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4 - 84. 따라쟁이 (4)
쏴아아아아아-
굵은 빗줄기가 지면을 강타한다.
인조 잔디가 빗물에 적셔지면서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하지만 상태가 좋아지는 것은 인조 잔디 바닥뿐.
우리들의 옷이 빗물에 푹 적셔지면서 가지고 있던 체온을 차가운 비가 앗아가고 있었다.
떨어지는 체온, 물을 머금어 무거워진 옷, 시야 확보에 방해되는 빗줄기.
그것들은 나, 지수, 예린, 한세아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펄럭-
나는 겉옷을 벗은 한세아를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두르고 있던 겉옷을 넓게 펼쳐 예린이 비를 최대한 덜 맞게 해주려고 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저놈이 어딘가로 가야 우리도 움직일 수 있건만, 누더기 변종은 망부석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거미 변종처럼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거미 변종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을 수 있던 것도 주변 환경을 이용해서 간신히 이끌어낸 결과였고, 지금은 누더기 변종을 몰아낼 수 있을 만한 주변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놈을 옥상에서 떨어트린다고 해도 그건 결국 우리의 앞길을 막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이 옥상에서 내려가야 하니까.
바로 그때.
쩌어억···
"아저씨!"
지수가 나를 부르며 손으로 누더기 변종을 가리켰다. 누더기 변종이 하늘에서 내리는 물을 받아마시기 위해 커다란 입을 크게 벌린 것이었다.
놈이 입을 벌리자 날카로운 이빨이 수도 없이 입안에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이빨 사이에 끼어 있는 희끄무레한 것은 아마도 사람들의 살점이겠지. 혹은 뼛조각이거나.
꿀꺽- 꿀꺽-
단순히 물을 마시는 행위일 뿐인데 소리가 참 요란하게 들렸다. 그 소리는 빗소리를 뚫고 우리를 자극해 마른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아저씨. 딱히 변하는 건 없어 보이지?"
"그러네. 저건 비가 와도 그대로인가?"
나와 지수는 누더기 변종에 대해 사소한 정보 하나라도 더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게 몸을 움직여야 더 확실해지는데···."
지수가 초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도 지수와 같은 것을 바라며 누더기 변종을 노려보았다.
움직여라. 움직여.
그 순간.
드드드드-
미약하게 흔들리는 건물 옥상 바닥.
"지진?!"
"······!"
한세아가 화들짝 놀라며 지수와 예린을 품에 넣고 황급히 자세를 낮추었다. 나는 그런 한세아를 감싸며 급하게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나는 이내 지금 전해지는 진동이 지진의 영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변의 다른 건물들은 전부 멀쩡한데 우리가 있는 건물만 흔들리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드드드드드드-
바닥의 흔들림이 한층 더 강해졌다.
마치 밑에서 마그마가 분출되기 직전의 화산처럼.
마치 밑에서 지하수가 솟구치기 직전의 대지처럼.
"···지진이 아니야."
지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귀를 쉴 새없이 쫑긋거렸고, 지수의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드드득-! 드드득-! 드드드득-
나는 지수의 시선이 아래를 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직감했다. 밀려오는 불안감에 그녀들을 한층 더 강하게 안았다.
"···올라와. 셀 수도 없이 많은 괴물들이."
올라온다.
지하에 도사리고 있던 나무 인간 변종들이,
지하에 만족하지 못하고 지상을 탐하려는 도롱뇽 변종들이,
···이곳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지 마···]
무언가를 감지한 누더기 변종이 침묵을 깨고 중얼거렸다.
드드드드드득!!
하지만 그 중얼거림은 엘리베이터 통로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둔탁한 진동음에 잡아먹혀 사라졌다.
[오지 마!! 나가아아! 내 거야아아아아!]
누더기 변종은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들에게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콰앙! 두두두두두-!
지하로 뻥 뚫린 모든 통로에서.
[그아아아아악!]
[끼에에에에에-!]
[으이이이익!]
수많은 도롱뇽 변종들이 폭발하듯 몰려나와 누더기 변종을 향해 돌진했다. 말 그대로 폭발이었다. 도롱뇽 변종들이 쏟아지는 광경은.
푸화아아악!
그리고 도롱뇽 변종으로 이루어진 점액질의 파도가 누더기 변종을 휩쓸었다.
"······."
"······."
일순간, 순식간, 찰나.
