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97화 (98/497)

Chapter 97 - 97. 정비 (8)

"아저씨! 내일이면 비 그칠 것 같은데? 주변에 나무 인간들도 없나 봐. 이상한 소리도 안 들리네."

지수가 커튼을 살짝 젖혀 바깥을 살펴 보며 말했다. 그녀의 귀가 방향을 바꿔가며 쫑긋거렸다.

부슬부슬···

나도 지수처럼 옆 커튼을 살짝 젖혀 창문 너머를 보았다.

온종일 끊이지 않고 내리던 빗줄기는 점차 약해지고 있어서 그녀의 말대로 자고 일어나면 비는 멎어 있을 것 같았다.

비가 그치는 때가 우리가 이곳에서 벗어날 때가 되겠지.

그리고 나는.

"아무리 장마라고 해도 그렇지. 좀 심하지 않나···?"

자꾸만 비가 발목이 붙잡는 상황에 불평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이 7~8월쯤이고, 이 시기가 장마철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장마철에 비가 억수로 많이 내린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가 내리는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앞으로 갈 길이 멀건만.

이래서야 남산에 언제 도착하겠는가.

뭔가 그동안 위험한 일은 많이 겪었는데, 실상 남산과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또 비는 단순히 나, 지수, 예린, 한세아의 발걸음을 멈추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내 짜증을 크게 만드는 데 한 몫 했다.

아파트를 지지대로 삼은 거대한 나무들의 성장을 촉진하고, 건물과 도로를 뒤덮은 넝쿨들을 활성화시키며, 길거리를 어기적거리며 돌아다니는 나무 인간들의 움직임을 부드럽게 만들기까지 하는 소나기.

비가 와서 좋은 점이라고는 마실 수 있는 식수 생긴다는 것밖에 없었다.

"아저씨 말대로 조금 이상하긴 해."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지수가 말했다. 그녀의 꼬리는 이리저리 살랑거리다가 허리에 착 하고 감겼다.

"내 기억으로는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게 된 시기가 대략 한 달 전쯤? ···응. 얼추 한 달 전이 맞을 거야. 그때부터 비가 막 쏟아지더라고."

"···한 달?"

"그렇다니까. 물론 그 전에 비가 아예 안 온 건 아니었지만. 장마철이라고 해도 내가 살면서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는 건 처음 봐. 완전 역대급."

내가 작게 되묻는 말에 지수는 확답을 내려주었다.

"언니!"

"아, 예린이가 부른다. 나 갈게. 커튼 확실히 닫는 거 잊지 말고."

"어어."

그녀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예린이 부르는 소리에 자리에서 벗어났다.

한 달.

나는 지수가 말한 한 달이라는 기간을 속으로 곱씹었다. 예전에 지수와 한세아가 내게 말해 준 정보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하늘에서 비가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 한 달 전.

거대한 나무들의 뿌리가 아스팔트 도로를 헤집고 다니는 것이 3주 전.

뿌리가 이동하는 여파인지는 몰라도 지진이 자주 일어나게 된 시기도 3주 전.

한세아가 갈라진 도로 틈에서 푸른 조각을 주운 것 또한 대략 3주 전.

그리고 거미 변종 같은 매우 위험한 괴물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대략 3주 전.

세상을 한 차례 뒤바꾸고, 다시 한번 세상을 바꾸려는 모든 움직임들이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나서 일괄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우연?

아니면 의도?

만약 우연이라면, 그냥 그렇구나 하며 넘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만약 흡사 이상 기후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비가 비정상적으로 많이 내리는 것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의도라면, 우리는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했다.

대체 누가? 무엇이? 어떻게? 왜?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푸른 입자나 검은 입자가, 대기 중에 퍼져 하늘 가득히 비구름을 만들어내어-

'···지구의 환경을 바꾼다?'

나는 뇌리를 스친 생각에 몸을 바싹 굳혔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실상 지구의 환경은 이미 바뀌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늘을 날아가던 비행기의 엔진 소리, 도로에 울려 퍼지던 자동차 경적 소리, 쉬는 시간을 알리던 학교의 종소리, 번화가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사람들의 말소리.

그것들이 들리지 않은 지 한참 지났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나무 인간들과 변종의 기괴한 울음소리, 넝쿨 체액이 뿜어지는 소리, 살점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의 비명 소리뿐이었으니.

찬란하던 문명의 빛은 한순간에 스러졌고, 빈자리를 거대한 나무, 질긴 넝쿨, 괴물들이 채운 것이 현재 상황이다.

마치 괴물들이 살고 있는 숲으로 변하는 것 같지 않던가.

