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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102화 (103/497)

Chapter 102 - 102. 성균관대역 (2)

"하아."

나는 무거운 숨을 내뱉으며 성균관대역 승강장을 둘러보았다. 자판기 속 남자가 마지막에 했던 말을 곱씹으면서.

"너무 자책하지 마요, 현우씨."

아직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한세아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지수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지만, 귀가 나와 한세아가 있는 쪽으로 쫑긋거리는 걸 보니 내 상태를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괜찮았다.

어차피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다. 안타깝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나는 신이 아니니까. 그냥 평범한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를 가장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은 고인을 욕보였다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찜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남자의 마지막 말이 계속 머리에서 맴돌았던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괜찮습니다. 그리고 지수야, 이 남자가 죽기 전에 한 말 들었지?"

"괴물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손이 너무 많다고 했었어."

나와 같이 자판기를 들었던 지수가 말했다.

'······손···. 괴물의 손이 너무 많···. 목소리··· 도망······.'

어떤 존재에 대한 경고를 전하려던 남자. 비록 목소리도 희미하고, 온전한 문장이 아니었지만 나와 지수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곳. 성균관대역 승강장 한복판에 시체들의 산을 만든 괴물에 대한 이야기였겠지.

자판기에 남은 커다란 손자국, 매우 많은 괴물의 손, 나무 인간들을 무더기로 죽일 수 있을 정도의 괴력과 체력.

마지막으로 ···목소리.

마치 우리가 애써 잊으려고 했던 변종의 특징을 말하는 것 같지 않던가.

AK&몰의 옥상에 있었던 누더기 변종을 말이다.

물론, 내 비약 가득한 추측일수도 있다. 제발 그러기를 바라고 있고.

내 추측이 추측으로 끝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주변을 좀 더 둘러봐야 했다.

"제 기우였다면 좋겠지만, 남자가 한 말을 듣고 하나가 떠오르더라고요."

나는 일행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면서 말했다. 지수, 예린, 한세아의 눈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공존하고 있었다.

"수많은 팔, 목소리, 커다란 손···. 수원역에서 본 누더기 변종이요."

"···그게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아저씨?"

지수가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그건 모르지. 이제부터 알아봐야 하고. 화서역에서는 나무 인간들만 있었는데 갑자기 성균관대역에서 변종의 흔적이 드러난 거잖아. 저 남자가 정신을 못 차리던 중에 내뱉은 말이니까 확실하지도 않고. 하지만 적어도 누더기 변종만큼 위험한 것이 여기를 지나갔다고 생각은 하고 있어."

"그럼 저희가 뭐라도 알려면 저 시체들을 뒤져 봐야겠네요···. 그게 아니더라도 이 주변을 살펴봐야 하구."

한세아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승강장 한복판에 쌓여 있는 시체들의 산으로 향했다.

장소 가리지 않고 우르르 죽어 있는 나무 인간들. 죽은 나무 인간들이 쌓여 만들어진 산.

휘이이이이-

"우욱···."

바람을 타고 퍼지는 놈들의 체액 냄새에 지수가 헛구역질을 했다.

한세아는 티 내지는 않았으나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을 보니 구역질을 간신히 참고 있는 듯했다.

예린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내 표정도 그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들 흩어지지 말고 꼭 붙어다닙시다. 다 죽은 것 같기는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지수야, 다른 소리는 또 안 들리지? 냄새는?"

"응, 아저씨. 아무것도 안 들려. 냄새는 저기서 나오는 체액이 너무 진해서 안 느껴지고. 미안."

"아냐, 뭐가 미안해. 일단 조심해서 가 보자. 예린이랑 같이 잘 따라오세요, 세아씨. 아, 예린아. 미안한데 다시 저것 좀 봐줄 수 있어? 아직 쓸 수 있지?"

"알았어요, 현우씨."

"네. 두 번 정도 더 쓸 수 있어요. 검은 입자가 보이면 바로 말할게요."

"부탁할게."

이윽고, 우리 네 사람은 승강장 주변을 돌아다니며 변종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벌집을 들쑤시는 행동일 수도, 별 의미가 없는 행동일 수도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확인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심연만큼 깊은 두려움이 마음속에 자리 잡은 후 였다.

그도 그럴게, 수원역의 누더기 변종이 아니더라도 그에 따르는 변종이 이곳을 휩쓸었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에게는 현실을 부정할 수 있게 해주는 무언가가 절실했다.

그것이 또 다른 흔적이든, 무엇이든.

어차피 의왕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시체들의 산을 지나쳐야만 한데다가, 약간의 시간을 투자해서 정체 모를 적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된다면 남는 장사이지 않겠는가.

