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1 - 91. 정비 (2)
"오빠! 언니가 이거 옷 한번 입어보고 사이즈 맞나 물어보고 오랬어요."
일행 중 가장 먼저 옷을 갈아입은 예린이 나를 불렀다.
"어. 고마워, 예린아."
나는 예린이 내게 건넨 옷가지들을 받으며 감사를 전했다.
상의와 하의, 그리고 ···속옷까지.
지수의 준비성에 감탄하며 곁눈질로 확인해 보니 얼추 내가 주로 입는 사이즈로 보였다.
"사이즈는 맞을 것 같은데? 근데 혹시 수건 같은 건 더 없어? 몸 좀 닦고 싶어서."
"아! 잠시만요."
도도도-
예린은 내 물음에 깜빡했다는 듯 어딘가로 뛰어가 사라졌다.
무궁화호는 완전히 어두컴컴해져서 예린이 달리다가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아이는 밤눈이 좋은 것인지 잘만 움직였다.
나는 예린이 자리를 비운 사이 지수가 한세아를 챙기고 있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서로 옷을 갈아입기 위해 최대한 멀리 떨어진 상태라 그녀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소리는 어렴풋이 들려왔다.
"풋. 키가 작으시네요. 그럼 뭐, 대충 아무거나 입으셔도 사이즈는 맞겠는데요? 이거 입어봐요."
"······네."
부스럭- 부스럭-
"···뭐야. ······크잖아. 다시 벗어요. 벗으라니까요?"
"풋. 전 이거 입어도 되는데요? 왜요? 아~. 좀 끼긴 하는데 그래도 괜찮아요.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제가 좀 큰 편이라서요. 그럼 전 현우씨 기다려야 해서 이만-"
"아, 안 돼요! 벗어요! 빨리! 아줌마, 빨리 벗으라구요!"
"어어? 잡아당기지 마세요! 흐읏! 제가···! 아줌마라고 하지 말라고 했죠? 이거 놔요···!"
"알았어요! ···언니! 언니! 됐죠? 그거 말고 이걸로 갈아입어요."
아무래도 둘의 신체 크기 차이가 있다 보니 사이즈 맞는 옷을 찾는데 난황을 겪고 있는 듯했다.
지수와 한세아는 서로 이름을 알려주는 시간을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위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름 정도는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녀들이 대화를 나누는 걸 들어 보면 벌써 친해진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자세한 사정 같은 건 다 같이 모였을 때 하거나 피로를 푼 다음에 해도 늦지 않겠지.
일단 이름만 알고 있는 사이라고 해도 지금은 그 정도면 족했다.
그때.
도도도-
"오빠! 여기 수건! 이걸로 닦아요."
예린이 갈 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달려왔다. 예린은 내가 수건으로 머리를 터는 것을 잠시 보더니 말했다.
"다 끝나면 가운데로 오면 돼요, 오빠. 전 미리 가 있을게요."
"알았어. 나도 금방 갈게."
나는 예린에게 작게 손을 흔들어 주며 마저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방금 뭐, 뭐예요? 현우씨, 지금 뭐 하시는···?"
한세아가 경악하며 입을 크게 벌렸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지수의 꼬리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오해입니다. 아무것도 안 했어요. 할 틈도 없었고요."
"그럼 틈이 있었다면 뭐라도 할 생각이었다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지수에게 도움을 바라는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지금 그녀는 몸을 축 늘어트린 채 간헐적으로 부르르 떨 뿐이었다.
'왜 이러는데···!'
정말 억울했다.
내가 지수를 어떻게 해 보려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가 당할 판이었는데 꼬리 한 번 잡았다고 상황이 이렇게까지 뒤바뀌다니?
그때.
번쩍- 우르르르릉-!
번개 빛이 커튼의 틈 사이를 뚫고 무궁화호 내부를 순간 환하게 밝혔다. 천둥소리가 바깥에서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이는 한세아가 팔짱을 끼고 어디 계속 말해 보라는 듯한 얼굴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왜인지 모를 두려움이 나에게 더 이상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며 경고하는 것이 느껴졌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 요란한 천둥소리에 정신을 차린 지수가 대신 말했다.
"하아···. 정말 별일 없었어요. 그리고 만약 별일 있었다고 해도 그게 그쪽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묘하게 개운해진 듯한 지수의 목소리.
"······!"
한세아는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내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여태까지 한세아의 등 뒤에 있던 예린의 칭얼거림에 무산되고 말았다.
"언니. 아저씨랑 같이 옷에 있는 물 다 짰어? 나 옷 갈아입고 싶은데···."
"어···? 예린아. 하던 거 마저 하라는 게 옷에서 물 짜는 일이었어? 정말로?"
한세아가 예린의 말에 살짝 당황하며 물었다. 예린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찌덕···
"제가 별일 없었다고 했잖아요. 예린아, 가자. 수건부터 꺼내줄게."
