 자주 찾아왔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빠르게 적응했다.
아이는 자신을 잘 대해주는 사람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다고 하던가.
그 말 그대로 김태진이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강은지는 그에게 금방 마음을 열었다.
***
세상이 뒤바뀌기 20일 전.
시간이 계속 흘러 강은지가 김태진의 방에 온 지 10일째 되는 날.
아이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아빠라고 불러도 돼요······?"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그래."
아이는 아빠라는 호칭을 허락한 김태진을 보며 처음으로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은지가 해맑게 웃자, 그의 마음속에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을 받으며 주변의 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충족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은 조각에서 일어난 파문이 남자의 텅 빈 마음을 가득 채웠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이 무채색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세상은 색을 되찾았다.
그는 더 이상 강은지를 타칭 그의 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의 세상에 처음으로 소중한 존재가 자리 잡았다.
그는 사회에 내던져진 이후로 처음으로 행복감을 느꼈다.
그의 세상은 더이상 게임이 필요치 않았다.
***
세상이 뒤바뀌기 5일 전.
수원역 근처 골목에 있는 고깃집에 김태진과 그의 친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글지글-
"야. 네 소식 들었다. 그년이 너한테 애 아빠가 누군지도 모를 아이를 맡기고 도망갔다며?"
"내가 아빠야."
"어이고. 그러세요? 네가 어떻게 걔 아빠냐? 바보같이 그걸 믿으면 어떡해? 아니면 너랑 그년이랑 같이 자기라도 했냐?"
그의 친구는 술을 연거푸 들이켜 불콰해진 얼굴로 김태진을 타박했다.
얼핏 걱정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의 친구의 속내의 한 켠에는 김태진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에 진짜 잠만 잤을 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괜찮았다. 누가 뭐래도 은지는 그의 딸이니까.
"야야! 그러지 말고 한잔 하자. 어? 이거 쭉 들이키고 속풀이해라. 이때 아니면 언제 하겠냐?"
"아니야. 난 됐다."
"사나이 김태진이! 이거 다 죽었네. 네가 술을 마다하고?"
"···딸이 술 냄새를 무서워하거든."
"얼씨구. 아주 그냥 딸바보 납셨네 납셨어! 됐다 임마! 나 혼자 마시지, 뭐."
그의 친구는 술잔을 김태진에게 거듭 내밀었지만, 그가 계속해서 거부하자 혀를 차고는 병나발을 불었다.
'인간답게 살아라. 태진아.'
김태진은 술에 잔뜩 취한 그의 친구를 바라보다가 벽에 걸린 시간을 보았다. 어느새 오후 10시에 가까워진 시간에 그는 그가 앉아 있던 자리를 정리하며 그의 친구에게 말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 난 이만 가 볼게. 너도 술 적당히 마시고. 지금까지 우리가 먹은 건 내가 계산하고 갈 테니까."
"그래, 가라 가! 이 띨띨한 새끼···. 네 몫까지 내가 다 마시고 간다아!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더 줘!"
혀가 꼬부라지는 소리로 술주정을 시작한 친구를 뒤로한 채, 그는 자기 딸이 기다리고 있는 방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문 앞에 도착한 김태진은 옷에 배인 냄새를 빼기 위해 옷을 탁탁 턴 후에 도어락을 열었다.
삑! 삐빅! 삑!
띠로링-
"···아빠!"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딸이 반겨 주는 모습에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것을 느낀 김태진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더 이상 어두컴컴한 방이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
"저 배고파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뭐라도 시켜 줄까?"
"이거 치킨···. 먹어보고 싶어요···."
은지가 한 전단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물쭈물하면서 말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참지 않고 말하는 딸의 모습에 김태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염없이 참기만 하다가는 마음에 병이 생기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직접 겪어보기도 했고.
"그래. 한 마리 시켜서 같이 먹자."
"네···!"
···비록 먹을 입이 늘어나 그의 통장 잔고가 아슬아슬해졌어도 그는 마냥 행복했었다.
다음날, 그 다음날도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널 저주한다. 세상아.
***
세상이 뒤바뀐 날로부터 ??일이 흐른 날.
김태진과 강은지는 수원역 편의점에서 눈을 떴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려다 흠칫하며 몸을 굳혔다. 김태진의 머리에는 복슬복슬한 털이 난 귀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뭐야?"
김태진은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그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그의 딸, 강은지를 찾는 것.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그의 옆에 있어야 할 은지를 급하게 찾았고, 이내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은지야!"
"으응···?"
"다행이다. 다행이야···."
김태진은 아직 잠이 덜 깨 보이는 딸을 안으며 얼굴을 연신 쓰다듬었다. 강은지도 짐승의 귀와 꼬리가 달려있었지만, 그런 사실은 김태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진 않았으나, 살아만 있다면 그게 무엇이 중할까.