한순간에 벌어진 일에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통로에서 솟구친 도롱뇽 변종들이 누더기 변종을 공격하더니,
우적- 우적- 우드득-
지금은 거의 한 덩어리로 보일 정도로 뭉쳐진 변종들이 살점을 씹는 소리만 들렸다. 누더기 변종은 변변찮은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물량에 휩쓸렸다.
"···죽었어? 왜 갑자기 공격했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벤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지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지수가 답을 바라고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지수의 말에 한세아가 답했다.
"영역 싸움."
"···영역 싸움이요?"
나는 고개를 정면으로 고정시킨 채 한세아에게 물었다.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고 말을 이었다.
"현우씨도 겪어 봤잖아요. 학교에 있던 거미 변종이요. 그 거미 변종이 있을 때, 나무 인간들이 일정 반경으로는 잘 안 들어오려고 한 거 기억나죠?"
"네. 그랬었죠. 거미 변종이 나무 인간을 잡아먹는 걸 보기도 했고···. 그럼 지금 저 상황이 벌어진 이유가···."
"확실하진 않지만, 일종의 영역 다툼 아닐까요? 저 변종들끼리 싸우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매우 커 보여요. 지금 영역 충돌이 일어난 이유는 하나겠죠."
"···비."
내 나지막한 말에 일행의 시선이 잠시 하늘로 향했다가 내려왔다.
쏴아아아아아-
본래라면 지하에 주로 있어야 할 놈들이 지상까지 영역을 넓히게 된 이유는 지금 거세게 내리는 비 탓일 가능성이 컸다. 아니, 거의 유일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요? 저 변종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고 해도 그게 우리가 저기를 지나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더 큰일난 거 같은데."
지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세아에게 말했다.
확실히 지수의 말대로 출구 쪽 상황은 완전히 파국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적우적- 까드득-
누더기 변종의 살점을 정신없이 뜯어먹고 있는 도롱뇽 변종들.
그것들은 우리가 지나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배부른 사자는 사냥감을 더 이상 노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자 이야기에 불과하다.
도롱뇽 변종에게 우리의 위치를 들킨다면 즉시 사냥감을 찢어 발기기 위해 달려드는 것이 현실이겠지.
문득 지수가 눈을 크게 뜨며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는 한세아의 가슴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 가슴!"
"힉!"
한세아가 흠칫 놀라며 한 손을 들어 가슴팍을 가렸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가슴에서 빛 났잖아요. 그리고 갑자기 푸른빛이 나더니 총알도 튕겨내고 그랬잖아요. 그거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다시 한번 푸른 막 같은 거 만들어서 저기 지나가면 안돼요? 총알도 막는데 저것들 이빨 정도는 쉽게 막지 않겠어요?"
"아···."
한세아는 지수의 말에 목걸이에 있던 조각을 겉으로 꺼냈다.
나 또한 그동안 왜 조각을 떠올리지 못했는지 속으로 자책했다.
순간 기적처럼 일어난 일이라 그런가.
뇌가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아직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푸른 장막.'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닌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출구에서 벗어날 동안만 푸른 막이 펼쳐져 우리를 위험에서 지켜 주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나는 기대감을 가지고 한세아가 꺼낸 조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각은···.
"···입자가 없어요. 충전도 안 되고."
한세아가 조각을 내 몸에 가져다 대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각은 완전히 기능을 잃어버린 것처럼 속이 텅 비어 있었다.
헌혈 카페에서 봤을 때는 입자가 뭉친 듯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지금은 입자 자체가 조각 내부에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
"조각? 입자? 충전?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수는 영문을 모르는 눈으로 나와 한세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간단하게나마 그녀에게 설명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지수 네가 말한 푸른 막은 아마도 이 조각에서-"
그때.
······꿈틀!
"쉿!"
지수가 내 입을 황급하게 막으며 전방을 경계했다.
수십 마리의 도롱뇽 변종이 달라붙어 있는 누더기 변종에게서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파······그르르륵-]
질꺽- 츠츠츠츠···
빈틈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도롱뇽 변종 사이에서 기다란 새하얀 팔들이 튀어나온다.
사람의 팔과 유사한 건 여전했지만, 지금 새로 나온 팔들은 전보다 좀 더.
'···자연스러워졌다.'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들 만큼 통일된 외형을 드러내고 있었다.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저것에게 달린 팔과 다리는 누군가 억지로 기워 놓은 것처럼 어색하기 그지없었건만.
지금 모습을 드러낸 수많은 팔들은 전에 달려 있던 팔에 비해 훨씬 크고 두터웠다.
절퍽-
화아아아···
꽃이 만개를 준비하듯 수많은 팔이 누더기 변종의 몸통에서 솟구친다.
