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92화 (93/497)

Chapter 92 - 92. 정비 (3)

"꺄아아아악!"

"허억!"

나는 귓가를 강타한 비명 소리에 발작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욱신!

갑작스럽게 잠에서 깨고,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난 반동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리며 강하게 조여 왔다.

쏴아아아아-

머리를 손으로 감싸 쥐며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내부가 조금 밝아진 걸 보아 새벽 아니면 아침인 것 같았고.

'뭐야?'

대체 무슨 일이지?

얼핏 보면 아무 이상 없어 보이는데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릴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예린은 아직 꿈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해 얌전히 자고 있었고, 지수와 한세아도···.

"······!"

지수와 한세아가 자리에 없었다.

그녀들이 누워 있던 좌석에 손을 대보니 다행히 아직 미약한 온기가 남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는 것은 그녀들이 자리에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그때.

"아흑!"

무궁화호 좌석칸 철문 너머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가라앉지 않는 두통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린 곳을 향해 움직였다.

"야잇!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지수?'

"왜, 왜 이러는 거예요, 지수씨···!"

'세아씨?'

지금 두 명이서 야심한 새벽에 뭐 하고 있다는 말인가.

저벅- 저벅-

벌컥!

나는 좀처럼 머리가 잠과 두통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것을 느끼며 철문을 열었다.

그러자 나는 지수와 한세아가 뭘 하고 있었는지 볼 수 있었다.

한세아의 뒷목을 콱 눌러 제압하고 있는 지수.

그런 지수에게 꼼짝도 못하고 있는 한세아.

나는 한동안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지수에게 뛰었다.

그 순간.

욱신!

비틀-

다시 심장이 크게 콱 조여지는 고통에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지만, 어찌어찌 균형을 잡고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뭐해?!"

나는 이를 악물어 신음을 숨기고 지수의 팔을 붙잡았다.

"아저씨! 이거 놔 봐! 이 사람 수상하다고!"

내가 한세아에게서 지수를 떼어놓으려고 하자, 지수가 힘을 줘서 버텼다. 그녀는 내 당혹 가득한 물음에도 당당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아니, 일단 세아씨 풀어 주고 이야기해보자. 응? 뭐가 수상하다는 건데?"

"칫."

지수는 내 얼굴을 살펴보더니 짧게 혀를 차고는 한세아를 풀어 주었다. 한세아는 붙잡힌 손목이 얼얼한 지 계속해서 매만졌다.

"흑. 아파···."

"세아씨, 괜찮아요?"

"현우씨······."

세상 서러운 얼굴로 고개를 드는 한세아.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나는 한 손으로 고통이 느껴졌던 심장 부근을 매만졌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지수를 바라보았다.

"자, 말해 봐. 둘이서 왜 그러고 있었는지."

"그러니까 저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서 뭘 하려고 했다니까?"

"저, 저는 그냥 화장실 가려고···."

"거짓말! 화장실은 이쪽이 아니라 반대편이라고요!"

"조용! 예린이 깨겠어."

나는 지수와 한세아의 말다툼을 중재하면서 지수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밤에 잠을 자지 않은 듯 눈동자가 살짝 충혈되어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속으로 자책했다.

지수는 나와 처음 만난 날에도 밤에 잠을 자지 않으며 속으로 경계하지 않았던가.

모두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한세아에 대한 설명을 미룬 것이 지금 이 꼴이었다.

나에게는 지수와 한세아 둘 다 믿을 수 있는 동료지만, 지수에게는 낯선 사람이 갑자기 비집고 들어온 상황과 마찬가지였으니까.

한세아의 처지에서 보면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갑자기 역으로 제압당한 상황과 마찬가지이고.

결국, 자세한 사정 설명 정도는 자고 일어나서 하면 된다는 내 안일한 생각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제 자기 전에 지수에게 좀 더 설명을 해줬어야 했건만.

나는 일단 아직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한세아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녀가 내 손을 밀어내며 곤란한 얼굴을 하는 모습에 의아한 얼굴을 해 보였다.