구형 스마트폰은 고장이 난 것인지 배터리가 다 닳은 것인지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김태진이 정신을 차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편의점 바깥에서 바닥을 거세게 울리는 군홧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김태진은 바싹 긴장하며 바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방독면을 쓴 디지털 군복을 입은 사람들.
그들이 사주경계하며 편의점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은지야! 일어나 봐!"
"5분만···."
김태진은 엄습한 불안감에 강은지를 깨워 보려고 했지만, 군인들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는 게 더 빨랐다.
벌컥!
제일 선두에 있는 군인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는 그와 그의 딸을 보며 무전기를 켰다. 총구를 내려놓지 않은 채로.
"아아. 여기는 편의점. 여기는 편의점. 생존자 둘 발견했고 물자 무사하다고 알림."
- 치직···생존자 치지직··· 상태는 양호한지···칙
"아. 잠시 대기."
병장 계급 약장을 달고 있는 군인은 무전기에서 손을 뗀 후 김태진에게 물었다.
"상태 괜찮으십니까? 어지러움이나 메스꺼움, 그 외 다른 부상 입으셨습니까? ···아니면 물리셨다거나."
"아뇨. 저랑 제 딸은 다친 곳 없습니다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죠?"
"훅훅! 여기는 편의점. 생존자 상태 양호하다고 알리는구나. 이상."
-치지직···알겠다는구나···칙···간단한 상황 설명 후 캠프로 데려오기 바람···치지직···
"아. 양호."
병장은 통신을 마치고, 김태진을 바라보았다.
- 치직··· 여기는 8번 게이트···치치직- 감염자 최소 열둘 발견했다고 알림···거리 이백-치직- ···처리 치직- 후 경계 지속할 치직- 것 이상
방독면에 얼굴이 가려져 있어 눈을 볼 수는 없었지만 병장이 그와 그의 딸을 살펴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병장이 입을 열었다.
"창식아. 너는 여기 물자 좀 정리하고. 아, 대식이 너도 창식이 도와라. 나는 이분들 캠프로 모셔다 드리고 돌아올게."
"네! 김 병장님, 조심하십쇼."
"오냐. 너희도 방심하지 말고 경계 똑바로 하면서 정리하고 있어라."
"너무 걱정 마십쇼! 저희가 또 할 때는 잘하지 않습니까."
"하여간, 말이나 못하면. 나 간다."
상병과 일병에게 일련의 지시를 마친 김 병장은 김태진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두 분 다 저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캠프가 있습니다."
"생존자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선 따라오십쇼.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설명은 가면서 해드리겠습니다."
완전 무장한 군인들을 사회에서 볼일이 얼마나 있을까.
전쟁? 테러?
김태진은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군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김 병장은 수원역 AK&몰로 향하면서 김태진에게 지금 사회에 일어난 일을 아는 만큼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우선 저희 쪽도 아는 게 많지 않습니다. 애초에 저흰 아래에서 올라온 상황이라 사태 파악이 덜 된 상황이기 때문에···. 일단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나라가 뒤집어졌다는 것뿐입니다. 특히 서울 쪽이 그렇습니다. 행정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 말입니다. 행정뿐만이 아니긴 하지만요."
김태진은 강은지를 고쳐 안으며 김병장에게 물었다.
"···전쟁인가요?"
"모르겠습니다. 함부로 말씀드릴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하고요. 기밀 이런 게 아니고 정말로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덜 됐습니다. 대대장님이 서울에 있는 부대에게 계속해서 교신을 시도하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아직까지 무응답인 걸 보면···."
김 병장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김태진은 머리에 솟은 짐승 귀가 쫑긋거리는 어색한 감각을 느끼며 말했다.
"그럼 이미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랑 제 딸에 짐승 귀랑 꼬리가 생긴 게 그 영향인가요? 그, 김 병장님에게도 이런 게 생겼어요?"
"···저는 귀뿐만 아니라 온몸에 털도 수북하게 났습니다."
"아."
김 병장은 머뭇거리다가 어두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방독면을 쓰고 있는 건가?'
물론 그 이유는 아니겠지만, 김태진은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한순간에 어색해진 분위기에 김태진은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김 병장이 손을 들어 올리며 제지했다.
"쉿! 이제부터는 조용히 하십쇼. 그것들이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들?"
김태진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타타타타탕!
탕! 타타탕!
[끄르르르아악!]
사방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기괴한 소리와 함께.
"······!"
김태진은 귓가를 강하게 강타한 사격음에 앞으로 안고 있는 강은지를 더 강하게 안았다. 그는 김 병장에게 따지듯 물었다.
"뭐, 뭡니까! 갑자기 왜 총소리가!"
