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87화 (88/497)

Chapter 87 - 87. 무궁화호 (1)

쏴아아아아아-

직원 전용 출입구를 여니 차가운 비가 지면을 강타하는 것이 보였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 한 발 크게 내디뎠다.

1층의 출입문을 통과하는 순간, 주변에 흐르는 공기는 한층 더 차가워지고 습하게 바뀌었다. 마치 건물의 문을 기준으로 삼아 경계선이 나뉜 것 같았다.

후두둑- 후둑- 후두둑-

도롱뇽 변종을 상대하는 데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린 듯 바깥은 한층 더 어두컴컴해졌다.

전투로 달궈진 몸을 차갑게 내리는 비가 두드리자 한창 욱신거리던 심장도 점차 진정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일종의 개운함까지 느껴졌다.

물론 그 느낌은 얼마 가지 않아 추위로 변하고 말았지만.

"저기 담벼락 보이지? 저기 붙어서 조심하게 가자. 차 밑에 조심하고."

지수는 차에 가까이 가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원역과 AK&몰 사이에 있는 공간.

이곳은 일종의 물류 트럭들이 대기하는 주차장인 것 같았다. 아니면 잠시 직원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이거나.

선로에 접근하지 못하게 일렬로 쭉 뻗어 있는 담벼락과 백화점 사이의 공간은 넓지 않고, 매우 비좁았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흡연자들을 위한 재떨이 통, 칠이 벗겨진 벤치, 흰색의 기다란 몸체를 가진 물류 트럭 한 대.

비를 막아주는 정자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이미 무너졌거나 애초부터 없었을 수도 있다.

나는 흡연자도 아니고,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도 아니었기 때문에 알고 있어야 할 정보는 아니었지만.

바로 그때.

쿠르르르릉━

우리가 빠져나온 AK&몰 건물에서 불길한 진동이 들려왔다.

"담벼락으로 가요! 어서!"

"알았어!"

지수가 빗물에 푹 적셔진 머리를 뒤로 묶으며 크게 소리쳤다. 갈수록 거세지는 빗줄기 소리에 대화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아악! ···죽···야!]

······쾅!

간혹 거센 빗소리를 뚫고 옥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역 다툼의 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위험한 곳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우리는 재빨리 빗속을 내달렸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도 위쪽에 비해서 덜 위험할 뿐이지, 안전한 곳은 아니었으니까.

찰박- 찰박- 철벅- 철벅-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도로에 고인 물웅덩이를 밟고 잠시 달려가자, 이내 넝쿨이 잔뜩 자라 달라붙어있는 담벼락에 다다를 수 있었다.

벽돌로 이루어진 담벼락 앞에는 진흙이 되어가는 흙탕물이 가득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사방으로 비산한 흙탕물이 옷에 튀었지만, 이내 빗물에 씻겨 나가는 상황의 반복.

지수는 전방을 재빨리 훑어보더니 담벼락에 바싹 붙었다. 그녀가 고개를 뒤로 돌리며 일행을 바라보았다.

"···아스팔트쪽에는 가지 않는 게 좋겠어."

나는 지수의 말에 눈을 가늘게 좁히며 아스팔트 도로 쪽 상황을 살펴보았다.

콰콰콰콰콰···

회색의 와류가 도로 곳곳에 형성된 모습.

'···굴!'

도롱뇽 변종들의 마수가 협소한 이곳에서도 뻗쳐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원역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도롱뇽 변종들이 누더기 변종에게 몰려갔기 때문일까. 굴은 조용했다.

"넝쿨 잡고 가야 되나?"

"···이거 잡아도 되는 건가요?"

한세아가 불안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나는 그녀의 물음에 담에 붙어 있는 넝쿨을 바라보았다.

흡수한 빗물을 내부에서 이동시키고 있는지 쉴 새 없이 꿈틀거리는 넝쿨.

마치 생명체의 혈관 같은 느낌에 몸서리가 절로 쳐졌다.

"어쩔 수 없잖아요. 적어도 굴에 빠지는 것보다 나으니까. 뭐, 굴에 빠지지 않는 게 제일 낫지만. 시간 없어요. 빨리 잡아요."