지수가 내 배를 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꼭 붙어 있던 나와 지수의 옷이 약간 끈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으니 나도 빨리 옷을 갈아입고 싶어졌다.
황급히 자리에서 벗어난 지수가 예린을 데리고 가니, 이곳에는 나와 한세아만 남게 되었다.
"끄응···."
긴장된 상태에서 계속 누워 있다가 일어나려고 하니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몸을 움직이니 심장 쪽이 다시 뻐근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튼 어찌어찌 자리에서 일어나니 한세아가 코앞에 있었다.
"세아씨. 고생 많았어요, 오늘. 그리고 세아씨도 지수에게 부탁해서 갈아입을 옷 좀 달라고 해요."
"······."
가까이서 보니 한세아의 입술이 파랗게 질린 것이 보였다.
"···세상에. 얼굴 차가운 것 좀 봐. 춥겠다. 얼른 옷 갈아입어요. 전 지수랑 세아씨 갈아입을 동안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천근만근인 몸을 완전히 일으켰고, 좌석칸 구석에 있는 시트에 기대 한숨 돌리려고 했다.
"···현우씨."
"네?"
나를 불러 멈춰 세운 한세아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녀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제 부탁 들어 주기로 한 거 잊지 않으셨죠?"
"그럼요. 뭐든지 들어 준다고 했었죠. ···제가 가능한 선에서만."
"히. 그럼 됐어요. 그것만 기억하고 있으시면 돼요.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갈아입을 테니까."
한세아는 나를 꽉 안더니 금방 떨어졌다.
한순간이었지만, 내 몸에 달라붙은 그녀의 소담한 가슴이 부드럽게 뭉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한세아마저 지수가 있는 곳을 향해 움직인 후, 나는 눈치도 없이 거세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괜시리 뻐근한 심장을 탓하면서.
***
쏴아아아아아-
뭐,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아무튼 잘해결되었다.
기억의 회상이 끝나자 어느새 옷도 다 갈아입은 상태였다.
마침 타이밍 좋게 지수와 한세아도 옷을 다 갈아입었고, 그녀들이 예린이가 말한 장소인 객차 중앙에 모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벅- 저벅-
빠득- 빠득-
지수, 한세아, 예린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곳을 향해 발을 내디딜 때마다 물기가 빠지지 않은 신발과 발이 서로 마찰되며 비벼지는 소리가 났다.
여분의 신발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갈아입을 수 있는 옷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여기서 더 바라는 것은 욕심이리라.
'이따가 지수한테 고맙다고 해야겠네.'
이런저런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그녀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도착했다. 지수와 한세아는 예린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예린아. 너 진짜 아줌, 아니 저 언니 옆에서 잘 거야?"
"응."
"이 언니 옆이 아니라? 정말로 저 언니 옆에?"
"응!"
"···왜?"
지수가 허탈한 목소리로 예린에게 말하고 있을 때, 한세아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제 옆이 좋다잖아요, 지수씨."
"오늘은 세아 언니 옆에서 자 볼래. 언니는 너무···."
그리고 예린이 자기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 뒤이어 입을 열었다.
"너무?"
"너무 딱딱해."
"······!"
"앗! 언니가 싫다는 게 아니야. 내 맘 알지? 그냥 세아 언니가 압도적으로 푹신해서 그런 거야."
충격받은 지수의 표정을 본 예린은 아차 싶은 얼굴로 뒤늦게 말을 덧붙였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그녀는 힘없이 무궁화호 좌석에 털썩 앉을 뿐이었으니까.
"내가··· 딱딱하다고···?"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나는 그녀들에게 물었다.
"무슨 이야기하는 중이야?"
"현우씨!"
한세아가 기분이 좋은 목소리로 내 말을 받았다.
"예린이가 제 옆에서 자고 싶다고 그래서요."
하지만 흐뭇한 기색에는 숨길 수 없는 졸음이 가득 느껴지고 있었다.
"둘이 벌써 친해졌나 보네요? 백화점에 있을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어떻게 친해진 겁니까?"
나는 한세아에게 물었으나, 대답은 예린에게서 들렸다. 예린은 한세아를 꽉 안으며 작게 말했다. 말꼬리가 길게 늘어지는 것을 보니 말하다말고 잠에 빠진 것 같았다.
"푹신푹신해요. 말랑말랑하고. 우리 엄마도 이렇게 컸는데······."
예린의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확실히 크긴 하지.
한세아가 내게 몸을 기댈 때마다 말랑함이 전해졌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착잡한 심경이 들기도 했다.
얼마나 엄마 품이 그리웠으면 저런 말을 할까 싶어서.
나는 예린의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주변이 너무 어두워서 간신히 좌석의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
결국 예린을 찾는 걸 포기한 내가 손으로 더듬어 가며 앉을 자리를 찾고 있을 그때.
"아저씨. 그럼 아저씨가 내 옆에서 자."
"어어?"
털썩!
