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80화 (81/497)

Chapter 80 - 80. 꼭두각시 (8)

"헤엑. 헤엑-."

지수는 급하게 뛰어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가뿐 숨을 몰아쉬었고, 얼굴에는 구슬땀이 방울방울 흘러 턱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지친 기색이 가득했지만,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수야!"

나는 반가움을 참지 못하고 지수를 향해 외쳤다. 지수의 뒤에서 예린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오빠!"

"예린아!"

지수와 예린.

둘 다 무사했다는 생각에 내 얼굴이 환해졌지만, 예린은 지수의 눈치를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녀들이 엄청 반갑고, 다시 만났다는 사실에 매우 기쁘건만.

'왜 표정이···.'

감동의 재회를 한 순간이 아니던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나는 예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저씨!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팔랑팔랑-

지수가 손에 꼭 쥐고 있던 천 조각들을 허공에 거세게 흔들면서 소리쳤다.

감동의 재회를······.

"건물 곳곳에 흔적을 남겨 놓은 걸 보면 내가 코가 좋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감동의···.

"그럼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야지! 왜 이렇게 싸돌아다녀!"

······.

"여기로 통하는 길목은 또 어떻게 찾은 거야? 6층에서 한참 찾았네!"

거센 노성을 터트리는 지수의 기세에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눈이 빛난 게 화가 나서 빛난 거였구나.

"미, 미안···. 나는 너희들이 여기 잡혔을까 봐 걱정돼서···."

"잡힌 건 아저씨잖아!"

"···그렇지. 진짜 미안."

"······걱정했단 말이야. 흔적을 아무리 따라가도 아저씨는커녕 나무 인간들 시체만 보이고···."

어느새 화를 푼 지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렁그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에 나는 당장에라도 지수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지수야. 조심해! 이 남자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야!"

"나도 알아."

"안다고?"

나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지수와 김태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편으로는 김태진이 왜 이렇게 조용하게 있나 싶었는데 그를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김태진은 멍하니 지수를 아니, 그 뒤에 있는 예린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했던 것이었다. 이내 김태진이 입을 열었다.

"약속을 어겼구나."

"내가 그쪽이랑 약속한 기억은 없는데?"

지수가 김태진에게 사납게 응수했다. 그녀의 꼬리는 적대감을 표출하듯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내가 이곳에서 아이를 데리고 벗어나라고 했을 텐데."

"나는 여기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했을 텐데~."

지수는 빈정거리듯 김태진에게 말했다. 나름 도발해서 시선을 흩트리려는 시도인 것 같았지만, 김태진의 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언니. 저 아저씨 전보다 더 검은색으로 변했어."

지수의 뒤에 숨은 예린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지금 캠프는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기에 예린의 말을 희미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검은색으로 변했다고?'

- 검은빛이 있는 곳은 무조건 위험.

나는 예린의 말에 지수의 수첩에 적혀 있던 생존 수칙 5번이 떠올랐다.

그리고 거기에 적힌대로 검은빛이 있었던 곳은 전부 위험한 장소이거나 끔찍한 괴물이 존재했었다.

검은 입자를 사방으로 내뿜었던 거미 변종과 화원.

아마 지하 터널에 자리잡고 있던 도롱뇽 변종의 군락지도 마찬가지로 검은 입자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비록 입자가 눈에 보이는 능력이 사라져서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거의 확실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것들이 가지고 있던 비정상적인 괴력, 온전치 않은 정신.

그렇다면 이 남자 역시 사람이 아니라···.

"콜록! 현우씨···."

그때, 잠시 정신을 잃었던 한세아가 손을 뻗으며 나를 불렀다.

"세아씨!"

나는 황급히 일어나 한세아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철컥!

늙은 남성 하나가 어느새 내 뒤에 서 있었고, 총구를 내게 들이댔다. 늙은 남성은 말을 심하게 더듬으면서 말했다.

"가, 가만히 이, 있어! 우, 우, 움직이지, 지마!"

목소리를 들어 보니 나와 한세아에게 도망가라고 했던 그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왜 갑자기 왜 태도가 돌변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르신. 왜 이러시는 겁니까. 총을 주우셨으면 저희가 아니라 저놈을 노려야 하는 게 맞잖아요."

나는 곁눈질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나에게 총구를 들이댄 늙은 남성을 제외하고, 나머지 생존자들은 자신들의 일이 아니라는 듯 그저 멍만 때리고 있었다.