팔의 관절을 따라 찢어진 막이 길게 흘러내린다.
우적! 우적! 우적!
도롱뇽 변종들도 무언가 변화를 감지한 듯 살점 뜯는 소리를 한 층 더 요란하게 내면서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프다고··· 했잖아아아아악-!]
콰아아앙-!
누더기 변종의 수많은 팔이 하늘로 향했다가 지면을 향해 강하게 내려찍혔다.
도롱뇽 변종들은 수십 마리가 붙어 있던 것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사방으로 튕겨 나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에에에에엑!]
[까아악! 쉬에에엑!]
그렇게 도롱뇽 변종이 사라진 누더기 변종의 모습은 마치 허물을 벗은 것 같은 외형을 하고 있었다.
도롱뇽 변종들이 먹고 있었던 것은 누더기 변종의 살점이 아닌 허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츄릅- 츄르르릅-
누더기 변종은 여전히 가지고 있는 커다란 입에서 새빨갛고 가느다란 긴 혀를 꺼내 주위에 떨어진 허물을 빨아먹었다.
츄르릅-
혀마저도 여러 갈래로 갈라진 모양새였고, 그것은 마치 또 다른 손처럼 허물을 주워 먹었다. 아주 게걸스럽게.
[까아아아악!]
[우오오오옵-!]
도롱뇽 변종들은 다시금 발광하며 누더기 변종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부가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것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원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을 취했기 때문이다.
쾅! 쾅! 쾅!
우적- 우적- 우적-
누더기 변종은 자신에게 달려든 도롱뇽 변종들을 팔로 내려쳐 압사시키더니 순식간에 입으로 집어넣었다.
질퍽! 턱- 턱- 턱- 턱- 촤르르르륵-
이윽고, 놈은 거대한 몸을 움직여 도망치고 있는 도롱뇽 변종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
길이 열렸다.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자마자 지수, 예린, 한세아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
내 눈에는 오로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만 보였다.
"일어나요! 지금 바로 나가야 합니다! 저 괴물이 다시 출구를 틀어막기 전에 빨리!"
"넵···!"
도망치는 도롱뇽 변종, 그것을 붙잡기 위해 따라가는 누더기 변종, 또 누더기 변종을 공격하기 위해 달려드는 도롱뇽 변종.
서로 얽히고 얽힌 상황에 의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입구가 잠시나마 뻥 뚫리게 되었다.
저것들이 다시 이곳에서 싸우기 전에 서둘러 움직여서 이 끔찍한 옥상, 아니 이 건물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철퍽! 철퍽! 철퍽!
발을 강하게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생긴 물웅덩이의 물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소리는 결코 작지 않았지만, 그나마 다행으로 변종들은 지금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찰박!
나는 뒤따라오는 한세아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황급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녀는 영역을 차지하기 위한 변종들의 싸움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 풋살장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세아를 따라 풋살장 내부를 눈으로 빠르게 훑어보자 아직 김태진이 살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직 살아 있었어?'
김태진은 이질적으로 보일 만큼 혼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피와 살점이 난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전원이 끊긴 인형 같았다.
"세아씨! 뭐해요! 빨리 나가야 한다니까!"
"죄송해요! 이제 가요!"
나는 한세아의 손을 강하게 잡으며 앞으로 내달렸다.
저 남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를 구할 여유가 없었다.
설령 우리에게 김태진을 구할 힘이 있었다고 해도 나는 그를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눈이 검게 물든 사람들 또한 구하지 않았겠지.
내게는.
내 어깨에는.
반드시 살려야만 하는 세 사람의 목숨이 매달려 있었으니까.
눈이 검게 물든 사람들 원래대로 되돌리는 방법 따위는 몰랐으니까.
「언제까지 도망치는 걸로 상황을 회피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그런 단순한 선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나가 되자, 현우야」 '······.'
나는 그저 앞장서서 그녀들에게 길을 터주며 죽어라고 내달렸다.
단지 그뿐이었다.
***
"세아씨! 뭐 해요! 빨리 나가야 한다니까!"
"죄송해요! 이제 가요!"
김태진은 자기 귓가에 울리는 사람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가 고개를 힘겹게 드니 출구 쪽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적색 단발을 한 여성의 눈과 마주치게 되었다.
단발 여자가 무어라고 입을 달싹였다.
'미안해요.'
그리고 단발 여자는 곁에 있던 남성이 손을 잡아끌자 몸을 돌리고 같이 뛰기 시작했다.
아.
그렇구나.
