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98화 (99/497)

Chapter 98 - 98. 화서역 (1)

무너진 지하 터널에서 빠져나온 도롱뇽 변종들의 파도가 무궁화호를 지나치고 이틀이 흐른 지금.

비가 그쳤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무궁화호에서 벗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모든 준비를 마치고 문 앞에 섰다.

소방 도끼를 들고 몸풀기를 끝낸 지수.

도구 가방을 메고 허리춤에 걸린 총의 점검을 끝낸 한세아.

식량 가방을 어깨에 짊어진 채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는 예린.

"다들 준비 됐죠?"

"응, 혹시 모르니까 밑에 조심해. 아저씨."

내가 뒤돌면서 그녀들을 훑어보자, 고개를 굳게 끄덕이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신신당부하는 지수에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덜컥-

드르륵!

잠시 심호흡을 한 후, 문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그리고 힘차게 옆으로 밀어 문을 열었다.

휘이이잉-

동시에 습기 가득하고, 서늘한 공기를 품은 바람이 객차 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사람의 온기로 훈훈하게 달궈져 있던 무궁화호가 삽시간에 싸늘하게 식기 시작했다.

나는 손에 착 감기는 새로운 무기를 잠시 바라보았다.

'아저씨, 나 아저씨한테 줄 거 있어.'

'어? 오함마잖아? 이거 어디서 났어?'

'여기 근처에 공사 자재들 많았잖아. 거기 좀 뒤져 보다가 찾은 거야. 쇠지렛대랑 같이. 근데 나한테는 너무 안 맞더라. 아저씨는 힘 세니까 나보단 잘 쓸 것 같아서. 나는 도끼, 아저씨는 망치. 아저씨도 쇠지렛대보다 망치가 낫지?'

'어, 완전. 지수, 네가 최고야.'

'히히. 알면 잘하라구.'

어젯밤 모두가 잠들기 전에 지수가 내게 건네주었던 양손 망치.

망치 머리에 음각된 5kg이라는 표기, 망치 머리를 단단히 붙잡은 약 90cm 길이의 우레탄 자루, 미끄러짐 방지를 위해 고무로 둘러진 손잡이.

일명 오함마다.

군대에서 작업할 때는 자주 썼던 공구였지만, 지금은 강력한 근접 무기 취급으로 사용하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비록 무게가 무게인지라 휘두르는 속도가 느리고, 빗나가게 되면 역으로 노려지게 되지만, 지수의 말마따나 무기로서의 효용은 쇠지렛대보다 훨씬 낫기는 하다.

파괴력 하나만큼은 대단하기도 하고, 한세아가 말해줬던 것처럼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내가 모든 걸 다 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내가 위험해지면 지수와 한세아가 나를 도와줄 것이고, 그녀들이 위험해지면 내가 도와주면 된다는 말이다.

이윽고, 나는 머리를 흔들어 상념에서 벗어났다. 생각은 충분히 했으니 이제는 움직일 시간이었다.

잘그락- 잘그락-

찰박! 찰박! 찰박!

선로 주변에 수없이 깔린 자갈을 밟을 때마다 자갈들이 서로 비벼지며 소리를 냈고, 틈에 고인 물들이 자갈에 짓눌려 주변으로 튀었다.

잘그락!

찰박!

내가 무사히 바깥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일행은 지수를 선두로 삼아 예린, 한세아 순으로 내부에서 외부로 나오게 되었다.

"···생각보다 훨씬 끔찍하네."

지수가 중얼거리는 말에 나, 예린, 한세아는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어두워 제한되었던 시야에서 비가 그쳐 하늘이 맑아지자 그제야 탁 트인 시야로 주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휘이이이···

무궁화호 주변은 매우 고요했다.

다만.

도롱뇽 변종들이 뿜어낸 점액질이 젤리처럼 응고되어 자갈, 선로, 전신주, 넝쿨 가리지 않고 달라붙어 있어서 매우 더러운 느낌을 주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에 점액질이 씻겨 나갔을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끈질기게 버틴 점액질은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길목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방금 우리가 나온 무궁화호 하단의 바퀴 부분, 금속 기둥으로 이루어진 전신주, 고압 전선줄 죄다 그 모양이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좌측과 우측으로 쭉 일렬로 세워진 전신주 중 좌측 전신주 하나는 기둥 중간 부분이 휘어져 꺾어 있었다. 전신주에 달려 있던 고압 전선줄은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아마도 도롱뇽 변종들이 요란스럽게 난리쳤을 때 무너졌던 그 전신주이리라.

"흐음···."

지수는 주변은 찬찬히 살펴보았다. 킁킁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귀가 쫑긋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혹시 모를 위험을 찾는 듯했다.

"가자, 아저씨. 가요, 언니. 근처에 나무 인간은 없는 것 같으니까."

나, 예린, 한세아는 지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윽고.

우리는 괜스레 긴장감이 돌기 시작하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잘그락- 잘그락- 찰박··· 질퍽-

끝없이 이어진 묵빛의 선을 따라 서울, 그러니까 수원역 다음으로 오는 역인 화서역으로 향하고 있을 때, 나는 지수에게 말을 걸었다. 끊임없이 주변을 경계하면서.

"지수야, 우리 오늘 목표가 의왕역까지라고 했지?"

"응. 잠깐만, 아저씨."

지수는 벨트 가방에서 반듯하게 접힌 지도를 꺼냈다. 예전에 학교에서 보았던 것보다 좀 더 두꺼워진 지도였다. 아마도 여기저기서 주운 지도를 더 크게 엮은 듯했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지도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처음으로 가리킨 곳은 화서역.