"일단 뛰십시오! 그것들은 속도가 느려서 달리면 저희를 따라잡지 못할 겁니다!"
김 병장은 고개를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며 총의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딸깍···
김태진, 강은지, 김 병장으로 이루어진 일행은 수원역 AK플라자 건물로 진입했다. 그리고 김태진은 플라자 외벽 통유리를 통해 바깥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길거리에 널려 있는 시체들,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는 차들, 비정상적으로 커진 나무들.
···그리고 움직임이 어색한 무언가.
무질서하게 정차된 차들을 바리케이드로 삼은 군인들이 무언가를 향해 총을 인정사정 없이 발포하고 있었다.
타타타타탕! 탕! 탕-!
"머리! 머리를 노려!"
"얌마! 단발로 쏘라고! 팔 다리 맞춰봤자 의미가 없다고 했잖아!"
[갸아아악! 기에에엑!!]
[끼에에에엑!]
[끄르르륵···!]
수원역을 향해 몰려들고 있는 무언가는 총알을 맞고 우수수 죽어 나가고 있었다. 죽은 것이 확실할 것이다. 바닥에 누운 그것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요···."
"좀비 영화 보신 적 있으십니까? 저희는 그거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좀비라니. 사람. 사람 아니에요? 지금 당신들이 죽이는 게-!"
"아닙니다. 절대로 사람이 아닙니다. 멀리서 보셔서 당황스러울 수 있겠지만, 가까이서 보신다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캠프로 이동하는 것에만 집중해 주십시오."
김태진은 한층 더 혼란스러워졌지만, 그의 품에서 느껴지는 딸의 온기에 빠르게 정신을 되찾았다.
그래. 다른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어.
김태진은 착잡한 심경이 들었지만,
그의 손에 조그마한 강은지의 손이 잡혀 있기만 한다면.
그는 괜찮았다.
이윽고, 김태진의 일행은 캠프에 도착했다.
대략 서른 명 정도의 생존자와 중대급의 병력들이 매장 안에 있던 텐트를 치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도 교신이 안 돼?!"
"여전히 무응답입니다!"
"아오! 대충 이쯤에서 합류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연락이 안 되니 원. 그럼 우리가 타고 온 두돈반은?"
"그것도 시동이 안 걸린답니다!"
"시팔 진짜. 지랄났네. 멀쩡하던 게 왜 그것도 갑자기 병신이 된 거야? 다른 부대랑 통신도 끊기고, 차량 시동도 안걸리고 갈수록 태산이네. 에라이!"
"···장 하사님."
"왜 임마!"
"그럼 저희 서울까지 걸어갑니까? 다른 지원없이?"
한 병사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캠프는 침묵에 빠졌고, 장 하사라고 불린 이가 이내 입을 열자 그 침묵은 깨졌다.
"그래야지, 뭐 별수 있겠냐. 그냥 행군한다고 쳐! 아니면 뭐 탈영이라도 하게?"
"하지만 저 괴물들이 계속 몰려오면···."
빡!
"악! 아픕니다!"
"아프라고 한 거야. 임마!"
장 하사는 우울한 목소리를 내뱉는 병사의 등을 후려쳤다.
"너무 걱정 마라. 우리한테는 총이 있잖냐. 너희 VR이나 총 게임 해봤지? 그거라고 생각하면 편해. 원래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 어쩔 수 없잖냐. 그리고 너희만 가는 것도 아니고, 나도 같이 가잖아. 게다가 곧 다른 부대랑 합류할 예정이니까 죽을 일은 없을 거다. 너희들이 위험에 처하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 준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마라. 알겠나!"
"···넵!"
"목소리 봐라, 더 크게! 알겠나!"
"네!!"
부사관과 병사가 나누는 대화를 지켜보던 바로 그때.
누군가 김태진의 어깨를 톡톡 쳤다.
그가 옆을 바라보니 김태진을 캠프까지 안내한 김 병장이 보였다. 김 병장이 김태진에게 쌍원경을 쥐여주며 아래를 보라고 말했다.
김태진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군용 쌍원경을 눈에 가져다 대었고, 이내 헛숨을 들이켰다.
"보이십니까? 그것들의 모습이."
김태진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군인들이 좀비라고 부르는 그것들의 모습을.
기괴한 괴성을 내뱉는 그것.
몸에 이상한 껍질이 붙어 있는 그것.
눈에 살의만 깃들어 군인들을 공격하는 그것.
김태진은 그제야 그것들이 정말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 있기만 했을 뿐, 이해는 하지 못했다.
김태진이 알고 있는 정보는 턱없이 적었으며, 아무리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일단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던가.
"그래도 전에 사람이었다는 건 틀리지 않잖아요···. 어떻게 저렇게 쉽게 죽일 수가 있어요?"