당신이었구나.
김태진은 정신이 어느정도 돌아오고 나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친구는 이름이 뭐야? 배고프면 이거 먹을래?'
'여긴 답이 없어요. 저는 여기 떠날 거예요. 해가 뜨자마자 즉시. 그쪽은요?'
내 딸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고, 캠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조언을 해준 사람.
살아 있었구나.
비록 등에 달려 있던 커다란 날개가 사라졌고, 장발에서 단발이 되었지만. 그 여성은 밖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았던 것이다.
김태진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외부에서.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던 외부에서.
[끼에에에엑!]
[여기서 나가아아아! 내꺼야-!]
쾅! 쾅! 콰직! 꽈드드득!
'나도 살 수 있을까.'
김태진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했지만, 이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늦었어···.'
김태진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손톱과 주름진 손바닥에는 혈흔이 남아 있었다. 빗물이 손바닥을 타고 흘렀지만, 혈흔은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김태진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았다.
변종들의 피가 낭자한 철망으로 된 우리와 육편으로 산화한 괴물들의 흔적이 있었다. 빗물에 씻겨나간 핏물이 그의 발치에 고이고 있었다.
김태진은 출구로 다급하게 뛰어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이 혼란 속에서 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손을 꼭 붙들고 달려가고 있었다. 그의 손도 무언가를 잡기 위해 쥐었다 펴졌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
그는 간절하게 소망했다.
제발.
내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줘.
제발.
뭐라도 좋으니, 누구라도 좋으니.
시간을 과거로 돌려주었으면 했다.
"제발···."
미혹에서, 달콤한 꿈에서 벗어난 그는 지독한 상실감에 몸부림을 쳤다.
그러다가.
찰박-!
김태진은 물웅덩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멍하니 보며 이내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짐승은.
지금까지 그가 죽여 온 것들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몸에 돋아난 짐승의 것들을 다 떼어냈어도 그는 여전히 짐승이었다는 것을.
씻겨지지 않는 피가 잔뜩 묻은 이 손으로는,
딸의 손을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이룰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다른 이들은 무참하게 죽여 온 이 몸으로는, 딸의 온기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악마의 속삭임이 들리는 이 귀로는,
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을.
[끼에에에엑!]
[끄르아아악!]
[나가아아아아! 나가!!]
김태진은 도롱뇽 변종과 자신의 딸, 아니 심연의 괴물이 영역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분명 그에게도 여러 기회가 주어졌을 터다.
김태진은 그동안 최선의 선택을 해 왔다며 애써 생각해왔지만······.
아니, 최선이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차악과 최악. 이 두 개의 선택지만 존재했을 뿐.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는데.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질퍽- 후두둑-
그는 눈물 대신 응고된 검은 피를 흘렸다.
덩어리진 검은 피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이 으깨졌다.
김태진은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딸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
"다시······."
목소리가 떨린다.
김태진은 가슴팍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유해를 억지로 뽑아 손으로 강하게 쥐었다.
곧 그 자신의 것이나 딸의 것이 될 그것을.
"다시···."
목이 메여 말하는 것이 힘들었다.
뻥 뚫린 가슴에서 검은 피가 쏟아졌다. 김태진은 구태여 뭉텅이로 빠지는 피를 막지 않았다.
화르르륵!
그러자 유해로부터 검은 불꽃이 뿜어져 나와 김태진의 몸을 휘감았다.
검은 피를 연료로 삼아 불타며, 아주 지독하게 검은 불길한 화염이 주변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김태진도 예외가 아니었다.
검은 불꽃이 그를 불태운다.
화르르륵!
김태진이 속에 담아두고 있던.
'캠프를 떠나는 게 어때요?'
'여기서 버티고 계십쇼.'
'네 딸이 죽은 게 어떻게 내 탓이냐!'
후회, 분노, 비탄, 증오, 혐오 같은 감정들을.
화르르륵!
김태진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라면 좋아해요···.'
'아빠라고 불러도 돼요?'
'꺄하핫! 간지러워!'
'종이학을 천 개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대!'
'···조심해야 해?'
은지와 함께한 지난 날의 추억들을.
화르르륵!
시간이 지나자 그에게는 단 하나의 목적만이 남았다.
그가 살면서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
그가 살면서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인간답게 살아라. 태진아.'
불길이 뿜어졌을 때부터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던 도롱뇽 변종들과 누더기 변종이 전부 김태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검은 화염에 휩싸인 그가 어느새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것들에게 말했다.
[다시 심연으로 돌아갈 때다. 괴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