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99화 (100/497)

Chapter 99 - 99. 화서역 (2)

휘이이이-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묵빛과 녹빛의 선이 끝없이 이어진 길을 따라 네 사람이 걷고 있다.

잘그락- 잘그락-

"뭔가 되게 조용하네."

나는 희미한 바람 소리를 들으며 중얼거렸다.

바람에는 언제나 그렇듯 싱그러운 풀 냄새가 섞여 있었고, 우리들의 코를 억지로 상쾌하게 만들었다.

"우리 이제 출발한 지 20분 정도밖에 안 됐는데, 벌써 지친 건 아니지?"

전방을 살피던 지수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나와 나란히 걸으며 가끔 귀를 쫑긋거렸다.

"뭐, 아저씨 말대로 조용하긴 해. 마치 이 주변에 우리 말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러니까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아.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니까."

"응?"

"주변을 둘러봐봐. 돌아다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도롱뇽 변종들이 여기를 휩쓸고 지나갔다고 해도 선로에서 멀리 떨어진 넝쿨밭 쪽에 멍청하게 서 있는 나무 인간 하나, 둘 정도 있을 법도 한데 말이야."

나는 선로의 좌측 영역을 채운 꽤 큰 부지의 논밭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무덤가에서 자라나는 칡 넝쿨처럼 땅을 넝쿨이 전부 뒤덮은 모습.

그것들의 꿈틀거림 외에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야생 동물들이야 겁먹고 도망쳤거나 애초에 수가 엄청 적게 남았으니까 이 일대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무 인간들은 다르다?"

"그렇지. 그것들이 겁먹고 도망칠 이유는 하나뿐이니까."

지수가 지금 나에게 해주고 있는 말은 우리가 처음 수원역에서 출발할 때 해주었던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한번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다들 잠깐 멈춰요. 저수지가 보여요."

-논밭의 구역이 끝나가고 저수지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리라.

나, 예린, 한세아는 지수가 시키는 대로 걸음을 멈췄다. 한세아와 예린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괜스레 가방을 고쳐 매었다.

꽈악-

나는 묵직한 망치를 양손으로 쥐며 전방을 주시했다.

우리가 있는 선로에서부터 좌측에 보이는 저수지까지의 거리는 대략 15m 정도.

도롱뇽 변종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거라는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저수지 근처는 여전히 매우 조용했다.

멀쩡하게 서 있는 금속 전신주, 멀쩡하게 달려 있는 고압 전선줄, 멀쩡하게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자갈밭, 끊어지지 않은 선로와 저수지 사이의 넝쿨들.

심지어 그동안 선로를 따라 움직이면서 보았던 점액질 덩어리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처럼.

마치 이곳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것처럼.

하지만.

"···불안한데요. 너무 노골적인데."

그렇다면 한세아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하지도 않았겠지.

얼핏 보면 아무 이상 없어 보이는 풍경이지만, 오히려 그러므로 우리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주변 이곳저곳 위치 가리지 않고 붙어 있던 점액질 덩어리들이 앞으로 쭉 있었다면 불안하긴 했어도 우리는 그냥 앞으로 계속 걸어갔을 것이다.

물론, 저수지를 경계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말은 아니지만.

저수지의 경계선이 시작되자마자 도롱뇽 변종들의 흔적이 싹 사라지다니, 누가 봐도 함정 같지 않은가.

게다가 이틀 동안 내린 비 탓인지, 그 전부터 내린 비 탓인지 지도상의 저수지 크기보다 지금 우리가 보는 저수지의 크기가 훨씬 컸다.

아무래도 수용 한계량을 넘어서서 범람한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수지의 물이 선로가 있는 곳까지는 침범하지 않았다는 것일까.

그러나 불행인 것은 수면 위를 뒤덮은 넝쿨 탓에 그 아래의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

"어? 새 소리가 들려."

지수의 귀가 쫑긋거리더니 시선을 위로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 소리가 들린다는 지수의 말에 나와 예린은 무의식적으로 한세아를 바라보았다.

"······? 왜 저를 봐요···? 저 아니에요!"

순간 모두의 시선이 한세아에게 집중되자, 그녀가 당황하며 말했다.

"쉿!"

지수가 손가락을 일자로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 예린, 한세아는 움찔하며 서둘러 입을 닫았다.

이윽고.

푸드덕-

비둘기 한 마리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비둘기잖아."

예전에는 그 수가 너무 많아져 유해 동물로 지정될 만큼의 물량을 자랑했던 비둘기.

새 주제에 날지도 못하고 걸어만 다닌다고 닭둘기라고 놀림을 받았던 비둘기.

그것이 저수지 근처에 내려앉은 것이다.

그 많던 살은 다 어디 갔는지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는 비둘기. 어쩌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눈을 뜨고 나서 처음 보는 야생 동물의 존재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동시에 불편한 마음도 들었다.

하필이면 비둘기가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앞으로 지나가야 할 길목으로 내려온 것이 아닌가.

괜히 저것이 저수지에 있을 수도 있는 도롱뇽 변종들을 자극할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잘 된 건가?'

어차피 우리는 저수지 옆을 통과해야만 하고, 우리 대신에 비둘기가 죽더라도 존재를 알 수 없는 위협을 미리 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녀석에게는 미안했지만, 일단 우리 일행이 사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지수도 했는지 혹여 비둘기가 놀라 도망가지 않게 몸을 낮춰 숙이라는 신호를 전했다. 지수의 꼬리도 눈치껏 살랑거리는 것을 멈췄다.

잘그락-

우리는 최대한 조용하게 몸을 낮췄고, 전방에 있는 비둘기를 지켜보았다.

