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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93화 (94/497)

Chapter 93 - 93. 정비 (4)

"뭐 하시는···겁니까?"

"말했잖아요. 절대안정을 취해야 한다구요."

나는 가물가물한 시야로 한세아의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바로 내 옆에 자리잡은 그녀는 노끈으로 내 팔과 열차 의자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줄로 묶어둔 겁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맞아요. 어쩔 수 없었다구요.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현우씨가 자꾸 가슴팍을 쥐어뜯으려고 해서-"

"···아저씨?"

한세아가 말을 하던 와중에, 지수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방금 막 잠에서 깬 듯 비몽사몽한 목소리를 내다가 이내 정신을 확 차린 듯 나를 크게 불렀다.

"아저씨!"

와락!

지수가 내 쪽으로 몸을 내던지며 나를 끌어안았다.

"컥!"

갑작스럽게 내 몸에 무게가 실리자 폐에 모여 있던 숨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내 상의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도 같이.

"왜 다쳤다고 말 안 했어! 왜 아프다고 말 안 했냐고!"

"아, 아니.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건 줄-."

"조용히 해! 내가 지금 말하고 있잖아!"

"넵."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흑.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기껏 다시 만났는데,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단 말이야······. 말 잘 들을 테니까 아프지마···. 응?"

"미안."

"흐으윽···."

나는 눈물을 쏟아 내는 지수의 등을 살살 쓸어내리며 달래면서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나씩 정리해 보자.'

새벽에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려서 잠에서 깬 것이 첫 번째.

소리가 들린 철문 너머에는 지수가 한세아를 제압하고 있었던 것이 두 번째.

내가 그녀들을 서둘러 떼어내고 어찌어찌 상황을 해결한 것이 세 번째.

그리고···.

'쓰러졌지.'

일단락된 상황에 안도하며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려고 한순간, 심장이 콱 조여지면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고 의식을 잃어 버린 것이 네 번째이다.

"흑. 흐윽. 아저씨···."

"괜찮아 괜찮아. 나 이제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흑."

"···응. 미안."

지수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나는 정말로 몸에 아무런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보다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간헐적으로 욱신거리던 심장도 지금은 조용히 박동하고 있을 뿐이고.

아니, 진짜로 몸에 가해지는 압박감이 줄어드는 느낌에 옆을 보니 한세아가 나를 묶은 줄을 다시 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더 묶어두고 싶었는데. 아쉽다."

한세아가 뭐라 작게 중얼거렸지만, 나는 애써 못 들은 척하며 고개를 다시 돌렸다.

시간이 지나자 선명해진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니, 무궁화호 내부가 전보다 더 밝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구름에 가려졌지만 해가 높게 뜬 모양이었다.

부슬부슬···

톡- 톡- 토톡-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린다.

가끔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스윽- 스윽-

한세아가 물기를 짜낸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 손이 달달 떨리고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니 걱정을 많이 한 것 같았다.

미안한 마음에 한세아를 바라보자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작게 물었다.

"정말 괜찮아요?"

"네. 아까도 말했지만 거짓말이 아니라 이제 진짜 괜찮습니다. 걱정 많이 했어요? 미안합니다. 근데 예린이는요?"

"예린이요? 현우씨 위에, 아니 뒤에 있어요."

"···뒤요? 헉!"

나는 한세아의 말에 고개를 뒤로 젖혀 후방을 바라보았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예린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기 때문이다.

"오빠. 몸 괜찮죠? 괜찮을 걸요? 근데 오빠 몸 되게 신기하다."

예린의 눈은 어느새 고양이의 눈으로 변했고, 나를 신기하다는 기색으로 보고 있었다. 예린의 귀가 쫑긋거렸다.

"신기하다고? 뭐가?"

나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예린은 내 의자 뒤에서 빠져나오더니, 나, 지수, 한세아가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의자는 두 개뿐인데 사람은 네 명이라 자리가 꽉 차다 못해 비좁아졌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자리를 피하는 사람이 없었다.

"예전에 제가 오빠 몸에 푸른 입자가 가득하다고 한 거 기억나요?"

-오빠도 파랑이로 가득 차 있어요!

나는 모텔에서 예린이 내게 해준 말을 떠올렸다. 확실히, 첫 만남 때, 내 몸에 푸른 입자가 가득 차 있었다는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어어. 기억나. 근데 그게 왜?"

"지금은 그 푸른 입자들이 한 곳으로 모였어요."

예린이 손가락으로 내 심장 부근을 찌르며 말했다.

콕! 콕!

"바로 여기. 심장 쪽에요. 뭐, 아무튼 그렇다구요. 그냥 그렇게 보일 뿐이라서요. 그리고 언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내가 오빠 괜찮다고 했잖아. 아무 이상 없을 거라구."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나 배고프단 말이야. 밥 먹자구!"

"···알았어. 아저씨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지수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눈가에 방울방울 매달려 있었다.

"어. 걱정 많이 했지? 미안. 진짜 괜찮아졌어."

나는 물기에 젖은 그녀의 눈가를 손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그럼 다행이고···."

"언니!"

"알았어!"

여태까지 날 꽉 끌어안고 있던 지수는 예린의 닦달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뭉그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눈물 자국이 자욱했지만, 다행히 진정이 많이 된 듯 한결 편해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부스럭-

나는 지수가 내 품에서 떠나자 도대체 내 심장이 어떤 상태이길래 하는 호기심에 더 참지 못하고 바로 상의를 걷어 올렸다. 상의는 살짝 축축했지만 걷어올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동안 고통이 심하게 몇 번 느껴진 적이 있기 때문에 겉으로도 무슨 표시가 나 있을 수도 있을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심장 부근은 아무런 티가 나지 않았다.

