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96화 (97/497)

Chapter 96 - 96. 정비 (7)

"······."

나는 지금 한세아와 함께 객차 끝부분에 멍하니 서 있는 중이었다. 지수와 예린은 내 반대편 끝부분에 서 있는 중이고.

나와 한세아는 옹기종기 모여 성냥 한 개비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아저씨! 준비 됐어?"

지수가 멀리서 내게 외쳤다.

"어어. 준비 됐어. 시작할게!"

나는 말로는 준비되었다고 했지만, 실상 내가 할 준비라는 것은 없었다.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탁! 탁-!

옆에 있는 한세아가 긴장한 표정으로 성냥을 킬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밥도 잘 먹었겠다, 몸에 남은 피로도 사라져 비가 그치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다, 하면서 마땅히 할 일이 없어 그동안 지수가 어떻게 지냈는지 말하려던 우리가 왜 이러고 있는가.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오빠."

예린이 나를 불쑥 불렀다. 예린은 한세아가 매고 있는 목걸이에 달린 조각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조각 내부에는 푸른 입자가 맴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응?"

"오빠가 이 조각 덕분에 버너랑 총 쏠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렇지?"

"저 푸른 입자가 들어 있어야 쓸 수 있다고도 했죠?"

"그렇지."

"···결국 푸른 입자가 다 하는 거 아니에요? 조각은 그럼 그냥 건전지 같은 거 아닌가."

"그···렇지? 나는 충전기고."

나와 예린이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보고 있던 한세아가 눈치껏 목걸이를 풀어 조각을 꺼내 가운데에 두었다.

예린의 시선이 조각을 향했다가 내 심장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며 내게 의문을 표했다.

"오빠 몸에도 푸른 입자가 있는데, 오빠는 총이랑 불 못 써요? 아닌가? 오빠 처음 봤을 때도 푸른 입자가 있기는 있었는데···. 그때는 못 썼다고 한 것 같기도 하고···. 에잉. 모르겠다."

예린은 말하던 와중에도 흥미가 식었는지 한세아에게 가더니 폭 안겨 쉬기 시작했다.

한세아는 예린이 쉬기 편하게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녀의 소담한 가슴이 보기 좋게 흔들렸다. 이내 한세아는 자리를 잡은 예린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예린의 의문은 타당했다.

내가 월드 모텔에서 지수와 예린에게 구해졌-

'···구해진 게 맞나?'

아무튼 구해졌을 때, 예린이 내 몸에 푸른 입자가 있어서 구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조각 내부에 있는 푸른 입자를 이용해 화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내가 비가 오던 새벽에 추위를 떨쳐 내기 위해 성냥을 켰을 때 소화제가 성냥불을 꺼트리는 현상이 나타나서는 안 됐다.

나와 조각의 차이는 무엇인가?

'생물과 무생물?'

'푸른 입자의 응집도 차이?'

만약 생명의 유무가 조건이라면 나는 조각을 어떻게 충전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응집도의 차이라면 지금은 푸른 입자가 몸에 퍼진 것이 아닌 심장 쪽에 모여 있다고 하니 그때와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인가.

또 조각의 힘이 미치는 반경은 어느 정도 되는가.

1m? 2m?

혹은 그것보다 더 좁은 직접 접촉?

지수와 예린을 찾기 위해 플라자 건물로 들어갔을 때 한세아가 간략하게 말해 준 적이 있었지만, 내가 다시 조각을 충전시킬 수 있는 상태가 된 이상 조각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직접 실험해 보는 것.

나는 한세아를 기대감을 가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강렬한 시선에 그녀가 흠칫하며 물었다.

"···왜요?"

"세아씨. 혹시 조각이 발동? 사용되는 범위가 어느 정도입니까? 저번에 전자 시계 같은 건 직접 만져야 된다고 했었죠? 맞나?"

"네. 제가 직접 손으로 들어야 하고,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작동을 멈추더라구요. 가스 버너 같은 건 한 1~2미터 정도 떨어져도 괜찮지만요."

한세아가 조각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말을 이었다.

"근데 제가 만진다고 다 작동되는 건 아니에요. 그랬다가는 전 아무것도 함부로 손 못 댈 걸요? 제가 지금까지 보여 줄 기회가 없어서 말은 못했는데 참 신기하게도 제가 원하는 것만 딱딱 작동되더라구요. 마치···."

그녀는 말을 끝맺기를 머뭇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것 같았다.