이게 지금 방금 전까지 꺼내달라고 소리치던 인간들과 동일한 존재가 맞는가?

같이 힘을 모아 탈출해도 모자랄 판에 대체 왜 저놈의 편을 들어 주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 너, 너희는 어차피 저, 저, 저분 못 주, 죽여! 저분은 죽었는데 다, 다시 살아 돌아오신 분이시다!"

죽음에서 돌아왔다는 늙은 남성의 말.

나는 그 말에 저 거한이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한층 더 강해졌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면 뭐 하는가.

내 뒤통수를 누르는 차가운 총구 때문에 함부로 경거망동 할 수 없는 게 지금 상황이건만.

휘이이잉-

총구가 어디를 향할지 예측할 수가 없어 나, 한세아, 지수, 예린은 몸이 바싹 굳었다. 그리고 그러한 대치 상황 속에서 김태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게임이 좋더라. 너도 게임 좋아하니? 우리 게임 하나 할까?"

"······?"

"인생은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잖아."

"또 무슨 헛소리를···!"

꾸욱-

나는 김태진의 말을 막으려고 했지만, 머리를 세게 짓누르는 총구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김태진이 지수를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모든 걸 가질 수는 없더라고."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상황이 오면 선택을 해야 해."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를 골라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진행을 할 수 있는 게임처럼."

"스킵이라는 편리한 버튼은 없으니까. 다음 이야기를 위해서."

"너는 여기를 떠나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골랐으니, 이제 다음 선택지를 고를 차례다."

지수가 김태진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선택해라."

김태진은 지수를 바라보며 눈으로 물었다.

-너는 누구를 살릴 거지?

지수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리고 한세아가 김태진의 눈치를 보며 내게 입 모양으로 어떤 단어를 전달했다.

'안.전.장.치.'

'······!'

내가 한세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다면, 지금 나를 겨누고 있는 총의 안전장치가 해제되지 않았다는 말일 것이다. 혹은 제발 그러기를 바랐다.

나는 심호흡하며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놈의 발차기를 막은 두 팔에서 망치라도 맞은 듯 강한 욱신거림이 느껴졌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기회는 많이 없다. 아니, 단 한 번뿐이야. 그러니까 무조건 성공해야 해.'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며 다시 한번 주변 상황을 최대한 파악했다.

나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늙은 남성.

몸에 박힌 유해 막대기를 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김태진.

대치 상황을 신경도 쓰지 않는 생존자들.

내 근처 바닥에 꽂혀 있는 쇠지렛대.

출구 쪽에 서 있는 지수와 예린.

그리고 풋살장 출입문에 걸쳐져 있는 도끼.

좋아. 우선 총을 들고 있는 늙은 남성부터 제압한다.

"이 미친 새끼. 헛소리 좀 적당히 해라! 지수야! 앞에 있는 도끼 들어!"

얼추 파악을 끝마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탁-!

드그극-

퍼억!

그리고 아직 반응을 못한 늙은 남성이 들고 있는 총을 손으로 쳐서 바닥으로 떨어트렸고,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 늙은 남성의 복부를 발로 차서 멀리 밀었다.

"어?! 내가 왜? 으, 으아아아악-!"

당혹성을 토해낸 늙은 남성은 내 생각보다 멀리 날아갔고, 그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구멍으로 빠지고 말았다.

······풍덩!

"···씨발."

뒤이어 들려오는 물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마지막으로 마주친 늙은 남성의 한쪽 눈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정말 말을 안 듣는구나. 내가 기껏 기회를 줬건만."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여전히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여기서 가장 위험한 존재인 김태진이 남았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김태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느새 그의 주먹이 내 시야를 가득 채운 모습에 헛숨을 들이켰다.

"헉!"

"아저씨!"

타타탓-!

내 행동이 너무 늦었나 후회할 무렵, 내 앞으로 긴 흑발이 휘날렸다. 한달음에 내게 달려온 지수가 도끼를 양손으로 들어 김태진의 주먹을 막았다.

하지만.

터엉-!

쿵!

"아흑!"

주먹과 도끼날이 서로 부딪치면 도끼가 이겨야 하는 게 당연할 텐데.

지수는 도끼날을 강타한 주먹질 한 방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손에 힘이 풀린 듯 도끼를 놓쳤다. 하지만 지금은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나는 속으로 지수에게 감사를 전했고, 그녀가 놓친 도끼를 잽싸게 주워 들며 김태진에게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부우웅-!

