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90화 (91/497)

Chapter 90 - 90. 정비 (1)

쏴아아아아-

"······."

"······."

나와 지수는 상황이 끝나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어도 여전히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내 위에 지수가 올라탄 자세를.

나는 이제 슬슬 일어나서 반대편에 있는 한세아와 예린에게 상황의 종료를 알려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리를 내기 위해 숨을 조금이라도 크게 들이쉴 때마다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지수가 애처롭게 바라보며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나는 그 눈빛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소리가 되지 못한 내 호흡은 그저 조용하고 긴 한숨으로 나올 뿐이었다.

"···지수야."

재차 입을 열었지만, 지수는 한세아와 예린이 있는 방향을 슬쩍 보더니 오히려 더 달라붙어 오며 얼굴을 내 가슴팍에 묻었다. 그녀의 귀가 쫑긋거려 내 얼굴을 간지럽혔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조금만."

"그래. 5분만이다. 알았지?"

"몰라. 나 일단 귀 좀 막아줘."

"귀? 이렇게?"

"응. 빨리!"

나는 지수가 바깥의 소리를 최대한 듣지 못하게 귀를 손으로 막아주었던 것을 떠올리며 똑같은 행동을 해주었다.

"흐응···."

손에 살짝 차가운 듯한 귀가 만져지면서 지수가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후두둑- 후둑-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뚝- 뚝-

빗물에 푹 젖은 옷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쿵! 쿵!

콩닥- 콩닥-

나와 지수의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

옷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바닥에 고이고 있는 것을 봤을 때 바로 일어나서 갈아입을 옷을 찾으려고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지수가 언제 어리광을 부려보겠는가.

마찬가지로 이럴 때가 아니면 내가 언제 그녀의 어리광을 받아보겠는가.

한세아와 예린에게는 미안했지만 나는 지수의 불안감을 해소시키고,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그녀를 위해서.

그리고 생각보다 아니, 내 몸은 전혀 추위에 떨고 있지 않았다.

젖은 옷이 가져가는 체온보다 오히려 지수의 가늘지만 탄탄한 몸에서 나오는 열이 더 강해서 나를 덥혀주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가만히 시간을 보내기도 뭐 해서 손에 들어온 지수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엄지손가락으로 말려 있는 것을 쭉 피듯이 동물 귀를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려다보았다. 부드러운 솜털은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모양이 바뀌어 갔다.

쓰윽-

"······!"

그 순간 크게 움찔하는 지수의 반응에 '실수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몸에 힘을 완전히 풀고 있었기에 더 만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혹여 지수가 불편해하거나 싫어하는 티를 내었다면 귀를 만지는 행동을 당장 그만두었겠으나 그런 티는 전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솜털과 매끄러운 피부가 주는 오묘한 느낌에 손이 멈춰지지 않았다.

만지면 만질수록 중독되는 느낌에 나는 점점 그 촉감에 빠져들고 있었다.

쓰윽-

움찔!

쓰윽쓰윽-

움찔! 움찔!

쓰윽···

"흐읏-!"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무아지경으로 지수의 동물 귀를 살살 문지르는데 얼마나 열중했을까.

문득, 바로 앞에서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지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저씨···."

지수가 다리를 비비적거렸다. 그녀는 달뜬 숨을 내뱉으며 나를 애타게 불렀다.

"그, 그마안···."

흡사 몹쓸 짓을 당하기라도 한 듯 애원하는 지수의 어조에 나는 정신이 확 들었다. 황급히 그녀의 귀에서 손을 떼어냈다.

하지만 어찌나 열심히 문질렀는지 그 촉감이 잔불처럼 남아 아직도 느껴지고 있었다.

"헉. 미안, 아팠어? 말하지."

"아니···. 아픈 건 아닌데···."

지수는 말을 잇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에는 물기가 살짝 어려 반짝이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지수의 눈이 약간 위험해 보이는 기색을 띠기 시작했다.

그 눈을 바라보니 한세아같은 버드 센서는 아니지만, 본래 가지고 있던 인간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왜 그래?"