"···마치 조각이 세아씨 생각을 읽는 것처럼요?"

"하아. 네. 안 믿기죠? 조각이 아니면 아마도 여기 들어 있는 푸른 입자가 그런 걸 수도 있고요. 어찌 되었든 믿기 힘들다는 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제가 몇 번 실험해봤을 때 항상 동일한 결과가 나오긴 했어요. 한번 할 때마다 푸른 입자가 눈에 띄게 사라져서 금방 그만뒀지만요. 그때는 현우씨도 없었을 때라 충전할 수도 없었잖아요?"

"흐음···."

하긴, 만약 한세아가 조각을 들고 있을 때. 손대는 것마다 전자제품이나 차들이 동결 상태에서 벗어나 작동을 시작한다면 조각은 축복이 아닌 일종의 재앙이나 다름없다.

한창 숨을 죽이고 숨어 있어야 하는 상황에 실수로 무언가를 잘못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쉽게 해결할 일을 엉망진창으로 꼬이게 만들 것이 분명하니까.

"결국 현우씨가 알고 싶은 건 그거잖아요? 예린이가 아까 말한 것처럼 현우씨 심장이 조각을 대신할 수 있느냐, 없느냐. 맞죠?"

"그렇죠. 조각 충전도 할 수 있는데, 저라고 조각이 하는 걸 못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만약 가능하다면 저희가 쓸 수 있는 패가 늘어나니까요."

"···현우씨에겐 미안하지만, 그걸 알아보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네요."

"네? 왜요?!"

나는 당황해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여유가 있는 지금 알아보는 것이 아니면 언제 알아본다는 것인가.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건만.

바로 그때.

"무슨 이야기하는 중이야? 나도 알려줘."

지수가 물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들어왔다. 비 올 때 씻어 둬야 한다며 밖에서 물을 받아온 그녀였다. 그 탓인지 지수의 얼굴은 한층 더 반짝이고 있었다.

"그냥. 내가 조각을 대용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이야기하고 있었어. 혹시나 조각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물론,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긴 하지만."

"그리고 저는 당장 알아볼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었어요. 저도 궁금하긴 해도, 전자 시계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불을 피워야 한다는 거니까요.

근데 그럴 수 있는 건 가스 버너밖에 없거든요. 하나뿐인 버너를 실험에 쓸 수는 없잖아요. 만약 실패하면 다시는 못 쓰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포자가 생기면 나무 인간들이 유인될 수도 있고요. 문제가 많아요.

"

나와 한세아가 번갈아 가면서 사정을 설명하자, 지수는 무엇이 문제냐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불이 문제라는 거야?"

"그렇지?"

"나 성냥 있는데, 이걸로도 되나?"

"······!"

나와 한세아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자, 지수가 벨트 가방에서 잔뜩 구겨졌지만 작은 성냥 한 갑을 꺼냈다.

턱을 치켜들고, 허리춤에 손을 올리는 묘하게 우쭐거리는 모양새였다. 꼬리가 살랑거리는 건 덤이었다.

왜인지 익숙해 보이는 성냥갑에 유심히 살펴보고 있자니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게, 지수가 꺼낸 성냥갑은···.

"어?! 지수, 너 그거!"

"응. 아저씨한테서 받은 거. 내가 잘 가지고 있었지~. 나 잘했지? 힛."

내가 지수와 예린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들에게 압수당했던 성냥갑이었으니까.

"받은 게 아니라 뺏-"

"아저씨. 나 잘했냐고 묻잖아."

"응. 잘했어. 네가 최고야."

가슴팍을 내밀며 우쭐거리는 지수에게 성냥갑을 건네받은 나와 한세아는 약간은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보다 픽하고 웃었다.

그 순간.

툭-

"······?"

아직 살짝 열려 있는 지수의 벨트 가방에서 약간 누리끼리해진 천 조각 하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또 묘하게 익숙한 느낌을 풍기는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았고, 이내 경악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좋은 의미의 경악은 아니었다.

"···앗."

내가 슬쩍 고개를 든 순간 지수의 눈과 마주쳤고, 그녀는 방금 전까지 하얗던 얼굴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새빨개진 얼굴로 변했다.

"···그거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이, 이것도 아저씨가 준 거···."

우쭐하던 기색은 어디 가고 부끄럼쟁이만 남았는지.

지수는 조용히 바닥에 떨어진 천 조각을 다시 챙겨 넣었다.

