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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103화 (104/497)

Chapter 103 - 103. 성균관대역 (3)

"허억! 다들. 일어서요. 일단 여기서 최대한 멀어집시다. 허억. 저것들도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잠잠해질테니까. 어서요."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밑에 있는 나무 인간들이 위로 올라올 수는 없어 보였고, 우리가 있는 역사를 기준으로 길목이 완전히 막혀 있으니 아래쪽을 통해 빠져나오는 나무 인간들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당장은 안전하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여기서 숨을 돌릴 여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나무 인간들이 갑자기 되살아나 우리를 위협한 것처럼 언제 다시 또 다른 위협이 우리를 덮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저씨, 어디 다친 데 없지?! 응? 나 때문에···."

지수가 안절부절 못하며 울상을 지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안심시켰다.

"아까도 말했지만 네 탓 아니야. 정말로. 문제라면 떨어진 변종의 팔이지."

그래, 정말로 지수의 탓이 아니었다.

타이밍만 겹쳤을 뿐, 변종의 팔이 시체들의 산에 박혀 있는 이상 언젠가는 일어났을 일이었을 것이 분명하니까.

갑자기 누더기 변종의 팔이 무너지면서 죽은 나무 인간들을 되살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물며 그나마 입자가 가끔 보이는 예린조차도 이상 현상이 생기고 나서야 알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방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심스럽게 접근한 편에 속했다는 말이다.

시체들의 산에 다가가기 전에 예린의 고양이 눈으로 수차례 확인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변종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턱없이 적다.

내가 천운으로 거미 변종을 죽인 적이 있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천운이었고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마무리한 것이기에 별다른 정보를 얻지도 못했다.

거미 변종의 유해인 검은 나뭇가지.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도 없었건만, 왜 누더기 변종의 팔만 변화를 일으킨 것인지 모르겠다.

'···불에 타지 않아서? 정화된 것이 아니라?'

불현듯, 거미 변종의 사체를 내 손에서 뿜어진 푸른 불꽃으로 불태운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내 기억에는 남지 않았으나 한세아가 내게 해준 이야기니 거짓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검은 나뭇가지가 남기도 했고.

[키에에에엑!]

[끄르르르륵!]

생각은 나중에, 지금은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다.

밑에 있는 저 나무 인간들의 이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했다.

"후우-."

나는 심호흡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나무 뿌리들이 우측에 있는 고가도로를 타고 넘어와 있었다.

북부 역사를 짓누르듯 타고 올라간 나무 뿌리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건물이 무너진 모습이 보였다.

역사 건물 외벽을 파고들어 간 나무 뿌리들, 건물이 붕괴된 탓에 잘게 부서진 유리창들, 콘크리트 더미 사이에 삐죽 솟아 있는 쇠 파이프들.

그나마 원래의 외형에서 크게 바뀌지 않은 것은 푸른 칠이 된 철도역 승강장 지붕이었다. 금속 재질로 이루어진 지붕은 이리저리 찌그러지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갑시다. 돌출된 유리에 베이지 않도록 조심하고요."

"···응."

"현우씨도 조심해요."

의기소침한 얼굴을 하고 있는 지수는 여전히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낫다고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 내 손을 꽉 맞잡은 지수에게 내 마음이 잘 전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지수를, 한세아는 예린을. 우리는 각자 손을 잡은 채 의왕역으로 가는 길목으로 향했다.

빠각- 빠가각-

단단한 워커가 콘크리트 더미 사이에 위협적으로 튀어나와 있는 유리 조각을 잘게 부순다.

아그작- 부스스···

사람의 체중이 실린 발걸음에 콘크리트 부스러기와 나무 껍질 가루가 바람에 휘날려 멀리 퍼진다.

[···에에······엑]

역사에서 멀어질수록 뒤에서 들려오는 나무 인간들의 괴성 또한 멀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시야에서 사라진 지 시간이 조금 지나니 흥미를 잃은 듯했다.

텅- 텅- 텅- 텅- 텅- 어느새 철도역 승강장 지붕으로 디딤판이 바뀌었고,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속이 비어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나마 다행일까.

