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78화 (79/497)

Chapter 78 - 78. 꼭두각시 (6)

군인들이 떠나자 이곳에 남은 생존자들은 각자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통제를 하고 있던 와중에도 서로 하나라도 더 가져가겠다고 싸우던 그들이었으니, 그들의 행동을 제지할 병사들이 사라지자마자 하늘을 모르고 설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겨우 안정되어가던 캠프는 언제 그랬냐는 듯 혼란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지키는 사람이 없는 명품들을 자기 것인 마냥 주워 와 온몸에 치장한 사람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힘들게 구해 온 식량을 힘으로 뺏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말이 통하지 않자 주먹다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이라도 군인들이 말한 것처럼 식량을 조절해서 소모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한 그들의 의견은 묵살당했다.

존중받고, 이해받기는커녕 그들은 배척당했다.

결국 비교적 정상에 가까웠던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하나둘씩 캠프를 떠나기 시작했다.

김태진도 그들을 따라 떠나고 싶었지만, 어린 아이를 데리고 나가기에는 밖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김태진이 감당할 수 없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외부로 나갈 용기는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 혼자가 아닌 그의 딸아이도 같이 움직여야 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캠프도 마냥 안전한 것도 아니었지만.

날이 갈수록 밤공기가 싸늘해졌다.

불을 키면 이상한 가루가 불을 강제로 꺼트렸다. 추위에 떠는 사람들은 점차 예민해졌다.

날이 갈수록 괴물들의 수가 많아졌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나갔던 사람들의 복귀자 수가 눈에 띄게 적어졌다. 나가서 식량을 구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더 이상 자원자가 전처럼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괴물들의 습격이 잦아졌다.

각 층의 에스컬레이터 끝에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가구들을 마구잡이로 쌓아 만든 벽이었지만, 막혀 있는 느낌을 주는 바리케이드를 보며 사람들은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다.

날이 갈수록 괴물들이 강해졌다.

전보다 빨라진 움직임과 전보다 강해진 괴력으로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캠프로 침입한 괴물들 탓에 여러 사람이 죽었다. 가까스로 난간으로 밀어 떨어트렸지만, 애써 모은 물자 대부분이 파괴되어 그 가치를 잃었다.

날이 갈수록 모든 상황이 암울해져만 가고 있었다.

건물을 쪼갤 정도로 강한 지진이 캠프를 연이어 강타했다. 그나마 정상적인 사고를 하던 사람들은 떠나거나 죽었고, 이기적인 것들만 살아남았다.

***

"아빠. 나 배고파···."

강은지가 김태진의 허리춤을 약하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김태진은 당장에라도 딸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싶었지만, 식량은 어제 딸과 나눠먹은 초코바 하나가 끝이었다.

백화점에 자리 잡은 캠프라는 것이 무색하게 기이할 정도로 남아 있는 물자가 없었다.

김태진이 최근에 들은 이야기 중 하나는 나무 껍질을 달고 있는 괴물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식량마저 먹어 치우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캠프의 인원들에게 외부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던 남자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김태진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바로 그때.

"안녕."

"힉!"

적색 장발과 등에 커다란 날개를 가진 낯선 여성이 강은지에게 말을 걸었다. 낯선 사람이 말을 걸자 화들짝 놀란 강은지는 호다닥 움직여 김태진의 등 뒤에 숨었다.

김태진도 강은지를 뒤로 숨기며 낯선 여자를 경계했다.

그가 이 여자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고는 그녀가 기껏 구해 온 식량을 다른 사람한테 뺏겼다는 것뿐이다.

낯선 여성은 아이와 시선을 맞춰주며 날개 사이에 숨기고 있던 칼로리바 2개를 강은지에게 내밀었다.

"친구는 이름이 뭐야? 배고프면 이거 먹을래?"

"으, 은지. 강은지예요."

뒤에 숨은 강은지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를 냈고, 이내 김태진을 바라보며 말없이 허락을 구했다. 김태진은 가슴이 아린 느낌과 함께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은지는 배가 많이 고팠는지 허겁지겁 칼로리바를 해치웠다.

'인간답게 살아라. 태진아.'

원장님의 말이 김태진의 머릿속에 맴돌다 사라진다.

"···감사합니다."

"에이. 뭘요. 아이가 배고프다는데 언제까지고 숨기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우린 어른이니까."