"세아씨. 바닥 엄청 차가울텐데, 왜 그러고 있어요? 제 손잡고 일어납시다."

"아, 아니···. 지금은 안 돼요···."

내 의아한 표정과 지수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까지 합쳐지니 한세아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폭탄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변하고 있었다.

눈꼬리에 맺혔던 눈물 방울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순간,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몇 가지 단어.

새벽, 닭, 한세아, 알.

나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마자 더 이상 상황 파악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한세아에게 필요한 것을 가져다 준 후 지수랑 같이 자리에서 비켜줘야만 한다.

아직 지수의 오해를 풀지 못했지만 지금 당장은 지수보다는 한세아가 우선이기도 하고.

아무튼 일단 이 자리에서 서둘러 벗어나는 게 한세아를 도와주는 일일 것이 분명하리라.

"···세아씨. 필요한 거 있어요? 지금 일어나기 곤란하시면 제가 갖다드릴게요."

한세아는 바뀐 내 어조에 그녀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내가 눈치챘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필요한 것을 말했으니 말이다.

"···마른 수건 한 장이면 돼요, 현우씨."

"마른 수건이요? 알았어요. 지수야, 들었지? 남는 수건 있어? 있으면 한 장만 가져다줘."

"수건이 왜 필요한데요? 아까는 화장실 가려고 했다면서요! 역시 거짓말이잖아!"

"나중에 이야기해줄 테니까. 빨리!"

지수는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계속되는 내 닦달에 서둘러 몸을 돌려 수건을 가지러 갔다.

내 말은 잘 듣는 걸 보니 나나 예린에 대한 과잉 걱정으로 일을 벌인 것 같았다.

그녀가 수건을 가지고 돌아오자마자 나는 그것을 한세아에게 바로 건네주었다.

그리고 지수가 들어온 것이 무색하게 다시 그녀를 이끌고 좌석칸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지수야, 들어가자."

"왜? 아니, 저 사람이 여기서 뭘 하려고 했다니까?"

"일단 따라 나와. 지수야, 제발···."

"씨이···. 알았다고."

벌컥!

쿵-

이윽고, 나와 지수는 철문을 굳게 닫고 좌석칸으로 들어왔다.

"아저씨.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나는 저 사람이 우리한테 뭔 짓 할 줄 몰라서 걱정되는 마음에 경계한 건데.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해? 너무해···."

나는 기가 죽어 귀와 꼬리를 축 늘어뜨린 지수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

"넌 잘못한 거 없어. 내가 잘못한 거지. 어제 바로 자는 게 아니라 간단하게나마 설명해줬어야 했는데."

"뭔데? 지금이라도 말해 줘."

"그···."

나는 지수에게 뭐라고 말을 해 줘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대체 뭐라고 이야기 해줘야 하는가.

한세아는 새라서 알을 낳는다고?

사람이 알을 어떻게 낳는가 하는 의문은 둘째치고, 내가 한세아 대신 '세아씨는 알을 낳아, 지수야. 아마 새벽에 일어난 것도 그것 때문일 거야.' 라고 말을 해도 되는 건가?

그래도 되나?

정말로?

간단한 말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기에는 어려웠다.

내가 입술만 달싹이고 있을 때, 지수의 귀가 순간 쫑긋거렸다.

"···뭐야? 아저씨. 지금 저 사람 뭐 하는 거야? 왜 신음을 내? 뭐냐고."

지수의 시선이 철문 너머로 고정되었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내게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혼란, 의문, 창피함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래, 한마디로 얼굴이 아주 새빨개졌다는 말이다.

나는 철문 너머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귀가 좋은 지수라면 어렴풋이 들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아주 생생하게 들리고 있거나.

지수의 꼬리는 언제 기가 죽었냐는 듯 프로펠러마냥 돌아가기 시작했다. 귀가 쉴 새 없이 쫑긋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헉!"

지수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놀라는 소리를 참았지만, 그녀의 눈은 철문 너머로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문 너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실하게 보이고 있는 것처럼.