구- 구-

녀석은 고개를 이리저리 꺾다가 자갈 사이에 있는 모래를 쪼아먹기 시작했다. 비둘기는 고개를 앞뒤로 흔들면서 점차 저수지 방향 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녀석이 자갈밭을 넘어 저수지의 수면으로 이동한 것이 보였다.

수면에 비친 제 얼굴을 보기라도 한 건지 고개를 좌우로 꺾는 녀석.

꿀꺽-

묘하게 긴장되는 순간에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저수지 쪽에 도롱뇽 변종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예상한 것이 맞다면 저 비둘기는 죽을 것이고.

우리의 예상이 틀렸다면 녀석은 물이나 마시고 자리를 무사히 뜰 것이다. 그리고 두 날개로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겠지.

나는 제발 비둘기에게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녀석이 죽어도 찜찜하고, 있을지도 모를 괴물에게 붙잡혀 위험을 미리 알려 줘도 찜찜하니까.

어찌 되었든 비둘기도 살고, 저수지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제일 좋은 결말 아니겠는가.

하지만.

푸드덕-! 푸드덕!

이변은 비둘기가 의미 없는 날갯짓을 할 때 일어났다.

푸화아악!

콱!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 회색의 팔이 수면 아래에서 전조도 없이 솟구쳐 나와 비둘기를 단박에 움켜쥔 것이었다.

···도롱뇽 변종의 팔이었다.

푸드덕-!

화들짝 놀란 비둘기는 거친 날갯짓을 해봤지만, 변종의 괴력에서 벗어나기에는 매우 역부족이었다. 도롱뇽 변종의 팔은 가차 없이 손에 붙잡힌 비둘기를 콱 쥐어 짜내듯 짓이겨 터트렸다.

콰드득!

회색 깃털과 새빨간 피가 변종의 손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그저 약간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휴식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비둘기는 순식간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살점 덩어리로 전락해 버렸다.

촤르륵-

이내, 살점 덩어리는 수면 아래로 빨려 들어가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런 씹."

나는 목까지 차오른 욕설을 간신히 참았다.

안에 무언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서서히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공기 방울.

그리고 굴들은 저수지 방향으로 가면 갈수록 더 많아 보였다. 아니, 이제서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 것이 옳았다.

비둘기에서 뿜어진 핏물에 반응을 한 것인지 잠자코 있던 놈들이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볼 수 있었던 비둘기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처럼 갑작스럽게 죽어서 퇴장하고 말았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최대한 조용히 숨을 내쉬며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고, 곧 이어질 상황에 대비했다.

나는 긴장감에 심장이 쿵쿵거리고 망치를 있는 힘껏 쥐어 도롱뇽 변종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지수도 도끼를 고쳐쥐었고, 한세아는 허리춤의 총을 언제든지 꺼낼 준비를 마쳤다.

······.

······.

체감상 시간이 10분 정도 흘렀을 무렵.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공기 방울이 올라오는 모습을 보여주던 수면도 다시 고요해졌다.

나는 간단하게나마 대형을 짜고 있던 일행을 손짓으로 불러 모았다. 지수, 한세아, 예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모두가 바싹 붙어 있게 되었다.

"왜 안 나오지? 무슨 소리 들려, 지수야?"

나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흠···."

피맛도 본 녀석들이 왜 발광하면서 뛰쳐나오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의 살점과 내장에 환장하는 놈들이 아니던가.

"혹시··· 지금이 낮이라서 그런 걸까요?"

한세아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다.

"아니면 저것들도 갑작스럽게 지내고 있던 환경에서 벗어나서 적응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둡고 습한 곳에서 살다가 여기는 물가이기는 해도 태양이 밝게 뜨고 있으니까요."

확실히, 한세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수원역이 무너질 당시에 살아남았다고 추정되는 도롱뇽 변종들은 지하 터널에서 겨우 빠져나온 놈들일 것이다.

적어도 옥상에 있던 도롱뇽 변종들은 죽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상황에 지금 저수지에 숨어 있는 녀석들이 나오지 않는 이유 중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달라진 외부의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그냥 지나가도 저것들이 반응 안 할 거라는 이야기예요, 세아 언니?"

지수가 한세아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을까요? 확실하진 않지만, 가까이 가지 않고, 최대한 조용하게 움직인다면 말이에요. 비둘기도 완전히 수면 근처에 가고 나서야 도롱뇽 변종들이 반응했잖아요."

한세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들키면 이거라도 던져서 유인하면 되죠. 싱싱하니까 괜찮은 미끼가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무정란이고."

그녀는 가방 속에 고이 보관되고 있는 달걀 2알을 꺼내 일행에게 알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나와 지수는 대번에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예린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고.

"···그럼 일단.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움직입시다. 그, 알은 다시 가방에 넣어 두시고."

자신이 힘겹게 낳은 아니, 힘들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녀 스스로가 낳은 알을 망설임 없이 미끼로 쓰자는 제안을 할지는 몰랐다.

알이 미끼로서의 효용이 있는가 없는가는 둘째치고 말이다.

무정란에게는 가차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한세아였다.

***

우리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잠잠한 수면을 드러내는 저수지를 보며 도롱뇽 변종들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잘그락-

나는 일행의 선두에 서며 조용히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나를 필두로 한 네 사람의 행렬은 화서역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간혹 수면 위에 둥둥 떠다니는 넝쿨 줄기가 꿈틀거릴 때마다 무기를 앞세우며 경계했지만, 다행히 우려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말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이윽고 푸른 지붕을 가진 구조물이 보였다.

화서역.

우리의 목표치인 삼분의 일 지점에 위치한 역.

그곳에 도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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