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2 - 82. 따라쟁이 (2)
[아아아아아아······]
수많은 목소리가 겹치며 공명한다.
마치 적절한 소리를, 마음에 드는 목소리를 찾는 듯이.
━━! ━━━━━!
소리는 이내 멈추었지만, 심연에서부터 시작된 기묘한 파장이 사방으로 퍼진다.
그 파장은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생존자들의 고개를 강제로 돌려 심연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마치 이 곳이 자신의 영역이라는 것을 알리듯이.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켜 스스로의 탄생을 알렸다.
그 누구도, 절대로 축복하지 못할 탄생을.
저주받은 존재의 탄생을.
쿵! 쿵! 쿵!
"끄으윽! 내 머리에서 나가···!"
김태진만큼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우리보다 영향을 먼저 받아 저 상태가 된 것일수도.
나는 억지로 돌려진 고개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려고 했지만, 우악스러운 손이 머리를 잡고 있는 듯 머리가 쉽사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발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끝내 고개를 돌리지 못한,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들의 시야에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첨벙-! 첨벙-!
파앙!
물장구 치는 소리와 함께. 회색의 덩어리가.
푸화아악-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그것.
수면에서 벗어나 고개를 내민 그것.
그것의 모습을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원치 않았지만.
그것은 형체가 정해지지 않았다.
몸체에서 수많은 팔과 얼굴이 솟구쳤지만 이내 형체를 잃고 스러졌다.
그것은 수많은 입을 가지고 있었다.
진흙처럼 흘러내리는 입들은 계속해서 이리저리 비틀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니, 여기 있는 모두가 저것을 보고 있는 모두가 나와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저것은 극도로 위험하다, 고.
"···아저씨."
지수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목소리로 나를 힘겹게 불렀다. 그녀의 눈은 두려움에 매우 탁해져 있었다.
나는 간신히 심연에서 눈을 떼어냈고, 두려움에 빠진 예린과 한세아를 눈에 담았다.
예린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고, 한세아는 희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다 말을 겨우 내뱉었다.
"······도망, 도망가야 해요."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저 밑에 있는 저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지금 저 심연 속에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매우 악(惡)한 존재라는 것만큼은 알았다.
내가 그동안 상대했던 나무 인간이나 도롱뇽 변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지어 거미 변종보다도 더.
나는 그녀들의 손을 꽉 잡고 앞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들어 올려 한 걸음씩 옮기고 있는 우리에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겹치는 목소리가 아닌, 뚜렷한 하나의 목소리로.
형체가 정해지지 않은,
수많은 얼굴이 겉에 달려 있을 뿐인,
회색의 부정형체가 그동안 잡아먹은 사람들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늙은 남성의 목소리.
"······!"
"···보지 마."
나는 또 멋대로 돌아가려는 고개를 애써 고정시키며 지수, 예린, 한세아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계속해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 또한 고개가 다시 돌아갔으니.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젊은 남성의 목소리.
······.
[그게 어떻게 내 잘못이냐!]
중년 남성의 목소리.
······.
[집에 아이가 기다리고 있어요! 잘못했어요! 아아악!]
중년 여성의 목소리.
······.
[제발 살려주세요! 한 번만 풀어 주세요! 다시는 반항 안 할게요! 제발!!]
젊은 여성의 목소리.
······.
[죽고 싶지 않아아아아아악!!!]
비교적 귀에 익은 ···중년 남성의 목소리.
쩝쩝···
[······배고파]
그것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마지막 고함을 끝으로 우리 주변은 지독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나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소리를 낸다면 심연 속에 있는 저 괴물이 당장에라도 위를 올려다볼 것 같은 불길한 상상이 머리를 잠식했기 때문에.
······.
······.
······.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것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여자 아이의 목소리로.
[아빠?]
"···딸?"
그때까지 멍하니 있던 김태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움직여 딸의 목소리가 들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이내 얼굴을 흉신악살처럼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빠]
그것이 한 단어를 반복해서 말했다.
[······키킥]
[아빠]
[아빠]
[아빠]
[꺄르르륵!]
그것은 그 단어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해맑게 웃는 소리를 내었으니.
······.
···심연을.
[아빠]
"아니야···."