애써 그리 생각하면서 움직였다.

찰박- 찰박-

찌덕···찌덕···

승강장을 걸어 다닐 때마다 조금씩 굳어가는 체액이 신발 밑창에 들러붙었다.

아래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역겨운 느낌에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도무지 얼굴이 펴지지 않고 있었다.

바로 그때.

"현우씨, 저기!"

한세아가 손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시체들의 산 중턱.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뒤로 조금 돌아가니 이질적으로 삐죽 튀어나온 하나의 팔이 보이게 된 것이다.

두텁고 새하얀 팔.

누더기 변종이 가지고 있던 팔이었다.

하얀 팔을 확인한 순간,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 머리를 강타하는 것이 느껴졌다.

심연 속에서 올라온 괴물.

그것이 살아 있었다.

그것도 우리를 앞지른 상태로.

"······."

"······."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눈을 씻고 다시 바라보아도 새하얀 팔은 여전히 산 중턱에 튀어나와 있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거기서 살아남았을 리가 없잖아."

지수가 새하얀 팔을 애써 외면하며 말했다.

"그냥 나무 껍질이 떨어져서 저렇게 된 거겠지. 응? 내가 한번 꺼내 볼까?"

지수는 도끼 끝으로 팔을 툭툭 건드렸다. 새하얀 팔은 외부 자극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도끼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흔들릴 뿐.

철퍽-

그리고 팔에 붙어있던 살점이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우리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 확실했다.

기이할 정도로 하얀 살점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너진다고?'

그 순간.

푸스스···

하얀 팔이 붙어있던 살점들이 완전히 떨어져 내렸고,

"오빠! 검은 입자가!"

고양이 눈을 발동시키고 있던 예린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와 동시에.

푸확!

[끼이이이익······]

[케르르륵······]

시체 더미 속에서 나무 인간들의 팔이 솟아올랐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기운없는 울음소리와 함께.

"······! 세아씨! 예린아! 뒤로 물러서!"

"힉! 조심해요!"

나는 기겁하며 곧바로 망치를 양손으로 꽉 쥐었다. 지수는 처음에 당황한 듯했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도끼를 치켜들었다.

"나 때문이야?!"

아니, 지수는 여전히 당황해 하고 있었다. 도끼를 들어 올린 것은 그동안 몸이 학습된 경험에 따라 거의 반사적으로 움직인 결과인 것 같았다.

그녀가 도끼로 새하얀 팔을 건드리자 시체 더미에서 나무 인간들의 팔이 솟아올랐으니 당황할 만도 했다.

"네 잘못 아니야!"

나는 그리 외치고는 어느새 상체까지 빠져나온 나무 인간의 머리를 향해 망치로 내려찍었다.

부우웅-

위에서 아래로 공기를 둔탁하게 가르며 떨어지는 망치 머리.

빠악!

쩌억!

망치가 나무 인간의 머리통을 산산이 터트리는 것과 동시에 옆에서 두개골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힐끗 바라보니 지수도 나처럼 나무 인간 하나를 골로 보낸 참이었다.

"퉷!"

망치는 파괴력 하나만큼은 끝내줬지만, 일 점으로 찍는 것이 아닌 면을 타격했기 때문에 내가 터트린 나무 인간의 체액이 사방으로 튀어 입에 들어가고 말았다.

서둘러 침을 뱉어 입을 비웠다.

토할 것 같은 냄새가 곧장 코로 전해진다.

"아저씨, 진짜 미안해! 나, 나는 이러려던 게-"

"네 잘못 아니라니까!"

"씨이! 왜 갑자기 일어난 거야···! 분명 아무 소리도 안 들렸는데!"

"···갑자기 움직였다고?"

나는 억울해하는 지수의 말을 듣고서 재빨리 시체들의 산을 훑어보았다.

들썩! 들썩!

[끄르르르르르!]

[키아아아악-]

[끼에에에에엑]

시체 더미가 사방으로 퍼질 것처럼 들썩거렸고, 그 안에서는 나무 인간들의 괴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과 여전히 미동도 없는 것이 보였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왜 그러한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머리가 남아 있는 나무 인간들이었고, 여전히 죽어 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는 건 머리가 없는 나무 인간들이었다.

다시 살아난 것인지, 죽은 척을 하고 있던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분명 처음 확인했을 때는 죽은 것이 확실해 보였건만!

바로 그때.

까그그극!

콱! 까그극! 콱! 까그극!

나무 인간이 손으로 바닥을 긁으며 산 바깥으로 기어 나왔다. 아니, 팔과 다리가 없는 나무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얽혀 줄줄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이런 씹!"