"감사합니다···. 정말로."

김태진이 적발 여성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감사 인사뿐이었기에 그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언제까지 여기 계실 거예요?"

불쑥, 적발 여성이 그에게 물었다.

"네?"

"그동안 지내봐서 아시잖아요. 여긴 답이 없어요. 어제 제가 식량 뺏기는 거 보셨죠?"

"그때 도와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

"아뇨! 사과를 바란 게 아니에요. 그냥 '여기 있어 봤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다' 라는 말하고 싶었어요."

"······."

"저는 여기 떠날 거예요. 해가 뜨자마자 즉시. 그쪽은요?"

"저는···. 여기서 나가도 갈 곳이 없어요. 제 딸이랑 같이 밖에 돌아다니는 괴물들 피할 자신도 없고요···."

김태진도 적발 여성이 말하는 의미를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녀처럼 용감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김태진은 하늘을 가르고 땅을 뒤집는 게임 캐릭터처럼 강하지 못했다.

오히려 작고 왜소했다.

게임처럼 괴물을 잡으면 강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싸우면 싸울수록 몸이 지쳤다.

게임처럼 공격 불가인 안전지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캠프 안에서도 싸우다 죽는 일이 허다 했다.

게임처럼···.

게임처럼.

···현실은 게임이 아니었다.

'만약 내가 게임에 빠지는 게 아닌 운동을 했다면 이러고 있지는 않았겠지? 뭔가 달랐겠지?'

김태진은 매 순간 후회했지만 상황은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적발 여성은 그의 거절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

다음날 아침.

김태진은 적발 여성의 모습을 캠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그녀가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기를 빌어 주었다.

적발 여성에 대한 걱정은 잠시뿐이었고, 자기 살길 바쁜 김태진은 그와 그의 딸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식량을 구하러 나가야 했다.

그 뒤로 많은 일이 있었지만 괜찮았다.

길거리의 괴물들에게 쫓기는 상황을 겪어도 그는 괜찮았다.

숨어 있던 괴물에게 공격당해 겨우 살아남았어도 그는 괜찮았다.

기껏 구한 식량을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뺏길 뻔했어도 그는 괜찮았다.

무너지는 건물 잔해에 깔려 부상을 입었어도 살았으면 되었다는 생각에 그는 괜찮았다.

죽을뻔한 위기가 수차례 김태진을 덮쳤지만 강은지만 살아 있다면 그는 괜찮았다.

그나마 안전한 캠프로 돌아오면 그의 딸이 반겨 주었기 때문에.

그는 정말로 괜찮았다.

***

김태진은 이곳이 생존자 캠프인지 동물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등에 커다란 날개가 달린 사람, 온몸에 털이 수북하게 난 사람, 날카로운 손톱을 가지게 된 사람, 뾰족한 송곳니가 길게 자란 사람, 머리에 짐승 귀가 달린 사람.

사람 말을 내뱉는 걸 보면 인간인 것은 분명한데,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는 듯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 ━━━. ━━━━."

"━. ━━━━━━!"

그도 어딘가 망가진 것일까.

김태진도 저들이 무슨 말을 해서, 싸움으로 번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저 싸움의 피해가 자신에게까지 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그날은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여전히 밖은 위험했고, 캠프 안의 생존자들은 시끄럽게 말다툼을 하거나 서로에게 주먹다짐을 했다.

김태진은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딸에게 먹일 식량을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했다.

"아빠. 오늘도 나가?"

"응. 배 많이 고프니? 조금만 참아. 금방 다녀올게."

"···조심해야 해?"

강은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김태진에게 말했다. 그는 딸이 안쓰러웠다. 어린 나이에 철이 너무 일찍 들었기 때문에.

어리광을 좀 더 부려도 괜찮을 텐데, 세상이 변해 버린 지금 상황은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김태진은 쓰게 웃으며 강은지에게 답하려고 했다.

"여기서 잘 숨어 있어. 금방 갔다올-"

······바로 그때였다.

드드드드드드!

쩌저저적!

거센 땅의 흔들림과 함께 건물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은.

"어어?"

"아악!"

요근래 지진이 잦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강한 지진은 처음이었다. 김태진은 당혹성을 토해내며 서둘러 강은지를 품에 꽉 안았다.