불현듯, 내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된 어떤 존재들의 속삭임이 떠올랐다.

나를 살리려고 한 목소리와 나를 죽이려고 한 목소리.

선의, 가여움, 죄스러움을 가진 목소리와 악의, 증오, 역겨움을 가진 목소리.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푸른 입자와 검은 입자.

이것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우리가 겨우 알 수 있는 것은 푸른 입자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검은 입자는 우리에게 해가 된다는 것이다.

비록 일방적이지만,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보면 지성이 있다는 말일 텐데.

그것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길래 지구를 자기들 입맛대로 바꾸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허무하게 죽였다는 말인가.

그리고 왜 또 다시 지구의 환경을 더 위험하게 변화시키려고 하는가.

알 수 없었다.

최종 목적지인 남산 연구소로 가면 모든 비밀이 풀리게 될까.

바로 그때.

"현우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말랑한 손가락이 내가 잔뜩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살살 눌러 피는 것이 느껴졌다.

상념에서 벗어나 눈을 슬쩍 뜨니 한세아의 가슴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아, 세아씨. 그냥 저희가 앞으로 갈 목적지나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그런 것들 좀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풀릴 거예요."

"그렇겠죠?"

"그럼요!"

한세아는 불안에 떠는 아이를 달래듯 내 머리를 끌어안아 가슴으로 감쌌다.

포옥-

포근한 느낌과 함께 마음이 안정되는 살 내음이 맡아졌다. 그녀가 내 등을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다 잘 될 거예요~."

앞으로의 여정은 매우 고되고 위험할 것이 분명하다.

"위험하긴 하겠지만요!"

비가 내릴수록 주변 환경이 위험하게 변한다는 내 예상이 맞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거미 변종보다, 누더기 변종보다 위협적인 변종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현우씨 혼자 가는 게 아니잖아요."

혼자였다면 출발도 못하고 길 한복판에서 고꾸라졌을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혼자서는 이겨 내지 못할 위험한 상황들이 수두룩하기도 했고 말이다.

"힘들거나 고민 있으면 언제든지 기대요. 또 혼자 끙끙 앓지 말구요. 가만 보니까 현우씨는 약간 그런 기질이 있는 거 같더라구요. 알았죠?"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선뜻 나를 도와주겠다고, 같이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리자는 그녀들이 있었다.

"저는 아니, 우리는 현우씨 편이니까요."

나를 믿고 따라주는,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지수, 예린, 한세아가 있었다.

"제 품은 항상 열려 있으니 이렇게 언제든지 안겨도 된답니다? 후후. 그래도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한세아가 웃으면서 나를 놓아주었다.

거친 파도처럼 몰아쳤던 마음 속의 불안감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한결 나아진 내 표정을 확인한 그녀는 손을 잡아끌며 지수와 예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수씨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 못 들었죠? 저는 대강 들었지만, 현우씨는 기절해서 못 들었잖아요."

"그렇죠."

"제가 지수씨랑 예린이 불러놨어요. 짐을 싸던 중에 불러서 그런지 좀 툴툴거렸지만, 현우씨가 듣고 싶어 했다고 하니까 다 내팽개치고 오더라구요. 그러니까 저랑 말 좀 맞춰줘요, 알았죠?"

옅게 웃으며 너스레를 떠는 한세아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끔 그녀를 보면 묘한 이질감이 들긴 했지만, 한세아 자체는 착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만큼 선한 사람도 드물겠지.

무엇보다 예린이 한세아를 믿고 따르고 있지 않던가.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 그녀라서 참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

"그러니까 지수 네가 지하 터널 지날 때도, 하얀 덩어리들이 엄청 많았다는 거지?"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지수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와 한세아를 재회하기 전까지의 이야기 말이다.

"응. 근데 아저씨가 말한 것처럼 막 꿈틀거리진 않았어. 오히려 미동도 없었지. 나는 손전등 빛을 비추지 않아서 그런가? 굴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는 반응을 안 하던데. 그때는 도롱뇽 변종이 있는지도 몰랐어. 수원역에서 지내고 있을 때 알았지."

한세아의 예상대로 수원역으로 바로 떠난 지수는 매교역 지하 터널을 통해 이동했다고 했다. 그리고 손전등도 없이 움직였다는 이야기까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경악했지만, 당시에는 갱도에 물이 차 있지도 않았고, 여기저기 금간 벽에서 미세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고 하니 별 문제가 없었다는 말에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지수는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터널을 통과하고 있을 때는 내 생각밖에 나지 않아서 다른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도 같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내가 그녀에게 뭐라고 타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터널을 통과하면서 지수가 본 빛을 보지 못한 것은 아마도 지진이나 비 탓에 어딘가 무너졌거나 부피가 늘어나서 그런 것이리라.

