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95화 (96/497)

Chapter 95 - 95. 정비 (6)

흠칫!

근처에서 음울한 시선이 느껴졌다. 강렬하지만 아주 우울한 시선이.

"······."

고개를 돌려 시선이 느껴진 곳을 바라보니, 그 끝에는 예린이 있었다.

플라스틱 포크을 입에 문 채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 지수, 한세아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예린.

"···이야기 끝났어요, 오빠? 언니들?"

예린이 툭 말을 내뱉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한창 꼬리가 살랑거렸던 것 같은데, 지금은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꽈악!

예린의 손에는 꽁치 캔 하나가 꽉 쥐여져 있었다. 아주 꽉.

이마에서 식은땀이 삐질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눈만 살짝 돌려 지수와 한세아를 바라보니, 그녀들도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분명 우리가 모인 것은 식사하기 위함이었건만, 하나둘씩 이야깃거리가 계속 나오다 보니 어느새 밥 생각이 싹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예린은 그런 우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고.

먼저 먹고 있으라고 이야기라도 해줬어야 했는데, 아이에게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아하하···. 예린아. 배고프지? 이제 먹-."

예린이 왜 이러는지 눈치챈 지수가 서둘러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예린의 말에 시도가 무산되고 말았다.

"어른들이 말하고 있을 때 칭얼거리면 안 된다고 배웠어요. 배고프지만."

"어어. 미안."

"특히 심각해 보이는 이야기면 더욱 방해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어요. 배가 많이 고프지만."

"진짜 미안."

"이야기가 언제 끝나나 보고 있었는데요···. 안 끝나더라구요. 그래도 기다렸어요. 배가 아주 많이 고프지만."

"······."

꽈악!

예린은 다시 한번 꽁치캔에 힘을 주며 물었다. 캔이 약간 우그러진 것 같았다. 실제로는 예린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만 할 뿐이었지만.

"이제 먹어도 되나요?"

"어어! 먹자! 아니, 먼저 먹고 있어, 예린아!"

지수가 힘이 부족한 예린을 대신해서 꽁치 캔 따개를 열어 주는 모습을 보다가, 나도 참치캔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에서 서늘한 금속통의 느낌이 전해졌다. 그리고 이왕이면, 차가운 것보다 따뜻하게 데워 먹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돌려 한세아를 바라보았다.

조각에 다시 푸른 입자가 충전되었으니 가스 버너를 다시 쓸 수 있지 않겠는가.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는지 확인도 해 봐야 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내가 별다른 말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벗어나더니 도구 가방을 들고 총총걸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지지직- 지이익-

한세아가 뻑뻑한 지퍼를 열어 꺼낸 것은 휴대용 가스 버너.

"······?"

꽁치 몸통을 입에 한가득 넣고 오물거리던 예린도.

허겁지겁 먹는 예린이 혹여 목이 막힐까 걱정되는 마음에 아이 앞에 물을 놓아주던 지수도.

순간 행동을 멈추고 한세아가 꺼낸 도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무엇을 하는 도구인지는 알겠지만, 왜 지금 가스 버너를 꺼냈는지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살짝 불안함이 서린 표정도 섞여 있었다.

"지수야. 아까 조각이 뭐냐고 물어봤지?"

나는 지수에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한세아에게 신호를 주었다. 한세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버너를 조립했다.

"어, 그렇지···? 근데 잠깐만. 저거 버너 아니야? 언니, 불 피우면 안-"

지수가 우려 가득한 목소리로 한세아의 행동을 막으려고 하는 순간.

푸확!

버너의 푸른 불꽃이 점화구에서 힘차게 솟아올랐다. 가스불에서 뿜어지는 열기가 약간 서늘했던 무궁화호 내부의 공기를 훈훈하게 달구기 시작했다.

"-되는데. 뭐야. 뭐냐고!"

지수는 소화제에 잡아먹히지 않는 불을 보며 펄쩍 뛰었다. 귀가 쉴 새 없이 쫑긋거렸고, 꼬리의 털이 곤두서 있는 걸 보니 지수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조각만 있으면 불 정도는 쓸 수 있더라. 총도 몇 발 정도 쏠 수 있고. 이 안에 있는 푸른 입자 보이지? 이게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따뜻하다."

지수가 불멍을 때리면서 작게 말했다. 열기에 한껏 취한 지수를 잠시 내버려두고 나는 한세아를 바라보았다.

"세아씨, 아까 저한테 물어보셨던 것 있죠? 예린이 이야기요."

"아. 네"

"예린이는 지금 여기 있는 푸른 입자를 볼 수 있어요. 저희는 조각 안에 있는 것만 볼 수 있지만, 예린이는 조각 밖에 있는 푸른 입자랑 검은 입자를 볼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한세아에게 예린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 해주고 있을 때,

"항상 보이는 건 아니에요!"