"뭐야?!"

"나 좀 올려 줘! 제발!"

캠프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혼란으로 가득 찼고, 김태진은 실시간으로 건물 바닥이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사람들이 빠지고 있는 것 또한 볼 수 있었다.

어느새 건물 밑바닥에 생긴 깊은 구덩이로.

"헉!"

김태진은 재빨리 이곳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벗어나려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고, 유일한 출입구가 번잡스러워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쩌저저저적!

건물 바닥은 시간이 갈수록 수많은 금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김태진의 발밑까지 금이 생긴 것을 본 그는 서둘러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비켜! 다 저리 꺼지라고! 난 살 거야!"

"······!"

중년 남성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밀쳐졌고, 그 밀침에 김태진과 강은지는 아찔한 추락감을 느끼며 심연으로 떨어졌다.

한순간에.

어찌할 바도 없이.

소리도 내지르지 못한 채.

***

······풍덩!

찰박찰박-

[끼이이이이-]

첨벙- 첨벙-

똑- 똑-

「······키킥」 ***

"커헉! 켁! 콜록- 케흑!"

오늘, 그의 딸이 사라졌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지독한 어둠이 가라앉은 이곳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었다.

다만.

주먹을 쥐어 보아도 온기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그는 이제 괜찮지 않았다.

그가 그의 소중한 딸을 잃게 된 날.

그는 더 이상 괜찮지 않았다.

김태진은 다시 색을 잃었다.

김태진은 다시 절망에 빠졌다.

김태진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도 심연에 떨어진 이상 곧 딸을 따라갈 예정이었으니까.

그 높이에서 죽지 않고 아직 살아 있는 게 기적이었다.

그가 바란 건 이런 기적이 아니었건만.

"케흑!"

망가진 몸에서 피가 뭉텅이로 빠져나가 시야가 점점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때.

지하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딸을 다시 보고 싶니?」

김태진은 고개를 힘겹게 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의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있는 것은 오직 어둠뿐.

「딸을 다시 보고 싶니? 네 딸은 더 깊은 곳에서 자고 있단다」 악마가 재차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 딸은 아직 살아있다」 「네 딸은 아직 살아있어」 「딸은 아직 살아있어요」 「강은지. 은지. 너의 딸」 악마의 목소리는 어디서 들리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사방에서 울렸다.

"누구야? 대체 누군데 이따위 장난질을···! 나와! 나오라고! 시바아알! 아아아악!! 나와아아악-! 켁!콜록! 콜록!"

김태진은 지금 들리는 것이 환청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그는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니까. 그리고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 내어 소리쳤다.

그러나 악마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진득하게 속삭이며 김태진에게 무언가를 보여 주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직접.

그가 다른 생각하지 못하도록.

그를 마음대로 다루기 위해 끊이지 않고.

"······!"

김태진은 악마가 보여 준 환상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의 동공이 순간 탁해지면서 김태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힘이 솟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어느새 피는 멎어 있었다.

몸에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강인한 활력이 느껴졌다.

"······이게 무슨. 아니, 제가 어떻게, 무엇하면 되겠습니까. 제발 알려주세요. 제발!"

「제물이 필요해. 싱싱하게 살아 있는 제물이」 검은 입자가 김태진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여기는 게임이라는 게 있구나. 그럼 너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방법을 알려줄게」 검은 입자가 김태진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하루에 최소 하나씩, 기한은 내가 충분하다고 말할 때까지. 보상은 네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딸의 웃음소리란다. 어때. 할 거니?」

검은 입자가 김태진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딸의 웃음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검은 입자는 대단한 부탁을 들어 주는 것처럼 엄숙하게 말했다.

「네 부탁을 들어 주마.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하나가 되면 너는 네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거란다」

"아아!"

「너는 딸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어」

"제가,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검은 입자는 머뭇거리는 것처럼 공기 중에 이리저리 부유하다가 속삭였다.

「어머니. 어머니라고 부르렴」

"···예. 어머니."

그리고 김태진은 검은 입자에 휩싸이며 정신을 잃었다.

그가 정신이 온전했다면, 무언가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텐데.

김태진에게는 그럴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어머니'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였다.

「아아. 어머니라···. 좋은 울림이야···」

「나는」 「만물의 어머니란다」 「꺄하하하하하하하!」

***

김태진이 정신을 다시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왜소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나약하지 않았다.