그래, 내가 심한 꽃가루에 고생하는 지수를 위해 상의를 찢어 그녀의 얼굴에 둘러 주었던 천 조각을.

"···진짜 암캐네."

옆에 있는 한세아가 뭐라고 작게 웅얼거렸지만 나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지수는 한세아가 무슨 말을 했는지 확실하게 들은 것 같았다.

한세아가 중얼거린 것과 동시에 지수의 귀가 쫑긋거렸고 헛기침을 했기 때문이었다.

"크흠! 안에 여섯 개비 정도 있었는데 다 부러지고 멀쩡한 건 한 개비밖에 안 남았더라. 아무튼! 이거면 됐지?"

"···응. 됐기는 한데······."

"그럼 왜? 또 뭐 필요해? 말만 해! 내가 다-"

"···혹시 다 쓴 성냥갑도 돌려줘야 해?"

나는 수집욕이 있어 보이는 지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그녀의 반응은 심상치 않았다.

이 이상 붉게 변할 수 있을까 싶었던 얼굴은 순식간에 다시 하얗게 질렸고, 이내 지수가 눈초리에 눈물을 매단 채 내게 달려들어 나를 깨물기 시작했으니까.

"악! 아파! 미안! 미안해! 짜잔! 농담이었- 아프다니까! 아악! 멈춰-! 아윽!"

그 뒤로 지수가 진정해서 멈췄을 때는 이미 내 몸이 그녀의 이빨 자국으로 엉망진창으로 변한 직후였다.

기껏 생각해서 물어봤건만.

뭔가 잔뜩 깨물렸고.

뭔가 잔뜩 맡음 당했다.

잔뜩 더럽혀지고 말았다.

***

목덜미와 어깨 쪽이 욱신거리는 느낌에 나는 회상에서 벗어나 현재로 돌아올 수 있었다.

"현우씨! 그럼 할게요···!"

한세아가 비장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조각은 반대편에 있는 지수가 들고 있는 상황.

불을 유지할 수 있는 조각의 유효 거리는 대략 1~2m 정도니 나와 지수는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고 할 수 있었다.

만약 한세아가 킨 성냥불이 꺼지지 않고 유지가 된다면, 내가 조각을 대신 할 수 있다는 말이고.

만약 한세아가 킨 성냥불이 유지되지 못하고 소화제가 불을 꺼트린다면, 나는 조각을 대용하지 못하는 그저 충전기에 불과하다는 말일 것이다.

부스럭!

그리고 소화제로 인해 생기는 포자는 내가 들고 있는 비닐에 바로 집어넣어 봉인하기로 했다.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성냥불로 생기는 포자 덩어리는 아주 작을 것이기에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열기는 소화제 포자가 생기는 순간 사라지니 비닐 봉투가 녹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부슬부슬···

게다가 아직 밖에 비가 내리고 있으니 냄새를 풍기더라도 멀리 퍼지지 못하고 지워질 것이고, 비가 그치자마자 우리는 바로 떠날 예정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실패가 아닌 성공만 한다면 전부 기우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할게요···! 현우씨, 진짜 해요!"

"아 좀! 빨리해요! 저 미치는 꼴 보고 싶어요?"

자꾸만 망설이는 한세아를 재촉하자 그녀는 눈을 딱 감고 성냥 머리를 성냥갑의 마찰면에 긁어 불을 피웠다.

탁-! 치익!

"오!"

성냥의 머리 부분이 마찰을 받으며 순식간에 타오르는 모습에 나는 탄성을 내뱉었지만,

꾸득!

"앗! 안 돼! 현우씨! 비닐! 비닐!"

"여기! 여기요!"

이내 허둥지둥 비닐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붉게 타오르고 있던 성냥에 곧바로 소화제가 달라붙어 성냥불을 하얀 덩어리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

"······."

나와 한세아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가, 반대편에 있는 지수가 다가오는 걸 보며 허탈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눴다.

"현우씨. 현우씨는 그냥 충전기 역할만 잘하면 될 것 같아요."

"···네."

"뭐야. 실패했네? 아저씨 완전 불도 못 피우는 허접~, 충전기~."

딱콩!

"악! 씨이···."

많은 기대를 가지고 한 실험은 성공하지 못했고, 못된 말투로 나를 놀리는 지수에게 꿀밤을 먹이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요란한 과정을 거친 것과 달리 결과는 허무했다.

내가 얻은 것이라고는 수많은 지수의 이빨 자국뿐.

그래, 참으로 허무한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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