꼬리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은 기본이었고, 어쩔때는 얼굴을 확 붉히며 나를 바라보기도 했다. 침을 꼴깍 삼키면서.

지수의 반응을 보니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정말 다행이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 아직 감도 잡히지 않고 있었으니까.

체감상 시간이 10분 정도 흐른 뒤.

끼이익-

철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뒤이어 한세아가 수건에 무언가를 감싼 채로 좌석칸으로 들어왔다. 수건에는 알 2개가 담겨 있었다.

"히끅!"

털썩-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친 한세아는 몸이 덜컥 하고 굳더니 이내 스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직까지 우리가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던 것 같았다.

"창피해······. 흐으윽-."

이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한세아였지만, 품에 감싼 알만큼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

"······."

나와 지수는 서로를 민망하게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섣불리 입을 열거나 움직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 같았지만, 이러다가는 침묵이 끝도 없을 것 같은 직감에 내가 먼저 나서기로 했다.

"지수야."

"···응."

"세아씨한테 사과해야지?"

"언니. 죄송해요. 제가 오해했어요. 그, 새랑 합쳐진 여자는 처음, 아니, 아직까지 살아있는 아니아니!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저도 같이 사과드리겠습니다."

지수가 한세아에게 사과하는 것을 머뭇거릴 것이다 라는 내 예상과 달리, 지수는 고개를 숙이며 바로 사과했다. 조금 많이 버벅이기는 했지만.

"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낯선 사람이 갑자기 새벽에 혼자 뭘 하려고 한 걸 봤다면, 누구라도 의심할 거예요. 오히려 그게 당연하죠. 미리 말 안한 제 잘못도 있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지수씨. 현우씨도."

한세아는 놀란 마음이 얼추 진정이 되었는지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지수의 사과를 흔쾌히 받았다.

"그, 낳으신 거예요? ···알을?"

지수는 한참을 우물쭈물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어 물었다.

"······네. 보는 건 처음이에요?"

"처음 봤어요···. 새랑 합쳐진 사람을 몇 번 보기는 했는데 다 남자였어서요. 언니는 날개도 안 보이고 해서 전혀 몰랐어요."

"아. 그건 좀 나중에 이야기해줄게요. 조금 사정이 있거든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언니. 그리고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뭔데요? 물어보세요!"

"···낳을 때 느낌이 어때요? 이런걸 물어보는 건 좀 실례인가?"

"···그것도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요. 둘만 있을 때."

한번 대화를 트기 시작하니 지수와 한세아가 다다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럴거면 대체 왜···?'

놀라울 정도로 빠른 태세 전환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헤프닝이라고 여기고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듯했다.

애초에 둘이 서로 사과하며 화해하기도 했고, 묘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기도 하니까.

여자들만의, 아무튼 그런 것들 말이다.

"자. 이야기는 그쯤 하십쇼. 지수, 너는 잠 좀 자둬야지. 많이 피곤해 보인다."

나는 지수와 한세아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어찌되었든 오해도 잘 풀린 듯 하고, 지수도 지금 눈을 조금이라도 붙여야 낮에 활동할 것이 아니던가.

잠을 자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바로 그때.

쿠웅!

'어?'

심장이 다시금 고통을 호소하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흐려졌다.

내 앞에 있는 지수가 둘. 아니, 셋. 아니, 넷. 점점 늘어나 수십 명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명백한 이상 현상에 나는 속으로 매우 당황했지만, 내 몸은 제어력을 잃고 바닥을 향해 곧장 쓰러지는 중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 뿌옇게 흐려지는 의식 너머로 지수와 한세아의 목소리가 웅웅 흩어져서 들렸다.

"아저씨! 왜 그래?!"

"현우씨!"

그리고 쓰러지는 내 몸을 받쳐주는 손길이 느껴졌고, 이내 의식이 완전히 암전되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한세아가 나를 묶고 있는 광경이었다.

이미 내 팔은 좌석과 하나가 된 상태였다.

"현우씨! 일어났어요? 제가 의사는 아니지만, 절대안정! 현우씨는 절대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어 보여요."

"···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