수원역은 검은 불꽃에 불타 무너져 있었고, 캠프의 생존자들은 한층 더 이기적으로 변해 있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보잘 것 없는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딸, 강은지의 손을 놓치게 만든 중년의 남성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김태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중년 남성이 살아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히죽-

그리고 김태진의 얼굴에 순간 기괴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김태진이 캠프로 돌아왔을 때.

그것들은 그를 잠시 경계했지만, 이내 김태진이 들고 온 식량이 가득 담긴 가방을 보고 눈이 돌아가서 그에게 몰려들었다.

"먹을 거! 먹을 거다!"

"뭐야? 너 낯이 좀 익은데? 다른 사람인가? 아니, 그보다 식량이 있었으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어서 이리로 들어와!"

"야 이 새끼들아! 연장자가 제일 먼저라는 거 몰라? 저리 비켜! 다 꺼지라고!"

그것들은 김태진을 붙잡고 마구 흔들어 댔다.

지금껏 그래 왔던 대로, 남을 보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들.

캠프는 여전했다.

바닥에 수많은 금이 가 있어도 사람들은 여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캠프의 식량이 부족한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여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그는 또 다른 지옥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웃음을 한껏 머금은 김태진은 짐승들을 보며 말했다.

"식량은 충분합니다. 많이 시장들 하실 텐데 다 같이 모여서 식사하시죠. 모자라면 제가 더 가져오겠습니다."

짐승들은 김태진의 말에 희희낙락하며 그를 캠프 안으로 이끌었고, 음식을 배불리 먹은 그것들은 배를 만족스럽게 두드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한동안 깰 수 없는 잠에 빠진 사이.

그것들 모두를 우리 안에 집어넣는데 성공한 김태진은 '어머니'가 그에게 내린 부탁을 완수하기 위해 바닥에 있는 틈을 넓혀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그의 딸이 잠들어 있는.

깊고, 깊은 저 심연을 향해.

그리고 김태진은 하나씩 밑으로 짐승들을 떨어트렸다.

정신을 차린 짐승들은 반항을 했지만, 강인해진 그의 육체에 아무런 타격을 줄 수 없었다.

***

······.

"집에 아이와 남편이 기다리고 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한 번만요! 제발!"

······풍덩!

하나.

'인간답게 살아라. 태진아.'

원장님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다가 사라졌다.

「인간답게 죽여라」 대신 그 빈자리는 '어머니'의 속삭임으로 채워졌다.

···너희를.

"이 미친 새끼야! 이러는 이유가 뭐야!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살려 줘!"

······풍덩!

둘.

'인간답게······.'

원장님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인간답게 죽여라」 '어머니'의 속삭임이 한층 강해졌다.

···너희를 혐오해.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이보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이건 아니야! 이런 행동을 해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단 말일세!"

"···아니. 돌아온다고 하셨다."

"뭐? 대체 누가 그런 미친 소리를! 안 돼! 으아아아악!"

······풍덩!

셋.

'······.'

더 이상 원장님의 말이 기억나지 않았다.

떠올려지지 않았다.

생각나지 않았다.

'아빠! 종이학을 천 개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대!'

다만 그는 어렴풋이 기억나는 누군가의 말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종이학 대신 마네킹으로 6층을 채우기 시작했다.

세상이 뒤바뀌기 전에.

김태진이 그의 딸과 같이 가고 싶었던 장소.

···햄버거집, 놀이방, 노래방, 영화관, 공원.

김태진이 그의 딸과 같이 하고 싶었던 경험.

···나란히 앉기, 하루종일 손잡기, 목말 태워주기, 그네 밀어주기, 행복한 추억 만들기.

그 모든 것들을 마네킹으로 표현했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짐승을 하나 바칠 때마다 마네킹은 늘어만 갔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그가 무엇을 위해 이러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대신.

그 끝에는 '어머니'의 속삭임만이 남았다.

「인간답지 않은 것들을 죽여라. 그것들로 네 딸의 주린 배를 채워주어라」 「그리하면」 「너는 네 딸의 웃음소리를 다시 듣게 될 것이니라」

"당신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어머니."

그렇게 김태진은 꼭두각시가 되었다.

···마음이 텅 비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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