예린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것도 잠시, 다시 입을 맹렬하게 놀리기 시작했지만. 꽁치를 꼭꼭 씹어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렇다고 합니다."

"조각 안에 말고, 그냥 공기 중에도 떠다니고 있었구나···. 꼭 소화제같네. 그럼 푸른 입자는 대강 알겠는데 검은 입자는 뭐예요?"

한세아는 의문을 표했다.

"지금까지 경험에 따르면, 푸른 입자는 저희한테 도움이 되고, 검은 입자는 위험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랑 세아씨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도롱뇽 변종이나 옥상에서 본 누더기 변종에게서 검은 입자가 뿜어지고 있었을 겁니다. 저희가 죽인 거미 변종에서는 확실하게 검은 입자가 뿜어졌고요."

"확실히 검은 입자가 색도 그렇고, 전부 위험한 것들에게만 붙어있나 보네요. '검은 입자가 보이는 곳은 위험하다'라···."

"네. 그리고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옥상에서 다들 본 푸른 장막. 그거 아마 내가 했을지···도···?"

모호하게 끝나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그녀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아저씨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린 지수.

"흐음···."

팔짱을 낀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한세아.

우물우물-

처음 불이 켜졌을 때는 신기하게 바라보았지만, 이내 흥미가 식은 듯 꽁치를 먹는 데만 집중하고 있는 예린.

이윽고.

"그, 그럼 한번 보여줘! 아저씨가 한 게 맞다면 다시 할 수 있을 거 아냐! 응? 빨리이! 맞다. 세아 언니가 말해줬단 말이야. 아저씨 손에서 불이 뿜어졌다고. 그래서 거미 변종 죽일 수 있었다면서. 완전 대단하잖아!"

핫! 하고 정신을 차린 지수가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꼬리가 붕붕 돌아갔다.

내가 기절한 사이에 한세아가 그런 이야기도 해주었는지, 지수의 마음속에는 어느새 내가 마법사로 변해 있었다.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마음속에 부담감이 가득 찼다.

"아, 아니. 일단 진정해, 지수야. 내 착각일수도 있으니까. 말 그대로 추측이라니까? 아닐 수도 있다고."

나는 도움을 바라는 눈으로 한세아를 보았지만, 그녀는 내 기대를 배반하고 오히려 내 의견에 힘을 실어 주었다.

"아뇨. 총알을 막아 낸 푸른 장막의 기적이 일어난 건 사실이잖아요. 그리고 만약 그걸 할 사람이 있다면 현우씨뿐인걸요. 제가 저번에 말한 적 있었죠? 현우씨가 손에서 푸른 불꽃을 뿜어 거미 변종을 태워 버렸다고."

"후아. 그거 오빠가 한 거 맞아요. 확실할걸요? 그때 오빠랑 세아 언니 가슴이랑 파란 선으로 연결되는 걸 봤었어요. 눈 깜빡이니까 바로 사라졌지만요."

더불어 가만히 있던 예린까지.

예린은 벌써 꽁치캔 하나를 다 해치운 듯 입술에 기름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표정도 나른해 보였고.

"···가슴이 아니고, 조각이야. 예린아···."

"아무튼요."

한세아가 작게 항변했지만, 배가 부른 고양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예린은 작달막한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배가 충분히 부른 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무튼 한세아와 예린이 나를 두둔하는 의견을 내자, 모두의 시선이 다시 내게 모아졌다. 이제 그녀들의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묻어 있었다. 그것도 잔뜩.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지는 게 느껴졌다.

"후우···."

여기서 발을 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도 해 보기 위해 일단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조각을 느껴보려고 노력했다.

예린의 말처럼 푸른 장막이 펼쳐질 당시에 나와 조각이 선으로 서로 연결 되었었다면, 지금이라고 못할 것은 없지 않겠는가.

푸른 입자로 이루어진 장막이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황홀경을 회상하며 조각으로부터 다시 한번 기적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나와라! 보호막! ···장막! 나와! 합!'

내가 아무리 속으로 외쳐도 조각은 아무런 반응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저 가스불이 켜진 탓에 조금씩 푸른 입자가 줄어들다가 이내 내 심장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다시 충전만 될 뿐.

"음. 안 되네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주문 같은 것을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한다면 내가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무언가가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무슨 주문을 말해야 하는지도 의문이고.

"안 되면 억지로 하지 마세요, 현우씨. 제 추측이지만 아마 쉽게 사용될 만한 기적은 아닌 것 같으니까. 생각해 보니까 푸른 불을 내뿜을 때도 그랬고, 푸른 장막을 만들어 낼 때도 현우씨가 기절했잖아요. 다른 조건이 또 필요한 걸지도 모르고요. 차차 알아가면 되죠."

