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8 - 88. 무궁화호 (2)
드드드드드드-!
끼긱! 끼긱!
우리가 타고 있는 무궁화호 객차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좌우로 이리저리 비틀거린다.
"꺄악!"
"지수야!"
나는 흔들림이 느껴지자마자 지수를 품에 안고 바싹 바닥에 엎드렸다. 그녀 또한 나를 놓칠 새라 꽉 마주 안았다.
"세아씨! 괜찮아요? 예린이는?"
"우리 둘 다 무사해요!"
내가 고개만 살짝 든 채로 좌석칸 안쪽을 향해 물어보니, 한세아와 예린 둘 다 무사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뭐지?'
이번에야말로 지진이 일어난 것인가 싶었지만, 이번에도 그것은 아니었다.
지금 불안하게 객차를 흔드는 진동은 우리가 빠져나왔던 AK&몰 아니, 수원역에서부터 전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정확히는 수원역과 그 근처만 흔들리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았다.
그 순간.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굉음이 무궁화호 내부를 뒤흔들었다.
객차 유리창 너머로 검은 화염이 영역 싸움이 한창 진행 중인 AK&몰 옥상에서 터져 나온 것이 보였다. 빗줄기가 화염에 밀려나 순간 비가 그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흐윽···."
지수가 귀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다. 나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등을 연신 쓸어내려주었다. 내가 괜찮냐고 물으니 지수는 품에 얼굴을 묻으며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세아 언니···."
"쉬이. 괜찮아."
근처에서 한세아가 나와 같이 예린을 달래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굴을 바싹 굳히며 지금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쿠오오오오오-!
[끼━아아아아아악!]
다시 지축을 흔드는 폭음과 함께 변종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우리 몸을 흔들었다. 결국 나는 생각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지수를 한층 더 강하게 안을 수밖에 없었다.
검은 화염.
그것이 빗줄기도 무시한 채 무시무시한 기세로 하늘을 향해 타오르고 있었다.
옥상에서 시작된 검은 화염은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는 넝쿨 줄기를 타고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지더니 6층, 5층, 4층 점점 아래층을 잠식하며 AK&몰을 잡아먹어 버렸다.
빗물에도 꺼지지 않는 그것은 하늘에 떠 있는 먹구름보다 더 진한 검은색을 자랑했다.
화르르르륵!
검은 화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넘실넘실, 너울너울 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태울 때 피어나는 매연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배경에 어설픈 불꽃 CG를 입혀놓은 것처럼, 아래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역으로 위로 밀어내며 이질적으로 타오르는 검은 화염.
대체 옥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누더기 변종과 도롱뇽 변종이 각자의 영역을 걸고 서로 싸우면서 입으로 불을 내뿜기라도 했단 말인가.
나는 유해에 찔려 터진 적이 있었던 도롱뇽 변종을 떠올려다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분명 도롱뇽 변종의 몸체가 팽창하더니 터진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들이 아무리 모여도 불길한 검은 화염을 만들어 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검은 화염은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랐다. 검은색의 불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기도 하고.
검은 불길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대체 누가? 혹은 무엇이? 어떻게?
여러 의문이 나를 괴롭혔지만, 가장 큰 의문을 따로 있었다.
바로 열기를 감지한 소화제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
지금까지 경험으로는 조각 근처가 아니면 소화제가 일정 온도의 열을 감지하자마자 열기를 양분으로 삼아 포자 덩어리를 만들어 열을 잡아 먹었건만.
건물에서 피어오른 검은 화염은 사그라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포자 덩어리가 형성될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열기가 없나?'
열기가 없다면 소화제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말이 된다. 하지만 열기가 없다면 건물을 감싸고 있는 넝쿨이 불에 타는 듯한 모습을 보여 준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내가 확실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의문은 하나도 없었다.
바로 그때.
쩌적! 쩌저적- 쩍!
쿠르르르릉···
연이은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이미 내구도가 한계에 달했던 AK&몰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니, 지하가 더 이상 지상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지면이 무너졌고, 그걸 버티지 못한 지상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쿠쿵- 쿠그그긍!
지반의 뒤틀림에 의해 단단한 콘크리트 벽에 금이 쩍쩍 벌어졌다. 금이 간 콘크리트 벽은 이내 산산조각이 나며 그 파편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파편들은 사방에 산재한 굴들의 입구를 틀어막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막았다.
쿵! 쿵! 쿵!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바닥을 강타할 때마다 그 충격이 여기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한때 6층의 높이를 자랑했던 건물이 지면 밑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검은 화염에 타지 않은 건물 벽면의 넝쿨 줄기들도 뚝뚝 끊어지며 바람에 나부꼈다.
휘이이이이이!
콰지직! 콰직!
수원역 광장에 모여 있던 차들이 위에서 떨어지는 콘크리트 덩어리에 의해 납작해져 단순한 고철 덩어리로 변모하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어렴풋이 들렸다.