"여기 보이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화서역까지 거리는 2km도 안 돼. 아마 금방 도착할 거야."

두 번째로 가리킨 곳은 성균관대역.

"다음은 성균관대역. 화서역에서 성균관대역까지 거리는 약 3km가 조금 안 되고."

마지막으로 가리킨 곳은 의왕역.

"여기가 오늘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의왕역이야. 근데 의왕역은 성균관대역에서 거의 4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거리가 좀 멀어. 그러니까 오늘 가야 할 총 거리는 11km 정도 일까? 그쯤 될 거야."

"흠."

지금이 해가 서서히 밝게 뜨기 시작한 이른 아침 정도이니, 해가 질 때까지 걷는다면 11km 정도는 약간 힘들 뿐 걷기 불가능한 거리는 아니다.

다만 내 마음에 걸리는 것들은 아직 어린아이인 예린이 일행으로 있다는 점과 화서역에 도착하기 전에 자리잡은 저수지의 존재이다.

"근데 최종 목표가 의왕역이라고 말만 한 거지. 사실 나는 성균관대역까지가 마지노선이라고 봐. 더 이동할지는 거기 도착해서 마저 생각해보자."

내가 잠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지수가 말을 이었다.

"아저씨도 아까 지도 봐서 알겠지만 우리가 가는 길에 저수지가 2개나 있더라고. 화서역 쪽에 하나, 의왕역 쪽에 하나. 뭐, 의왕역 근처 저수지는 수원역하고 거리가 꽤 있어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화서역 근처 저수지에 도롱뇽 변종들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구나."

"하아! 맞아. 그게 좀 걱정돼."

지수는 한숨을 크게 쉬며 한탄했다.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한세아도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또 따라 하는 예린.

일단 지수가 말한 것처럼, 우리보다 앞서나간 도롱뇽 변종들이 저수지에 새롭게 군락지를 형성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지하 터널에 자리 잡은 놈들의 군락지가 완전히 무너져 꽉 막혔다고 추정되는 지금 상황.

둥지를 잃은 도롱뇽 변종들이 과연 저수지를 그냥 지나갔을까?

그것들이 좋아하는 습하고 어두컴컴한 습지가 만들어져 있을 저수지를?

사실상 거의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사방으로 흩뿌려지듯이 덩어리진 점액질들이 잠식하고 있었으니까.

간혹 쭈글쭈글하거나 탱탱해 보이는 점액질 덩어리에 나무 껍질 같은 것이 박혀 있는 것을 보면, 선로에 하나, 둘 정도 있을 법한 나무인간들이 왜 보이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좋게 말하면 도롱뇽 변종들이 우리를 대신해 나무 인간들을 청소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전신주에 남은 놈들의 손톱 자국, 끊어진 고압 전선줄, 파헤쳐진 자갈밭을 보고 있노라면 그다지 좋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또한 나무 껍질만 간신히 보일 뿐, 다른 흔적이 보이지 않는 걸 보아 하니 도롱뇽 변종들이 나무 인간들을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이지.

몸서리가 절로 처지는 광경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저희가 더 조심해야죠. 결국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더 조심하게 움직이는 것뿐이기도 하고."

나, 지수, 예린은 한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하지만 너무 느리지 않게 묵빛의 선을 따라 앞으로 한걸음, 한 걸음씩 내디뎠다.

잘그락- 절그럭- 빠득! 철퍽- 찰팍!

화서역을 향해 걸은 지 체감상 10분이 지났을 무렵.

풍경이 뒤바뀌어 간다.

양옆으로 탁 트린 시야로 보였던 빌라, 아파트, 학교 같은 건물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빈자리는 과거에 논이나 밭으로 쓰였을 땅이 채우기 시작했다.

다만 모든 풍경이 변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아무리 걸어도 바뀌지 않고 똑같이 보이는 것.

대부분의 건물과 대지를 뒤덮은 넝쿨과 아파트를 지지대 삼아 하늘을 뒤덮을 듯 가지를 뻗친 거대한 나무들은 여전히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고 보였으니까.

빌어먹게도 싱그러운 녹색.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겠지.

······.

······.

'···아니.'

내가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하다못해 우리를 위협하는 괴물들만이라도.

꽈악-

나는 괜스레 묵직한 무게감을 가진 망치를 쥐며 굳은 얼굴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아저씨, 뭐 해?"

"어?! 그냥 생각을 좀. 하하···."

그러다가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지수 때문에 황급히 얼굴을 풀어야 했지만.

"앞에 조심해, 아저씨. 거기 물웅덩이 꽤 깊더라. 밟아서 괜히 바지 젖지 말고. 알려 줘서 고맙지?"

"어, 네가 최고야."

"···현우씨, 저는요?"

"물론 세아씨도 최고죠."

우리는 서서히 차오르는 불안감을 몰아내기 위해 억지로라도 밝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불안감이 싹트고 말았던 것이다.

그나마 안전했던 무궁화호에서 막 나온 참이라 괴리감이 더 심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이윽고.

우리는 건물들의 숲을 지나 겨우 알아볼 수 있는 논밭 경계선의 끝에 도착했다.

지평선 끝에 희미하게나마 화서역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지만, 걸음을 급하게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그토록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으니까.

보글···

보글···

굴.

수원역에서 지겹도록 본 굴.

논밭의 경계선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도롱뇽 변종이 만든 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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