"네? 그럼 아저씨가 오늘 기절한 게 그 부작용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요, 언니!"

"히끅!"

지수가 화들짝 놀라며 한세아를 매섭게 타박했다. 한세아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나는 한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쉬운 눈길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안 돼! 아저씨가 다치면 안 돼. 나 안 봐도 되니까 막 하려고 하지 마! 응? 아저씨가 또 기절하는 건 싫어···. 그러니까··· 조각 이리 내놔! 에잇!"

내 표정을 본 지수는 기겁하며 손을 뻗었다.

신나서 달려들 때는 언제고, 지금은 필사적으로 내 손에서 조각을 떼어내려고 아등바등하는 그녀였다.

"알았어 알았어. 안 할 테니까 밥이나 먹자. 기왕 버너도 켰으니까 통조림이나 데워 먹자고. 가스 남아 있을 때 써야지."

"가스통은 새것 하나 더 있으니까 한동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현우씨."

"들었지? 지수, 네가 먹을 꺼 여기 위에 올려놔. 예린이는 따뜻하게 안 먹어도 되겠어?"

나는 지수와 예린을 향해 말했다.

"응! 난 이거!"

"전 괜찮아요, 오빠. 어차피 뜨거운 걸 못 먹거든요. 먹으면 혀가 아파서요. 그래서 차라리 차가운 걸 먹는 게 나아요. 이미 배부르기도 하구요. 하아암···."

지수는 꼬리를 붕붕 휘두르며 신나서 닭가슴살 캔을 위에 올렸지만, 예린은 앙증맞은 혀를 빼꼼 내밀며 거절했다. 이내 예린은 나른한 하품을 길게 하며 기지개를 켰다.

부글부글-

캔을 뜨겁게 달구는 가스불에 의해 닭가슴살이 가지고 있는 냄새가 좀 더 강렬하게 변하자 지수의 꼬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붕붕 돌아가기 시작했다.

꿀꺽-

코를 킁킁거리며 침까지 꼴깍 삼키는 모양새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통조림이 뜨겁게 달궈지는 동안 지수와 한세아는 가만히 있기에는 뭐 했는지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주로 도구 가방에 들어 있는 물품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 언니, 이거 총 아니에요? 옥상에서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생긴 건 똑같아 보이는데. 아닌가? 와 이런 것도 들어 있네요."

"한 자루 더 가지고 있었거든요.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백화점에서 탈출할 때 못 도와줘서 미안했어요. 여분의 총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총 소리에 이목이 더 끌릴 것 같아서 못 쐈거든요."

"아하. 괜찮아요, 언니. 그때 총 쐈으면 위에 있는 놈들까지 상대해야 했을 걸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이제 다 데워진 것 같은데 밥이나 먹죠."

"여기 포크요. 아니면 숟가락으로 줄까요?"

"아뇨! 이거면 충분해요. 잘 먹겠습니다···! 흐윽. 뜨거워···. 너무 좋아아···."

"언니. 나 계란 삶아먹어도 돼?"

"아니, 그건 안 돼. 내려놔. 언제 가져온 거야?"

"칫."

지수가 기분이 좋은 상태를 틈탄 예린의 난입이 있었지만 칼 같이 거절당했다.

나는 그녀들이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잠시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바로 옆에 있는 커튼을 살짝 들어 바깥을 살펴보았다.

부슬부슬···

하늘에서부터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자갈에 부딪치면서 작디작은 거품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톡- 톡-

거품들은 자기들끼리 모이다가 터지기도 하면서, 끝내는 거품 뭉치가 되어 물웅덩이를 떠다닌다.

마치 꽃처럼.

가만히 바깥 풍경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어제 있었던 일들이 다시금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불과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지만, 매우 긴 시간이 지난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김태진.

그는 정말로 죽었을까.

만약 한세아의 말처럼 김태진이 살아 있었다면.

검은 화염을 일으킨 존재가 김태진이었다면.

그가 건물을 무너트려 누더기 변종을 매장시켰다면.

그는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자기 딸이 괴물이 되어 올라온 광경을 보았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알 수 없었다.

다만 김태진은 마지막까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후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사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분명 그가 했던 일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모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잠시나마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적어도 나만큼은.

적어도 그를 위해.

···적어도 명복만큼은.

빌어 줄 수 있으리라 믿으며.

낭화(浪花).

비록 생화도, 조화도 아닌 보잘것없는 물거품으로 된 꽃이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있던 곳 주변에 수도 없이 놓여져 있으니 그 정도면 김태진도 만족할 것이다.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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