"위에서 무조건 발포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리고···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생각보다 수월했습니다. 저희가 살려면 어쩔 수 없기도 했습니다."
나지막하게 말하는 김 병장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떨림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탓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그냥 좀 혼란스러워서요."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그럼 이거 받으시고, 따님분이랑 드십쇼."
김 병장은 쌍원경을 돌려받고, 김 병장이 들고 온 배급 주머니를 내밀었다.
"아빠···."
어느새 일어난 강은지가 그의 허리춤을 잡아당기며 불렀다. 김 병장은 그 모습을 한번 보더니 다시 편의점으로 향하는 듯 발길을 돌렸다.
"어어. 딸. 깼어? 어디 아픈 곳은 없지?"
"웅···. 아픈 데는 없는데···. 나 머리에 뭐가 났어."
강은지가 자기 머리에 솟은 동물 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김태진은 딸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기 귀를 보여 주었다.
"아빠도 우리 은지랑 똑같은 거 생겼는데. 느낌이 많이 이상해?"
"아니! 귀여워! 동물 귀!"
"그래. 우리 딸도 귀엽다."
그와 그의 딸이 서로를 안심시켜 주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머지않은 곳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야!"
캠프에 울려 퍼지는 중년 남성의 고함 소리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그곳에는 중년 남성과 한 병사가 배급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야! 이거를 누구 코에 붙이라는 거야?! 지금 나한테 짐승 귀가 달렸다고 내가 우스워 보여?"
"선생님, 그게 아니고···."
"아니기는 이 새끼야! 군바리 새끼가··· 말대꾸?!"
"사태가 언제 끝날지 모르니 지금부터 식량을 조절해서 배급한다고 협조 부탁드렸잖습니까."
중년 남자는 상병 계급장이 붙은 병사에게 무시무시한 기세로 고함을 질러댔다.
"잔말 말고, 더 내놔. 나는 배가 고프면 잠을 못 잔다고!"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선생님. 뒤에 분들도 기다리고 계시구요."
"요? 요오? 그리고 지금 나한테 빨리 꺼지라고 꼽주는 거냐? 그런 거냐고."
중년 남성은 낯이 익은 사람이었고, 김태진의 머릿속에 원장님의 말이 울렸다.
'인간답게 살아라. 태진아.'
그리고 중년 남성을 한동안 바라보던 김태진을 장 하사라는 부사관이 불렀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새로 오신 분이시라고?"
"아, 네."
"옆에는 따님?"
덩치 큰 장 하사가 김태진의 뒤에 숨은 강은지를 보며 물었다. 강은지는 낯선 사람이 무서운지 김태진의 등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네. 제 딸입니다."
"하하. 참 귀여운 따님이시네요. ···뭐, 캠프가 좀 소란스럽지요? 그 부분은 제가 대신 사과 드리겠습니다."
"아뇨아뇨! 그걸 왜 하사님이 하세요. 저흰 별로 신경 안쓰니 그러지 마세요."
장 하사와 김태진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배급줄에서 시작된 실랑이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실랑이는 오래가지 못할 듯했다.
뒤에서 참다못한 다른 생존자들이 중년 남성을 질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저기요! 아저씨! 적당히 하고 줄에서 빠져요! 뒤에 사람들 기다리는 거 안 보여요?
"뭐? 이 어린 놈의 새끼가. 말 다 했어?"
"미친 틀딱 새끼가. 귀가 벌써 막혔나. 빨리 꺼지시라고!"
한 명이 중년 남성을 질타하자, 연이어 뒤에 있던 시민들이 합세해 중년 남성을 욕하기 시작했다.
"그래요! 이 사람 말이 맞아요! 언제까지 고집부릴 거예요?"
"맞소! 이 학생 말이 틀리지 않았소. 적당히 하시오! 보는 사람이 다 부끄럽고만. 나이는 먹을 대로 먹은 것처럼 보이는 양반이. 쯧쯧."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 동시에 중년 남성을 욕하자, 중년 남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거친 발걸음으로 병사의 손에 들린 배급 주머니를 낚아채 갔다.
'인간답게 살아라. 태진아.'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장 하사가 김태진에게 말했다.
"지금 저희가 모든 걸 통제해드릴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바로 위로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라서요. 그러니까 선생님께서는 따님분이랑 여기서 버티고 계십쇼. 소요 사태는 금방 진정될 겁니다. 댁이 근처시면 모셔다 드리고 싶지만 지금은 여기 캠프에 있는 게 훨씬 안전할 겁니다. 혼자보다는 여럿이 낫기도 하고요."
장 하사라고 불린 부사관은 그 말을 끝으로 군인들과 함께 서울로 행군을 시작했다.
그 뒤로 수십 일이 지났고.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당신들을 증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