심연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마라.
[아빠. 어딨어?]
"너는 내 딸이···."
네가 심연을 볼 때.
[아빠아아!!]
"너는 내 딸이 아니야━!!"
김태진의 절규가 구멍을 타고 건물 전체에 울렸다.
메아리 치는 소리를 들은 그것이 고개를 들며 위를 바라본다.
심연 또한 너를 바라볼 것이다.
[···찾았다. 꺄하하하하핫!]
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
그리고 폭소와 함께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체.
대체 뭘 만들어 낸거냐.
'이 미친 놈이 대체 뭘···!'
나는 김태진의 멱살을 잡아채 흔들었다. 정확히는 그의 상체를 들어올렸다. 그에게 박혀 있는 유해를 회수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내 말에 대답할 정신이 없어 보였고, 지금이 아니면 유해를 회수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으니까.
원래도 그러했지만, 이제는 정신히 완전히 나간 것 같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유해를 회수할 엄두도 못 내었으리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줬잖아. 이야기가 다르잖아. 약속한 보상이랑 다르잖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준다고 했잖아."
그는 머리를 감싸 쥐며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누구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아직도 이상한 소리를!'
김태진은 유해를 잡아 뽑듯이 당기고 있는 나를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아니, 아예 주변의 상황이 인식되지도 않는 듯 하늘을 바라보며 외쳤다.
"어머니 당신께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악마는 답하지 않았다.
악마는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김태진의 말에 반응한 것은 지수였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아저씨! 지금 그럴 시간 없어! 여기서 벗어나야지!"
그래. 지수의 말이 맞았다.
지금 김태진과 드잡이할 시간따위는 전혀 없었다.
급한대로 원래 목적인 유해라도 회수하기 위해 잡고 있던 기둥에 힘을 더 주었으나, 유해는 마치 뿌리를 내린 것처럼 고정되어 빠지지 않았다.
'아오, 왜 안 빠져···!'
아무리 용을 써도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있는 김태진의 상체만 흔들릴 뿐이었다.
"아저씨! 그냥 와! 목숨보단 아깝진 않잖아, 그거!"
지수의 재촉에 결국 유해 회수를 포기한 내가 김태진을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할 때, 그가 말을 걸었다.
아니, 말을 건 것이 아닌 혼잣말일수도 있지만, 나는 멈칫하고 김태진을 바라보았다.
"···신."
"신?"
"아니, 아니야. ···신이 아니야. 그래, 악마와 계약을 했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딸을 살려 준다고 했단 말이다. 이렇게 될 줄은······. 미안하다. 모든 게 내 욕심에서 비롯된 일이야."
"아저씨!"
지수가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재촉했다.
"미안! 가자!"
나는 지수를 포함한 일행에게 사과하며 서둘러 출구로 가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한세아가 걸음을 멈췄다.
매우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한세아.
"잠시만요! 현우씨!"
"······?"
"가면 안 돼요!"
"저기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한다니까요?"
지수는 한세아를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보며 반문했다. 한세아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나만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지금 저기로 가면 안 돼요. 현우씨. 믿어 주세요. 제 감 믿어 준다고 했잖아요. 제발···."
"···감? 지금 그깟 감 하나 때문에 모두의 발목을 붙잡은 거예요? 아저씨. 빨리 가야 한다니까!"
지수와 한세아가 내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내 결정을 기다렸다.
우리 모두 이곳이 위험한 곳이라는 걸 알고 있다.
당장 벗어나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 한세아가 나에게 본능, 즉 감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실제로 그 감이 지금까지 그녀가 혼자서 살아남는데 탁월한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까지도.
그리고 그런 감이 지금 출구로 향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그녀에게 전했다면···.
'시간이 없어···. 시간이.'
그녀들의 목숨이 내 결정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건만, 지금 내게는 고민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아니, 충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없었다.
이내 나는 결정을 내렸다. 모두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을.
"세아씨 말대로 뒤로 물러나자."
"아저씨?!"
지수는 그런 내 결정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불렀다. 한세아는 눈에 띄게 안도하는 기색을 보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만 나를 믿어 줘. 지수야."