지수가 한세아를 보며 재촉했다. 한세아는 울상을 짓다가 눈을 질끈 감고 넝쿨 한 줄기를 잡았다. 그녀는 줄기를 손에 잡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며 질색했지만, 끝내 줄기를 놓지는 않았다.

"아흐흑···!"

"세아 언니! 잘 따라와요!"

"응···."

추위에 질린 것인지, 소름 돋는 촉감에 질린 것인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예린은 한세아와 달리 씩씩하게 넝쿨을 잡고 움직였다.

지수는 우리 모두가 넝쿨을 잡은 것을 확인 후 몸을 돌려 앞장서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아-

철벅! 철벅! 철벅!

세찬 비를 맞으면서 앞으로 걸은 지 체감상 10분이 지났을 때, 나는 손에서 꿈틀거리는 넝쿨의 촉감을 애써 외면하며 지수에게 물었다.

"지수야. 어차피 담벼락 넘어가야 하는 거 아니야?"

갓길을 따라 일렬로 길게 세워진 회색 벽돌로 이루어진 담벼락은 끝났고, 이제는 붉은 벽돌의 담벼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도 2m를 가뿐하게 넘은 담벼락이지만, 지금은 한 층 더 높은 높이를 자랑하는 벽.

나는 벽이 더 높아지기 전에 담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냐. 앞으로 좀만 더 가면 문 있어. 거기로 가면 돼, 아저씨."

"그래?"

"응. 그리고 이 건너편에는 공사 자재들이 잔뜩 놓여 있는데 그 틈에 나무 인간들 숨어 있으면 어떡해. 나는 아저씨 목숨 가지고 도박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일단 그냥 가자. 알았지?"

"어어···."

나는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 다시 만난 지수는 원래도 그런 마음이 있었지만,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한층 더 강해진 것 같았다. 한세아가 지수를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언니! 나 춥다구!"

"알았어 알았어. 가자. 언니 손잡고 갈래? 거의 다 왔는데."

"아니! 세아 언니 손잡고 갈 거야."

"······응."

찰박- 찰박- 찰박-

다시 말없이 앞만 보고 이동하기를 몇 분.

우리 눈앞에 초록색 페인트 칠이 된 철문이 나타났다.

문 밑에는 바퀴가 달려 있어 문을 여는 것 자체는 쉬워 보였다. 걸쇠를 제외한 잠금장치가 없기도하고.

끼익···

드극- 드그극-

문에 달린 바퀴가 바닥에 깔린 자갈들을 누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지수는 주변을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듯 문 너머로 발을 밀어 넣었다.

"아저씨. 저기 보여? 저 선로 끝에 서 있는 무궁화호."

나는 고개를 쭉 내밀어 시야를 높였다. 지수의 말대로 빗줄기 사이로 빨강, 파랑, 하양의 색이 어렴풋이 보였다. 아마도 무궁화호 객차일 것이다.

"어. 보여. 저기서 지냈구나? 생각보다 먼 곳에 있었네."

"그 얘긴 나중에 해 줄게. 예린아, 가자. ···아줌마도요."

"또 아줌마라고 했어···?!"

"세아씨! 춥죠? 얼른 들어갑시다!"

울상을 지으며 나를 돌아보는 한세아에게 나는 그녀를 앞으로 밀며 달랬다.

'지수가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저도 아저씨라고 부르잖아요. 열차 안에 들어가서 좀 친해지면 언니라고 부르겠죠.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네.'

귀에 가까이 대고 속삭이면서 한 말에 한세아는 표정을 풀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나아 보였다.

"아저씨! 뭐 해!"

"미안! 갈게! 세아씨, 저희도 어서 가죠."

어느새 거리가 벌어진 지수가 빨리 오라며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나와 한세아는 서둘러 지수와 예린의 곁으로 바싹 붙었다.

잘그락- 잘그락-

나는 신발에 밀리는 자갈 소리를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수의 말대로 담벼락 너머에는 공사 자재들이 산재해 있었다.

겹겹이 쌓인 나무 팔레트, 두꺼운 줄에 하나로 묶인 쇠 파이프들, 무너지지 않게 차곡차곡 쌓인 원심력 흄관, 허리춤까지 오는 높이로 쌓인 회색의 벽돌 더미.

