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9 - 79. 꼭두각시 (7)
"이유를 알아서 뭐 하게? 이유가 중요한가?"
김태진은 나를 보는 것도 잠시, 다시금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내가 정당성 있는 이유를 말하면, 너는 만족할 수 있을까?"
"이해를 할 수 있을까?"
"납득을 할 수 있을까?"
"인정하고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못하겠지."
김태진이 연달아서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침묵을 유지했다.
저 남자의 말대로, 나는 무슨 말을 듣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곳에도 지수와 예린이 없다는 걸 안 이상, 지금 당장은 어떻게든 빈틈을 찾아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다.
나에게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지 않던가.
여기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여기에 있다면 그대로 죽고 말 것이라는 것도 알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여기서 벗어나는 것만 생각해···.'
김태진은 내가 시간이 지나도 입을 열지 않자, 혼자서 결론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나는 그저 내가 해야 할 일할 뿐이지. ······그래. 이제 와서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졌어. 난 그냥 '어머니'의 말에 따를 뿐이야."
'어머니? 대체 뭔 소리를···.'
아까부터 영문 모를 소리만 중얼거리는 김태진을 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 당신이 한 일은 사람을 죽인 거라고! 그것도 살아 있는 사람을!"
"글쎄. 여기 모인 것들이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김태진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의 시선이 생존자들에게 닿을 때마다 그들은 몸을 더더욱 웅크렸다.
"배려가 없었지. 대신 이기심이 있었고."
식량이 없었다.
대신 괴물이 있었다.
희망이 없었다.
대신 절망이 있었다.
"뭐, 시답잖은 이야기야. 당장 나조차도 그랬으니까."
사람은 자기 한계를 넘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 시야가 좁아지게 된다. 혹은 정신이 나가 버리거나.
나는 김태진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태진은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다른 생존자들과 마찬가지로 구멍을 하염없이 보며 말했다.
"심연을 너무 들여다보지 마라. 심연을 오래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볼 것이니."
"······."
"내가 했던 게임에 나오는 문구야. 어때?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아? 아니, 심연이 제발 좀 나를 들여다봤으면 좋겠네. 얼굴 좀 보게."
"미친 자식···."
김태진의 말에는 중심이 없었다.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대화 주제가 맞물리지 않고 있었다.
마치 서로 허공에 대고 대화하는 것처럼 두서가 없었다.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어서 혼잣말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김태진을 끊임없이 주시하는 한편,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풋살장 전체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철망.
빠져나갈 수 없는 절망의 상징인 철망.
지금 나와 한세아에게는 철망을 해체할 수 있는 장비가 없었다.
그렇다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저놈이 들어온 입구뿐.
다행스럽게도 풋살장의 입구는 잠금장치가 따로 없이, 그저 걸쇠만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걸쇠는 지금 완전히 풀린 채 입구를 비스듬히 열고 있었다. 김태진이 들어오고 나서 나간 적이 없으니 걸쇠가 풀려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지만 말이다.
'좋아. 일단 출구 자체는 확보했다.'
다음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장비들.
여기서 맨몸으로 도망친다면, 빠르게 도주할 수는 있어도 중간에 나무 인간 같은 괴물을 마주치면 큰 낭패를 볼 것이다.
총은 김태진이 매고 있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적어도 도끼나 유해 막대기 정도는 챙겨야만 했다. 나만이 아닌 한세아도 지키기 위해서는.
'어디. 어딨지?'
나는 풋살장 출입문 너머로 시야를 넓혔다.
RF층인 이곳은 건물 옥상 전체를 쓰고 있어서 생각보다 훨씬 넓은 공간을 자랑했다. 내게는 그다지 좋지 않은 소식이었지만.
나는 제발 머지 않은 곳에 우리들의 짐이 놓여 있기를 바라며 눈을 정신없이 움직였다.
이윽고.
나는 20m쯤 떨어진 벤치 위에 나와 한세아가 들고 있던 모든 것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도끼와 유해 막대기, 도구 가방.
나는 내 옆에 바싹 붙어 있는 한세아를 툭툭 건드렸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한세아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떨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눈을 보니 순간 마음이 약해졌지만, 나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한세아는 지금부터 제일 중요한 일 해야하니까.
나는 그녀에게 턱짓으로 짐이 놓여 있는 벤치를 가리켰다. 한세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목표를 찾았는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손바닥에 글씨를 써 내려갔다.
'제가 놈을 덮칠 테니 그 사이에 세아씨는 밖으로 나가서 무기를 챙겨 와 주세요.'
한세아는 용케 내 신호를 알아들었는지 내 손을 강하게 잡았다가 놓았다.
나는 김태진에게 다시 말을 걸기 시작했다. 혹여 한세아에게 향할 시선을 내 쪽으로 돌리기 위해서.
"게임 문구고 뭐고, 나는 관심 없어. 우리는 여기서 나갈 거다."
"···안 돼. 안 되지.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너희는 내 딸의 친구가 되어 줘야만 해."
"아까도 말했지만 관심 없다고 했다."
나와 김태진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김태진은 고개를 드는 일이 없었다. 이대로 대화를 이어가도 나는 그가 고개를 들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후우. 후우···."