멍도 들지 않고, 푸른 핏줄이 부풀어 오르지도 않았으며 그저 맨살이었다.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도 보고, 두드려도 봤지만 완전히 회복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별다른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에 푸른 입자가 모여 있다는 예린의 말을 떠올리며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나 몸에 힘을 풀고 기다려도 보았지만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조용하게 박동하는 심장만 느껴질 뿐.

'뭐가 변하긴 한 건가?'

그리고.

"아."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은 한세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친 채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눈가가 붉은 것은 여전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붉어진 것 같았다.

"아, 아! 하던 거 마저 하세요, 현우씨!"

내가 슬그머니 옷을 내리려고 하자 한세아가 다급하게 다가오더니 내 팔목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당황하며 그녀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한세아의 손은 요지부동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평소보다 강한 힘을 내는 한세아.

"하던 거 마저 하기는 무슨! 이, 이거 놓으십쇼!"

"아이참! 같이 좀 보자구요!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아요! 힘 풀어요! 이익!"

나와 한세아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머지않은 곳에서 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네?!"

한세아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저씨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아저씨랑 예린이가 괜찮다고 했어도 아직 확실하게 괜찮은지 모르잖아요. 알았죠?"

"네, 네···."

나는 뒤로 물러나는 한세아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잡아먹힐 뻔했다는 생각에 심장이 쿵쿵거렸다.

아니, 한세아의 몸과 내 몸이 맞닿자 묘한 느낌이 들기는 했다. 순간 서로가 이어진 느낌이 들었었는데 찰나에 불과했기 때문에 확실하진 않았던 것뿐이지.

그녀의 가슴팍이 신경 쓰였지만 그마저도 한세아가 뒤로 물러나자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오해할까 싶은 마음에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뭐지? 조각 때문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그 미묘한 느낌을 해결하는 것보다 한세아와 둘만 있을 때 먼저 알아봐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조각에 무슨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했지만, 그건 다 같이 모였을 때 알아봐도 늦지 않았으니.

"세아씨. 근데 지수랑 새벽에 있었던 일 확실히 잘 해결한 거 맞죠?"

지수가 한세아를 억지로 부르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언니라고 하는 걸 들어 보니 새벽에 있었던 헤프닝은 잘 해결된 것 같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세아에게 물어봐야 했다.

지수와 한세아가 같이 있을 때 물어보면 서로 눈치를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네. 언니 동생하기로 했어요. 그냥 이름이랑 ···나이 정도. 그리고 제가 현우씨를 구했다는 것 정도? 저희 이제 친해요. 비록 현우씨가 쓰러져서 많은 이야기는 못 나눴지만요."

"아하···."

"지수씨가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니까요? 얼굴은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현우씨만 보면서 안 자려고 하고. 예린이가 소란에 잠에서 깨서 자기 언니를 달래서 망정이지. 그 덕에 지수씨가 잠을 조금이라도 잘 수 있었네요."

"······."

나는 일이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내가 지수에게 한세아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주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겠지만.

어찌 되었든 결국 잘 해결 되지 않았는가.

둘의 사이도 괜찮아 보이고 말이다.

"예린이가 현우씨는 잠깐 잠에 빠진 거라고, 이상없다고, 오히려 좋아지고 있는 거라고. 확신에 차서 말하던데 뭔가 있는 건가요? 그 아이? 단순히 위로하는 말이라기에는 느낌이 좀 다르던데."

"아. 그건-."

한세아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주려는 순간.

"오빠! 세아 언니! 밥 먹어요!"

"알았어!"

마침 예린이 우리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한세아에게 밥 먹으면서 이야기 해주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예린이에게 관한 이야기는 먹으면서 해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까요. 괜찮으시죠?"

"넵. 좋아요."

나와 한세아는 지수와 예린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부슬부슬···

톡- 톡-

저벅- 저벅-

빗소리, 창문을 약하게 치는 소리, 발걸음 소리가 조화롭게 섞여 화음을 낸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객차 내부를 드디어 살펴볼 수 있었다.

정신없이 여러 일들이 연달아서 벌어지기도 했고, 실제로 정신을 잃기도 했으니 그동안 지수와 예린이 지냈던 무궁화호 실내를 이제서야 살펴볼 수 있던 것이었다.

객차 내부에는 비록 약 9일 정도였지만,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생활감이 이곳저곳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좌석 위에 위치한 짐을 올려 두는 칸에 쌓여 있는 옷가지들, 세탁한 옷을 말리기 위해 걸어 둔 빨랫줄, 침대 대용으로 쓰였을 뒤로 확 눕혀진 좌석들.

···그리고 뭔가 수수해 보이는 것 사이에 끼어 있는 레이스가 달린 천 조각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구석에 마구잡이로 쌓여 있는 것을 보니 어제 지수가 다급하게 치운 흔적이 다분했다. 어제 나보고 밖에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던 이유가 저것이겠지.

아마도 빨랫줄에 무방비하게 걸려 있었기에 내가 창문을 통해 내부를 보지 못하게 막은 것 같았다.

지수와 예린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준 무궁화호.

다만 홀로 방치되고 있던 객차라서 그런지 낡고 오래된 느낌이 가득했다.

좌석 시트 곳곳에 곰팡이가 쓸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시트가 뜯어져 내부 스펀지가 튀어나온 부분에서는 퀘퀘 묵은 묘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내게도 맡아질 정도니, 후각이 좋은 지수가 한동안 고생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일행이 있는 이 무궁화호가 다른 건물들에 비해 튼튼하고 안전하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당장 어제도 우리를 도롱뇽 변종들의 파도로부터 살아남게 해준 고마운 존재가 아니던가.

저벅- 저벅-

이윽고.

나와 한세아가 지수와 예린이 있는 곳으로 도착했을 때 본 것은 당황한 지수와 예린의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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