지수가 내 옷깃을 잡아끌어 자기 옆에 앉혔다. 나는 당황하면서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녀는 어느새 내 팔을 휘감아 일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어디 가려고? 나랑 같이 여기서 자자."
"아니. 그냥 조금 놀라서. 그것보다 왜 이렇게 만지작거려? 간지럽게."
"···내 귀랑 꼬리는 좋을 대로 만져 댔으면서."
할 말이 없었다.
지수 말대로 정신없이 귀를 만진 것은 사실이니까.
"그래. 너 좋을 대로 해라···. 근데 지수 너 세아씨랑 이야기 좀 해봤어?"
"응. 아까 아저씨 옷 갈아입고 있을 때. ···언니라고 하기로 했어. 아저씨랑 동갑이라고 하더라. 나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다 아저씨, 아줌마라고 하는데. 칫."
"나는 뭐야. 난 왜 아직도 아저씨야, 그럼?"
나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저씨는···. 그냥 아저씨야. 왜,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니고···."
"그럼 괜찮잖아. 그것보다 아저씨."
"왜?"
"나 딱딱해?"
지수는 그 말과 함께 내 팔에 몸을 비비적거렸다. 보기 좋게 부푼 가슴이 팔에 문질러지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팔을 빼려고 했지만, 지수의 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나 딱딱하냐고···!"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진짜 왜 그래! 혼나고 싶어?"
"혼내보던가···!"
"너···. 아니다. 세아씨! 이대로 주무셔도 괜찮겠어요?"
나는 그런 지수를 내버려 두고 한세아가 있는 쪽을 향해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내가 답을 회피하는 태도를 취하자 이내 지수도 민망한 행동을 멈췄다. 비록 혀를 차기는 했지만.
"네, 넵! 쓰읍-. 저희는 일단 한 숨 자고 일어나서 나머지 이야기 나누자고 했어요. 피곤해서 입맛이 없어져서 그런가, 다들 밥도 자고 일어나서 먹자고 했네요. 혹시 현우씨는 배고프세요?"
"아하. 아뇨! 저도 지금은 입에 넣어도 안 넘어갈 것 같네요."
"그럼 저랑 예린이는 이만 잘게요. 너무 피곤해서···. 하암···."
한세아는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로 하품했다.
피곤한 기색이 가득 느껴져서 나는 그녀를 더 이상 붙잡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와 지수가 대화하고 있을 때, 조용했던 것을 떠올리니 한세아랑 예린은 이미 자고 있었던 것 같았다. 괜히 깨워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쩐지 지수가 이상한 말을 해도 잠잠하더라니.
하긴,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에 그녀들이 피곤할 만도 했다. 당장 나조차도 그러하니까.
"안녕히 주무십쇼. 세아씨. 예린이도."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깊게 잠에 빠진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한세아와 예린의 뒤를 이어 나도 자려고 했지만,
"···너도 자야지, 지수야."
아직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호박색 눈동자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꼬리가 살랑거리며 내 다리를 간지럽혔다.
"나 딱딱하냐고, 왜 말 안 해줘. 말해주면 잘게."
"아직도 그 얘기야? ···하나도 안 딱딱해. 됐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완전 엎드려 절 받기네. ···근데 아저씨. 저 사람 믿을만 한 거 맞아? 아저씨랑 같이 있어서 얼떨결에 데려오긴 했는데."
"어···. 좋은··· 하암-. 사람이야."
내가 길게 하품을 하면서 말을 하자, 지수는 흠- 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알아서 결론을 내렸다.
"아저씨 많이 피곤해 보이네. 말 걸어서 미안. 얼른 자. 혹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아저씨를 반드시 지킬 거니까."
이윽고, 지수는 눈을 감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지수가 아직 한세아를 경계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정말로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졌다면 한세아에게 예린을 맡기지는 않았겠지.
자기 목숨만큼 예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지수가 아니던가.
또 백화점에 있을 때, 한세아가 예기치 못한 위험으로부터 지수를 감싸려는 모습을 다 같이 봤기도 했으니 최소한의 신뢰 관계는 형성되었으리라 믿었다.
규칙적이고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니 순식간에 수마가 몰려와 나를 수면 밑으로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오늘은 정말 정신이 없는 하루였다.
매우 위험했던 하루이기도 하고,
매우 기뻤던 하루이기도 했다.
AK플라자, 명품관 나무 인간, 도롱뇽 변종, 김태진, 지수와 재회, 누더기 변종, 검은 화염.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너무 많았지만, 당장 풀 수 있는 의문들인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심장쪽 고통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휴식만 잘 취하면 금방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라는 직감이 들었다.
'피로만 풀면 괜찮아지겠지.'
어찌 되었든 모든 것이 일단락 된 오늘 하루는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다.
나는 정신을 완전히 놓으며 생각했다. 아무 일없이 푹 잘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꺄아아아악!"
···새벽에 갑작스러운 비명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