"······."

"미안하다니까···?"

나는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에 살짝 기가 죽어 지수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말없이 두 팔을 내 목에 두를 뿐이었다.

그리고.

'어? 뭔가 점점 가까워지지 않나?'

언젠가 말한 적이 있을 것이다.

지수의 호박색 눈동자에는 보는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다고.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내 눈에는 지수만 보였다. 또한 그녀의 눈도 오직 나만을 담고 있었다.

고개를 뒤로 물려야 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고양이 앞에 있는 쥐가 이런 기분일까.

이 경우에는 강아지 아니, 사람과 사람이지만,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이윽고, 나와 지수의 호흡이 뒤섞이며 그녀의 얼굴이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바로 그때.

"저기요···? 현우씨? 도롱뇽 변종들은 이제 완전히 간 거 맞죠···?"

"······!"

반대편 끝 좌석칸 구석에서 살짝 떨리고 있는 한세아의 목소리가 우리를 멈춰 세웠다.

나와 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거리를 확 벌렸다.

쿵! 쿵! 쿵!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를 배경으로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하아···."

"칫."

거리를 벌리긴 했어도 여전히 내 배에 올라타고 있는 지수가 짧게 혀를 찼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털어내며 정신을 차렸고, 한세아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네네. 세아씨. 그놈들은 다른 곳으로 움직인 것 같습니다. 세아씨랑 예린이 어디 몸 이상해지거나 다친 곳은 없죠?"

"넵. 저랑 예린이는 괜찮아요. 아! 비를 맞아서 그런가, 예린이가 조금 추워하는 것 같아요."

"아니에요! 저 안 추워요!"

그러나 예린이 한세아의 말을 바로 부정했다. 씩씩한 걸 보아 하니 이상이 없다는 게 확실해져서 안도감이 들었다.

둘 다 괜찮은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그래? 다행이네."

"그러니까 언니랑 오빠 하던 거 마저 해요!"

"······어?!"

그리고 나는 불쑥 치고 들어오는 예린의 말에 당혹성을 내뱉었다.

다 듣고 있었다는 말인가?

아니, 생각해 보면 내가 이렇게 당황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랑 지수가 엄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서로 얼굴 좀 바라봤을 뿐이 아닌가?

그러니까 나는 당당-

"······하던 거? 현우씨. 지금 거기서 둘이 뭐 해요?"

"아니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아무것도 안 했어요!"

-해야 하는데.

어느새 떨림이 사라지고 톤이 눈에 띄게 낮아진 한세아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화들짝 놀라면서 크게 말하고 말았다. 덩달아 지수까지 놀라 소리쳤다.

누가 들어도 찔리는 구석이 있다는 모양새.

"뭐 하냐고요. 아니다. 거기 가만히 있어요. 제가 가서 볼 거니까."

저벅- 저벅-

한세아가 어느새 완전히 어둠으로 채워진 무궁화호 객차 안을 손으로 더듬으며 천천히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떡해?!"

"아니, 뭐를?"

지수가 그녀답지 않게 잔뜩 당황하며 작게 속삭였다.

처음에야 나도 당황을 했지만, 이내 꿀릴 것이 없다는 것을 안 이후에 마음을 다 잡았건만.

지수는 왜 이런 반응을 보여준다는 말인가.

지수는 되묻는 내 말에 가만히 시선을 아래로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 또한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렸고, 이내 볼 수 있었다.

"···뭐야."

내 옷이 왜 이렇게 풀어 헤쳐져 있지?

어둠에 충분히 익은 시야에 가볍게 두른 외투와 상의가 단정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벅- 저벅-

한세아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들어 지수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녀의 옷매무새는 멀쩡했다.

비록 물이 떨어지고 있기는 했지만, 괴한이 덮치기라도 한 듯 흐트러진 내 옷에 비하면 아주 멀쩡했단 말이다.

내가 옷을 일부러 이렇게 입은 것도 아니고, 고작 비에 젖었다고 이렇게 될 리도 없다.