김태진은 뒤로 빠르게 물러나며 공기층을 매섭게 가르는 도끼날을 회피해 몸을 보호했다.

찌이이익! 뜨드득!

지지직-

도끼날은 김태진의 몸을 찍지 못하는 대신 도끼날의 끝에 걸린 그가 두르고 있던 옷을 잡아당겨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러자 김태진이 숨기고 있던 모습을 드러났고, 나는 그의 충격적인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또 뭐야···."

처음 김태진의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그가 인간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줄 알았다.

예전에 한세아가 내게 말해줬던 케이스인, 인간과 인간의 결합을 떠올리면서.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에는 나는 김태진이 새로운 변종일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착각에 불과했다.

나는 끔찍한 그의 모습에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애써 참았다.

그도 그럴게, 그는···.

짐승의 귀가 있어야 할 위치에 귀가 없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달려 있어야 할 위치에 손톱이 없었다.

뾰족한 송곳니가 있어야 할 위치에 송곳니가 없었다.

유연한 짐승의 꼬리가 있어야 할 위치에 꼬리가 없었다.

그렇게 그는 자기 몸에 짐승의 부위가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모든 부위를 강제로 뜯어낸 것 같았다.

마치 이곳에 있는 생존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물론, 김태진에게 처음부터 날카로운 손톱이, 뾰족한 송곳니가, 짐승의 귀와 꼬리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저 다른 이유로 상흔이 남은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런 경우였다면, 그는 지금처럼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고 있었겠지.

그동안 감정이 없어 보였던 김태진은 옷으로 숨긴 모습이 겉으로 드러난 순간.

그는 처음으로 화를 참을 수 없어 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중얼거리다가 이내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나는··· 인간이다···. 짐승이 아니야···. 그러니까······. 나를 그딴 식으로 쳐다보지 마!!"

"그래. 네 말대로 인간은 짐승이 아니야. 그런데 네가 한 짓을 봐라! 대체 몇 명이나 죽인 거냐. 앞으로 몇 명이나 더 죽일 생각이었냐고!"

"······!"

"짐승도 이따위 짓은 안 해! ···네가 만약 인간이라면, 너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겠지. 너는 네가 그토록 혐오하는 짐승보다 더 밑바닥인 놈이야."

"아니야아아아악!"

김태진은 입가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머리를 감싼 채 바닥을 굴러다녔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걸 보니 강한 두통이 그의 머리를 조이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정신이 나간 것 같은 행동을 보이며 발광하는 김태진.

나는 그를 보며 천천히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지수를 부축하는 한세아와 근처에 숨어 우리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예린에게 물러나자는 신호를 보냈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우리 또한 김태진처럼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김태진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벗어나야만 한다.

김태진의 몸에 꽂혀 있는 유해 막대기.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포기했다. 미련이 가득했지만, 지수, 예린, 한세아의 목숨만큼 아깝지는 않았으니까.

괜히 유해를 뽑으려다가 김태진이 정신을 차리면 낭패이지 않은가.

그리고 한세아의 총.

내가 늙은 남성에게서 떨어트린 총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총만큼은 재빨리 챙겼어야만 했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총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저벅-

우리는 놈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뒷걸음질 쳐 출구로 향했고, 나는 움직이면서도 바닥을 떨어진 총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눈을 돌렸다.

바로 그때.

뚝-

거짓말처럼 김태진의 발광이 끝났다.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다시 무감정하게 변한 목소리로.

"···지금껏 몇 마리나 죽었냐고? 글쎄. 열 마리를 넘겼을 때부터 그 뒤는 세지 않아서 모르겠다. 앞으로 몇 마리나 죽일 생각이었냐고? 크흐흐흐흑. 으하학-. 으하하하하학!"

폭소인 것은 분명하건만, 기계처럼 뚝뚝 끊어지게 웃는 모습에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어색하게 인간을 따라 하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거야 간단하지. 답은 '내'가 만족할 때까지-다."

"······!"

"나는인간이다짐승이아니야인간이야짐승이아니야인간답게살면어머니가딸을돌려주신다고하셨어살려주신다고하셨어웃음소리를다시들을수있다고하셨어그러니까나는인간이어야만해내가인간이되기위해서는내가인간으로남기위해서는인간답지않은것들을죽여야만하고그러니까. 아아. ······그래."

히죽-

김태진이 기괴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끝맺었다.

"전부 다 죽여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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