깊은 지하 터널의 벽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나왔다는 것은 의아했지만, 밤눈이 좋은 지수만 인식할 수 있는 빛 일수도 있었다.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와 한세아가 터널을 통과할 때는 온갖 악조건들이 달려 있던 것이었다.

갱도에 물이 가득 차있었고, 도롱뇽 변종들의 군락지가 부화하기 직전이었으며, 실제로 도롱뇽 변종과 마주치기도 했으니 말 다한 셈이다.

"뭐, 수원역에 도착하고 나서는 저번에 아저씨한테 해준 이야기대로야. 흔적을 남기려고 백화점 건물에 들어갔다가 김태진하고 마주쳤고, 가방 하나 받고 쫓겨났지."

처음에는 덤벼볼까 하다가 이내 그만두고 우선 안전한 곳을 찾기로 했다고 한다. 지수와 예린은 곧 비가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유리창이 깨진 건물과 도로에 산재한 굴들을 피해 온 곳이 바로 이곳. 무궁화였다.

그 뒤로, 생각보다 오래 내리는 비에 의해 무궁화호에 갇혀 있다가 무슨 소리를 들었지만, 하필 그때 나무 인간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어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고.

"그러다가 분명 수원역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긴 했는데 딱 한 번만 울리고 안 들리더라. 소리가 들렸을 때 비도 안 오고 있어서 움직이기 딱 좋았는데. 그 나무 인간들 때문에···."

비가 오지 않은 날에, 수원역에서 딱 한 번만 울렸던 소리.

나는 한세아를 바라보았다. 마침 그녀도 나를 보고 있었다.

"세아씨. 아무래도 그거 총소리···같죠? 지수가 들은 소리가?"

"네. ···아마도?"

그 말인즉슨, 운만 좋았다면 내가 김태진에게 잡히지도 않았을 것이고, 누더기 변종 같은 끔찍한 괴물을 보지 않았어도 되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찌하랴.

이미 다 지나간 것을.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일 아침에 떠나기 위한 짐도 같이 싸며 사이좋게.

비록 잠을 잘 때가 오니, 이번에도 한세아랑 같이 자겠다는 예린에게 서운해 하는 지수가 있었지만 말이다.

결국 무궁화호에서의 마지막 밤도 나와 지수는 붙어서 자게 되었다.

"아저씨, 나 좀 안아봐."

"뭐?"

"안아보라고. 꼬리 때문에 불편해서 자리 좀 잡게."

지수는 등좌석에 눌리는 꼬리가 신경 쓰이는지 자꾸만 몸을 뒤척였다. 꼬리뼈 쪽에 붙어있는 꼬리는 눈치도 없이 살랑거리고 있었다.

"아, 빨리 안아보라고. 팔 좀 올려서."

"어어. 이렇게?"

나는 지수가 시키는 대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듯 잡았고, 지수는 몸을 돌린 채 내게 폭 기댔다.

나와 지수 사이에 있던 서늘한 밤공기가 밀려나고 빈자리를 지수의 체온이 채웠다. 가슴까지 따뜻해지는 온기에 몸이 천천히 노곤노곤해지기 시작했다.

"하아···. 좀 낫다. 오늘은 이렇게 잘거야."

지수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몸에 힘을 풀었다. 한껏 풀어진 표정은 지금 자세가 편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내가 최고지?"

그 모습에 살짝 장난기가 돈 나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움찔!

순간 지수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아름다운 호박색 눈동자가 가늘게 드러났다.

"······응, 아저씨가 최고야.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잘 자, 아저씨."

그녀는 빠르게 말을 쏟아내더니 눈을 감았고, 이내 고른 숨소리를 냈다. 순식간에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아니, 이번에는 확실히 잠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수처럼 바로 잠에 빠지지는 못했다.

"······."

예상치 못한 지수의 공격에 놀란 심장을 가라앉혀야만 했기 때문이다.

장난삼아 한 말에 진심이 돌아오니 뭔가 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기분이 좋은듯 웃으면서 잠든 지수를 잠시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움직인 그녀의 귀와 꼬리도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축 늘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너도 수고했어."

오늘은 확실하게 잠에 들었으니 어제와 달리 새벽에 깨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세아씨랑 친해지기도 했으니 푹 잘 수 있겠지.'

나는 그리 생각하며 지수를 좀 더 끌어안은 채 밀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비가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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