푸화아악···
건물이 무너지자 흙먼지가 사방으로 확 퍼져 주변을 뒤덮었지만, 흙먼지는 이내 빗줄기에 의해 진압되며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린 수원역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숨을 죽인 채 건물 붕괴의 여파가 이곳까지 미치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고개만 살짝 들어 창문 너머를 지켜본 지 몇 분이 지났을까.
지면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고, 빗줄기만큼 거세게 불타오르던 검은 화염도 사그라들어 자취를 감췄다. 보이는 것은 형체도 남지 않은 수원역의 잔해뿐.
"······."
"······."
"······."
"···끝났나?"
나는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가까운 곳에서 한세아와 예린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부스럭- 부스럭-
"현우씨, 다친 데 없죠?"
"네. 세아씨랑 예린이는요?"
"저희도 문제없어요."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세아와 예린이 무사한 것을 확인했고, 다시 시선을 수원역 쪽으로 돌렸다.
폭삭 무너진 AK백화점은 건물 뼈대로 사용된 철근이 가시처럼 삐죽 튀어나와 있을 뿐이었다.
내가 바깥을 살피고 있을 때, 어느새 다가온 한세아가 내게 물었다.
"···다 죽었겠죠? 그 목소리를 따라 하는 괴물도, 도롱뇽 변종들도? 왜 갑자기 건물이 무너진 걸까요···."
"···글쎄요."
나는 한세아에게 쉽사리 답해 줄 수 없었다.
불에 휩싸인 건물 그리고 그 건물이 완전히 붕괴된 광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날카로운 금속 판에 온몸이 난자 되었어도 어떻게든 움직여 사냥감의 숨통을 끊기 위해 움직였던 거미 변종.
수십 마리의 도롱뇽 변종들이 덮쳤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도롱뇽 변종들을 역으로 압박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누더기 변종.
수원고등학교에서 상대한 거미 변종도 엄청나게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는데, 그것보다 훨씬 위험한 누더기 변종이 저 참상 속에서 살지 못하고 정말로 죽었을까?
순간 나를 죽이기 위해 화단을 기어오던 거미 변종이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찌 되었든 누더기 변종은 몰라도, 도롱뇽 변종은 무수하게 죽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은 다른 변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죽이기 쉬운 편이었으니까.
그러다가 문득 아직 바닥에 주저 앉아 있는 지수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아직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귀를 쫑긋거리며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저씨, 언니, 예린아."
지수가 우리 모두를 불러 이목을 집중시켰다.
"커튼 쳐요. 아직 안 끝났어."
"···아직도?"
"질색할 시간에 빨리 움직여요!"
"넵···!"
한세아가 무심코 작게 중얼거린 말에 지수가 바로 타박하자,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창가로 몸을 돌렸다.
"뭐가 오는데? 설마 변종들이 살아남았나?"
잔뜩 예민해 보이는 지수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나도 잘 몰라. 빗소리 때문에 잘 안 들려서. 내 기우일수도 있고, 어차피 커튼 쳐서 바깥 시야를 막기는 해야 하니까."
우리는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라기도, 이제는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표정을 짓기도 하면서 지수가 시키는 대로 커튼을 닫기 위해 움직였다.
촤아악! 촤르륵-
사방에서 커튼 치는 소리가 들린다.
쏴아아아아아-
후두둑- 후둑-
나는 서둘러 커튼을 치는 와중, 바깥의 소리를 들어 보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오직 빗소리와 빗줄기가 자갈을 때리는 소리뿐-.
·····················찰박!
"······?"
순간 물소리인 건 같지만, 그 방향이 살짝 다른 듯한 소리가 들렸다. 매우 희미했던 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바로 사라졌기 때문에 확실하게 들은 것이 맞는지 헷갈렸다.
········찰박!
찰박찰박찰박찰박찰박찰박!
하지만 이내 그 소리는 순식간에 불어나며 내가 들은 것이 확실하다는 답을 대신 내려주었다.
"······!"
촤아악··· 촤르륵!
그리고 이제는 우리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소리가 가까워졌기 때문에 커튼을 치는 행동이 한층 더 빨라졌다.
이윽고.
나와 지수, 예린과 한세아. 이렇게 둘로 나뉜 일행이 객차 안의 모든 커튼을 친 후 객차의 양 끝에 위치하고 있을 때.
서로를 지탱하기 위해 중앙으로 모이려고 했지만, 한 박자 더 빠른 소리가 우리의 움직임을 가로막았다.
[끼에에에엑!]
[크르아아아악!]
[키이이익!]
소리.
도롱뇽 변종들의 소리.
영역 다툼과 건물의 붕괴에서 끝끝내 살아남은 도롱뇽 변종들의 괴성이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도 없이 몰려오면서.
제 존재감을 사방으로 드러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