부웅!

퍼석!

상황 파악을 할 틈도 주지 않는 나무 인간들을 원망하며 나는 곧바로 망치를 휘둘러 놈들의 팔과 머리통을 산산이 터트렸다.

밖으로 나오기 위한 원동력을 잃어버린 그것들은 이내 축 늘어져 죽음을 알렸다.

그러나 저것조차 위장일지도 모른다.

"현우씨! 지수씨! 도망쳐야 해요! 수가 너무 많다구요!"

애처롭게 떨리는 손으로 총 한 자루를 겨우 들고 있는 한세아가 외쳤다. 그녀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전체적인 상황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그녀가 내린 답은 후퇴였다. 나는 뒤로 물러나서 시야를 좀 더 넓게 잡기 위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전보다 넓어진 시야는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확 와닿게 만들었다.

적어도 두 자릿수는 가뿐하게 넘을 시체들 중 절반에 가까운 나무 인간들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다.

둘이나 셋 정도면 모를까.

이런 개방된 장소에서는 상대 해야 할 수가 넷이 넘어가면 맞서기 힘들었다.

하물며 수십 마리에 달하는 나무 인간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지수야! 물러서! 세아씨랑 예린이 데리고 앞으로 가! 의왕역쪽으로! 나무 뿌리 타고 역사 넘고 있어!"

"아저씨는?!"

"금방 따라갈게! 먼저 가! 시간 없다고!"

지수는 입술을 세게 씹고는 몸을 돌려 한세아와 예린을 데리고 역사로 달렸다.

빠득! 빠가각!

찰박! 찰박! 찰박!

다급한 발놀림을 소리로 나타내기라도 한 듯 유리 조각과 체액이 튀는 소리가 요란하다.

부우웅!

빠악-!

그녀들이 현장에서 이탈한 것을 확인한 나는 마지막으로 망치를 휘둘러 발치까지 접근한 나무인간의 머리통을 터트렸다.

타탓 타타탓!

그리고 몸을 돌려 지수, 예린, 한세아가 뛰고 있는 방향으로 죽어라고 내달렸다. 여기서 미련하게 시간을 벌겠다고 버틸 필요도, 그럴 수도 없었으니까.

이윽고.

성균관대역 신축 역사를 폭삭 무너트린 거대한 나무뿌리를 어떻게든 타고 올라가고 있는 그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아아아악!]

[쉬익! 키에에에엑!]

까그극! 까극! 그그그극!

잘그락! 잘그락! 파바바박!

내 뒤에서 들려오는 나무 인간들이 바닥을 긁으며 기어 오는 소리.

"크흡···!"

나는 좀 더 빨리 다리를 움직였다.

여기서 그녀들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불과 60m 정도밖에 되지 않건만. 긴장으로 인해 각성한 뇌가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저씨! 내 손 잡아!"

어지럽게 서로 얽혀있는 나무 뿌리들을 밟고 무너진 역사 위로 먼저 올라간 지수가 내게 손을 뻗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녀의 시선은 나와 내 뒤를 번갈아 가면서 보고 있었고, 그 간격이 점점 짧아지는 걸 보니 나를 쫓고 있는 나무 인간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타악!

"잡았다···! 끄응···!"

"도와줄게요! 흐으읏!"

내 손을 잡아당기는 지수가 힘에 부쳐보였는지 한세아가 다급하게 다가와 힘을 보탰다.

나도 한순간의 실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콘크리트 파편과 나무뿌리들을 계속해서 발차며 몸을 위로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차악! 지지직! 지직!

긴장감에 뻣뻣해진 다리는 확실하게 벽을 딛지 못하고 헛발질이 수차례 이어졌다.

파악!

이내 돌출된 나무뿌리를 제대로 디딘 다리에 힘을 주며 생긴 반동으로 나는 폐허가 된 역사 위로 몸을 뉘일 수 있었다.

"허억! 허억!"

"하아, 학!"

내가 무사하게 올라온 것을 확인한 지수, 예린, 한세아는 눈에 띄게 안도하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진정시키며 흘깃 바라본 아래에는.

[끼아아아아아!]

[키에에에엑!]

[우어어어억-!]

사지가 온전하지 않은, 아니, 온전하지 않다 못해 몸통에 머리만 남아 있다면 어떻게든 우리가 있는 곳으로 기어와 괴성을 내지르는 나무 인간들이 가득했다.

신체가 멀쩡하지도 않은 주제에,

눈빛만큼은 온전한 살의를 담고 있는 괴물들이,

입을 벌리고, 팔을 뻗고, 머리를 쳐들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렇게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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