그렇다면 범인은···.

나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지수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

"지수, 너···."

저벅저벅!

내가 무어라고 말하려는 것과 동시에 한세아가 나와 지수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둘이 뭐 해요, 지금?"

한세아가 아직도 내 위에 올라타 있는 지수를 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물."

한참 입술만 달싹이던 지수가 작게 말했다.

"네?"

"아저씨가 혼자 밖에 있을 때! 비를! 너무 많이 맞아서! 그러니까 옷에 물기가 너무 많아서 짜주고 있었는데요. 왜요? 예린이도 물에 젖은 옷 때문에 추워하는 것 같다면서요. 저도 아저씨가 추워 보여서 일단 물기라도 짜주고 있었어요. 문제 있어요?"

처음에는 말을 뚝뚝 끊어서 말하던 지수였지만, 말할수록 자신도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는지 이야기를 할수록 자연스럽게 말이 이어졌다.

"그럼 자세는 왜 그러고 있는 건데요?"

"여기가 워낙 어두워야 말이죠. 잘 안 보여서 가까이 갈 수밖에 없더라고요."

"아니, 겨우 가까이 간 자세가 아니잖아요···!"

"맞는데요? 저랑 아저씨 완전 친해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데? 아줌마가 저랑 아저씨 사이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요?"

"또 아줌마라고 했어?! 이잇···! 현우씨!"

한창 지수와 대화를 하던 한세아는 내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그녀가 서슬퍼런 기색으로 물었다.

"현우씨가 말해 봐요. 저랑 예린이가 무서움에 막! 벌벌! 떨고 있을 때, 둘이서 이상한 짓 한 거 아니죠? 그렇죠? 지수씨가 말한 것처럼 그냥 물기만 짜낸 거죠?"

예전 한세아와 모텔에서 있을 때 느껴졌던 묘한 이질감이 다시금 그녀에게 느껴지고 있는 기색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네네! 그럼요!"

그리고 말을 하던 와중에 내 시야에 물에 젖은 지수의 꼬리가 들어왔다.

"이거 보세요! 저는 물기를 얼추 다 짜내서 이제 지수 물기 짜주려고 하고 있었어요."

나는 괜히 엄한 곳을 만져 물기를 짜내는 것보다 한세아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꼬리의 물기를 짜내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편이 한세아가 품고 있는 오해를 풀기에도 용이하고 말이다. 무슨 오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것 보라.

지수도 지금 나에게 대답 잘하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지수의 꼬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가 아프지 않도록 손으로 부드럽게 꼬리를 훑어 물기를 짜냈다.

"어?! 아저씨. 잠깐- 하아앙!"

주르륵-

뚝- 뚝-

순간 크게 터지는 지수의 낯 뜨거운 신음 소리.

지수는 그녀 자신도 이렇게 큰 소리를 낼 줄 몰랐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양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뚝- 뚝-

지금 들리는 물소리가 내 옷에서 나는 소리인지, 내 얼굴에서 식은땀이 떨어지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아니, 이게. 그니까-."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에 기껏 다잡은 마음이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 지수의 꼬리를 꽉 붙잡고 말았다.

"하으읏···! 흐읏!"

다시 터지는 지수의 신음 소리.

"······."

"······."

망했다.

지수가 왜 이런 반응을 보여준 것인가 하는 생각은 둘째치고, 나는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생각이 너무 많아 펑 터진 것 같았다.

지수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다가 축 늘어져 내 위에 엎어졌다. 뭔가 몸이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흘리는 땀이었을까. 모르겠다.

한세아는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정도로 눈이 탁해졌다. 그녀가 잡고 있던 좌석의 시트가 뜯어지며 내부 스펀지가 튀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름이 돋았다. 다시 몸이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요함을 뛰어넘는 적막함만이 감도는 지금 상황.

나는 쉽사리 열리지 않는 입을 간신히 열어 짧은 문장을 내뱉었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말들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내가 바깥으로 꺼낼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오해입니다. 정말로요. 억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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