"아니. 지금 저기가 유일한 출구인데 여기서 뒤로 물러나면 빠져나갈 곳도 없이 우리가 갇히는 꼴이 되잖아!"
"···언니. 저 사람? 저분? 말대로 하자."
"예린아?!"
지수가 분개하며 우리에게 따질 때, 잠자코 있던 예린이 지수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지수는 어떻게 너마저 그럴 수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예린을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 지수는 예린의 단호한 눈에 고개를 푹 숙이며 마지못해 수긍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럼 어디로 갈건데?"
"···일단 저 출구에서 떨어져야 해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모든 곳이 개방된 옥상이라 몸을 숨길 수 있을 만한 최적의 장소는 없었다.
그나마 외부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방금 빠져나온 풋살장이 유일했다. 하지만 기껏 빠져나온 곳을 다시 제 발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게다가 풋살장 안에는 김태진과 심연까지 뚫린 구멍이 있지 않던가.
"딱히 숨을 곳이 마땅치 않은데···. 그럼 저 구석으로 가서 몸을 숨겨봅시다."
"하아."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지친 사람들을 위한 쉼터인 벤치로 이동했다.
지금은 다시 우리 손에 들어왔지만 한때 김태진이 나와 한세아에게서 빼앗은 짐이 놓여 있던 벤치.
우리는 어린아이가 어설프게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그 벤치 뒤에 숨었다.
"······."
"이거 맞아? 정말로?"
"어쩔 수 없잖아, 지수야···."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한세아.
그런 한세아를 보며 심기가 불편한 듯 꼬리로 바닥을 탁탁지는 지수.
그런 지수를 달래기 위해 그녀의 등을 살살 쓸어 주는 나.
예린은 그저 조용히 지수의 옷깃만 잡고 있었다.
바로 그때.
············텅!
[끼에에에엑!]
[캬아악! 케에엑!]
둔탁한 철판 소리와 나무 인간들의 괴성 소리가 들렸다. 아니, 나무 인간 변종들의 소리라는 게 옳은 말이겠지. 혹은 도롱뇽 변종이거나.
········텅!
[깔깔깔깔깔깔깔깔!]
그 소리는 유일한 출구인 계단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 통로.
수직 통로 밑바닥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내는 소리로 추정되는 웃음소리와 함께.
·····텅!
으직- 우적- 우드득- 빠직!
곧 나무 인간 변종의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고, 그것이 포식하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리고.
길을 막고 있는 나무 인간 변종들의 방해가 사라지자 둔탁한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텅!
뻥 뚫린 엘리베이터 통로에서.
텅텅텅텅텅텅-!
그것이 맹렬한 속도로 수직으로 된 통로를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온다.'
나는 그것이 그 끔찍한 모습을 곧 다시 드러낼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이내.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쿠우웅!
우리가 있는 옥상 전체를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음이 굳건하게 닫힌 엘리베이터 문 너머에서 퍼졌다.
끼기긱-
이윽고, 금속으로 된 승강기 문이 형편없이 구겨지며 죽어 가는 소리를 토해냈다.
"우욱!"
지수가 역한 냄새를 맡았는지 입을 가리고 헛구역질을 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위치에서 내가 있는 곳까지의 거리가 그리 가깝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역겨운 하수구 냄새가 내게도 맡아졌다.
끼기기긱···!
철퍽!
엘리베이터 문을 완전히 구긴 그것은 물갈퀴가 달린, 점액질을 뿜어내는 팔을 엘리베이터 문 앞에 턱 하고 걸쳤다.
그리고.
질퍽- 질퍽- 질퍽- 질퍽- 질퍽- 질퍽- 질퍽-
처음 걸친 팔의 뒤를 이어 끈적한 점액질이 흐르는 수많은 팔들이 벽과 바닥을 짚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가 한층 더 강해졌다.
쩌어억-
그것이 어느새 하나의 커다란 입으로 합쳐진 입을 열었다. 아니, 벌렸다. 그것의 내부까지 보일 정도로.
지독한 악취에 코가 마비될 것 같았다.
그것이 어두운 엘리베이터 통로 속에서 김태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끔찍한 외형과 달리 한없이 해맑은 목소리로.
[아빠. 종이학 천 개 다 접었어? 키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