나는 조용히 심호흡하는 한세아를 툭툭 치며 준비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나도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우선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김태진으로부터 총을 멀리 떨어트려 놓는 것.
그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비록 첫 조우전에서는 맥없이 당했지만, 나는 다시 한번 강해진 내 근력을 믿어보기로 했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세아씨! 지금!"
"조금만 버텨요!"
타앗!
내가 멍을 때리고 있는 김태진을 향해 발을 박차는 것과 동시에 한세아에게 외쳤다.
타타탓-
벌컥!
끼이이익···
한세아는 순식간에 뛰쳐나가 풋살장 출입문을 발로 차며 열었고.
꽈아악-!
"잡았다···!"
나는 아직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던 김태진을 강하게 밀치며 두 팔로 억압했다.
생각보다 쉽게 풀린 상황에 안도하며 내가 허리춤에 매인 총을 김태진에게서 빠르게 분리하려는 순간.
"너희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말을 듣지 않는 걸 보니 짐승이었구나."
"······!"
검게 물든 김태진의 눈이 나를 응시하며, 내 복부를 발로 강하게 밀었다.
퍼-억!
툭- 드르르르르
"커허억!"
사람의 각력을 아득히 넘은 발길질에 폐에 담겨 있던 공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나는 배를 움켜쥐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김태진을 제압하기는커녕 발차기 한 방에 몸에 힘이 쭉 빠지고 말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에게서 총을 분리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인 것은 손에 힘이 풀린 내가 총을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총을 내가 끝까지 쥐고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내 손에서 떠난 총은 풋살장 구석으로 미끄러져 어느 생존자 발치에 닿았다.
"아니면 내가 한 말이 어려웠나? 왜 말을 안 듣지?"
김태진은 모자란 숨을 힘겹게 내쉬는 나를 보며 말했다.
"허억. 크으윽. 미···친놈."
"너랑 저 여자는 여기 있는 짐승들 같은 제물이 아니었는데. 뭐가 문제지? 죽인다고 한 것도 아니지 않나? 응? 그냥 내 딸이랑 친구만 해주면 된다고."
부우웅!
퍼억-!
김태진은 비틀거리며 일어난 나에게 다시 한번 내 배를 걷어찼다.
우직-
이번에는 두 팔을 들어 김태진의 발을 막아 낼 수 있었지만, 뼈가 비틀리는 느낌과 함께 큰 고통이 느껴졌다.
"아으윽!"
이게 사람의 힘이 맞다는 말인가.
덩치가 크긴 해도 사람인 이상 한계치가 있을 텐데, 김태진은 비정상적인 괴력을 내고 있었다.
마치 나무 인간이나 변종들처럼.
'······변종?'
순간 떠오른 의문이 머리를 강타했으나, 그에 대해 더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현우씨!"
가방은 챙기지 못했지만, 도끼와 유해 막대기를 들고 가뿐 숨을 몰아쉬는 한세아가 나를 다급하게 불렀기 때문이다.
"이 나쁜 놈!"
푸욱!
한세아는 돌아가는 상황을 보더니 망설임 없이 유해 막대기를 김태진에게 찔러넣었다. 유해는 이번에도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두부 쑤시듯 김태진의 가슴팍에 박혔다.
"······!"
그동안 별다른 반응을 보여 주지 않던 김태진이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김태진은 한세아의 목을 순식간에 낚아채더니 철망으로 집어던졌다.
"아악!"
한세아는 등이 철망과 거세게 부딪치자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쿵!
철그럭! 철그럭!
사람의 무게를 고스란히 흡수한 철망이 두어 차례 흔들렸지만 그뿐이었다.
유해가 가슴에 깊숙이 박혔는데도 멀쩡히 움직이고 있는 김태진.
그는 처음에 공격당한 것에 놀랐을 뿐,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유해를 뽑지 않고 그대로 두는 걸 보면 감각 자체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방해꾼인 한세아를 제압한 김태진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를 향해 커다란 손을 뻗었다.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들어 올려 막으려고 했지만, 나 또한 한세아와 같은 처지를 모면하지 못했다.
"컥!"
쿠웅-!
철그럭! 철그럭! 철그럭!
이번에는 무게와 힘이 늘어난 만큼, 철망이 좀 더 흔들렸다.
"아쉽게 됐네. 좋은 친구가 될 줄 알았는데."
끝?
여기서 끝이라고?
이렇게 허무하게?
'안 돼···.'
절대로 안 돼.
약속했단 말이다. 다시 만나기로.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워보려고 했지만, 한계를 넘은 충격이 수차례 누적된 몸은 고장이라도 난 듯 삐걱거리며 죽어가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김태진이 나를 확실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는 바로 그때.
타타탓! 타탓-!
쐐애액!
어디선가 다급한 뜀박질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공기층을 날카롭게 가르며 김태진을 향해 날아갔다.
"쯧."
그것을 본 김태진은 혀를 찼고, 어쩔 수 없이 나를 놓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퍼억-!
흐릿해진 내 시야로 인조 잔디 바닥을 파고 들어가 박힌 쇠지렛대가 간신히 보였다.
'···쇠지렛대?'
그리고 내가 그토록 바라던, 간절하게 바라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아저씨한테서 손 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