그리고 녹이 잔뜩 슨, 혼자 외로이 놓인 포크레인 한 대.

아마도 포크레인이 녹이 슨 이유는 넝쿨 탓인 것 같았다. 차체를 잡아 먹듯 둘러싸인 넝쿨들의 체액에 의해 철이 조금씩 부식되고 있는 거겠지.

또한 나는 지수가 왜 나무 인간들이 공사 자재 사이에 숨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는지 이해했다.

공사 자재 틈 사이에 생각보다 빈 공간이 많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흄관 같은 경우에는 사람 하나가 엎드려도 될 만큼 꽤 큰 크기의 직경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그락- 절그럭-

이윽고.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포크레인과 마찬가지로 홀로 구석 선로에 정차된 하나의 무궁화호 객차 앞에 도착했다.

내가 객차 유리 너머를 들여다보려고 한순간, 지수가 급히 손을 들어내 눈을 가렸다.

"아앗! 안 돼! 어딜 보는 거야!"

"···왜 그래? 내부가 안전한지 확인해야지."

나는 당황하며 지수의 손을 떼려고 했지만, 그녀의 손은 요지부동이었다. 지수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안에 위험한 건 없어! 어차피 여기 들어가려면 열쇠가 필요하고, 그 열쇠는 나한테 있단 말이야."

"···그래? 그럼 다행이고. 알았으니까 이제 손 좀 치워주지 않을래?"

"안 돼. 아, 아직은 안 돼! 조금만 기다려! 내가 부르기 전에 들어오면 죽어!"

"맞아요! 안 돼요!"

한세아의 손을 잡고 있던 예린도 지수의 말에 동의하며 안 된다고 말했다. 지수는 그 말을 끝으로 벨트 가방에서 작고 동그란 모양의 열쇠를 꺼냈고, 무궁화호 열쇠구멍으로 집어넣었다.

달칵-

드르륵!

그녀가 열쇠를 돌리니 작은 비틀림 소리와 함께 객차 문이 앞으로 살짝 밀렸고, 지수가 문손잡이를 옆으로 밀어 바로 문을 열었다.

"미안! 아저씨! 여기 가만히 있어! 그, 아줌마, 아니, 언니는 들어와서 저 좀 도와줘요!"

"알았어요. 먼저 갈게요, 현우씨."

한세아는 지수가 왜 그런지 알겠다는 듯 킥킥 웃으며 무궁화호 안으로 들어갔다. 한세아를 뒤따라 들어간 예린을 끝으로밖에는 나 혼자만 남았다.

후두둑- 후두둑- 후둑-

비는 그칠 생각하지 않고 추적추적 계속 내렸다. 그나마 빗줄기가 약해진 것이 다행일까.

나는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을 느끼며 객차 안을 향해 물었다.

"나 들어가도 돼···?"

쿵쿵쿵!

촤르르륵-

"언니! 저것 좀 걷어 줘요! 이쪽은 제가 할게요! 예린아! 너는 언니들이 거둔 거 개서 모아줘! 어두우니까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여기 줄에 걸린 거 다 걷으면 되죠? 알았어요."

"알았어, 언니!"

"···응. 바쁘구나."

나는 바쁘게 움직이는 그녀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려 주변을 경계했다.

혹시라도 나무 인간이나 도롱뇽 변종이 이곳으로 흘러 들어와 위험해질 수 있지 않겠는가.

절대로 소외감에 시무룩해져서가 아니다. 진짜로.

잠시 뒤.

지수가 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들을 얼굴에서 뚝뚝 흘리며 내게 말했다.

"아저씨, 이제 들어와. 많이 기다렸지. 미안."

"아냐, 별로 안 기다렸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객차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몸을 두들기는 빗줄기가 객차에 막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드르륵!

-쿵!

지수는 내가 완전히 객차 안으로 들어오자 고개를 밖으로 내밀어 마지막으로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문을 완전히 닫았다.

그녀가 내 손을 잡아끌며 좌석칸으로 향하던 바로 그때.

"내가 아저씨 입을 옷도 미리 구해놨으니-꺅?!"

쿠르르르르릉···!

콰앙! 우르르르-

드드드드드-!

···쩌적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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