처음에는 승강장 지붕이 바닥으로부터 5m 정도 높이 차가 있어서 '어떻게 내려가야 하지?' 라는 걱정이 들었지만,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푸른 금속판으로 된 지붕 끝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무너졌는지 앞으로 갈수록, 끝으로 갈수록 지붕의 높이가 바닥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근처에는 아무 소리도 안나. 진짜야. ···그래도 조심해, 아저씨."

"알려 줘서 고마워, 지수야."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승강장 지붕의 끝에 도달했다. 지수는 한층 더 경계 어린 얼굴로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쿵

나는 지붕에서 떨어지자마자 곧장 망치를 들어 빠르게 고개를 사방으로 돌려 혹시 모를 위협을 경계했다.

다행히 지수의 말대로, 각종 파편과 부스러기말고는 위협적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조심해서 내려오십쇼, 다들.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내자, 지수, 예린, 한세아 순으로 지붕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타앗 ?탁

지수는 특유의 유연함으로 사뿐하게 내려왔고, 예린은 가벼웠기 때문에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한세아는.

-파악!

"꺅!"

"흡! 괜찮아요?"

떨어질 때 자세를 잘못 잡았는지 바닥으로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내가 그녀를 잡아줄 수 있어서 어디 다치지는 않았다.

잘 내려오다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비틀거린 거라 만약 내가 잡아주지 못했다면 바닥에 깔린 자갈에 의해 상처가 나고 말았을 것이다.

"넵. 잡아줘서 고마워요."

"아저씨, 어떡하지? 이대로 바로 의왕역으로 가야 되나? 어차피 오늘 목표가 의왕역이기는 한데···."

지수가 내게 의견을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높게 떠 있는 것을 보아하니 해가 저물기까지 시간이 충분히 남아 보였다. 그리고 지수가 말한 것처럼 당초 오늘 우리의 목표는 의왕역 도달이었다.

물론, 최대 목표치가 의왕역이라는 소리다.

성균관대역까지만 도착하더라도 무리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균관대역에 누더기 변종의 흔적과 되살아난 수십의 나무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아버린 이상 이곳에서 머물 수는 없었다.

누더기 변종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역 승강장에 있는 나무 인간들이 사방으로 퍼져 우리의 숨통을 조여올지도 모른다.

누더기 변종이 남긴 또 다른 흔적을 찾기도 전에 우리는 나무 인간들 탓에 역에서 급하게 도망쳐야만 했으니까.

만약 이 근처에서 숨을 곳을 찾는다고 해도 거기는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가?

혹시 아직 근처에 누더기 변종이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의왕역으로 바로 출발한다면 안전한가?

위로 올라갈수록 폐허가 된 도시가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애초에 안전한 곳이 있기는 할까?

그나마 철도 양 옆에 기본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높은 담이 나무 인간들의 이동을 방해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곳으로 올라오기까지 많은 수의 나무 인간들과 조우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 수가 아무리 적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번화가에 비해 상대적인 적음일 뿐, 의왕역에서도 성균관대역에서 본 것처럼 수십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을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상상이 나를 끊임없이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몰려드는 수십 마리의 나무 인간들로부터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까.

그리고 도망치는 동안 나무 인간들을 어디에, 어떻게 유인해야 하지?

부정적인 생각만이 줄지어 떠올랐다.

당연하겠지만 지금 떠오르는 모든 의문들은 직접 겪게 될 때까지 알아차릴 수도, 해결할 수 없었다.

"가자, 의왕역으로. 아직 해가 밝으니까 거기까지 갈 시간은 충분할 거야. 일단 가서 오늘 밤을 보낼 곳을 찾아보자. 세아씨도 괜찮으시죠?"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답을 내렸다.

어차피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험한 가시밭길일 것이 분명하고, 최대한 가시가 덜 난 곳을 밟으며 움직여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성균관대역은 가시가 아주 많이 나 있는 길이었다. 가시가 너무 많아 금방이라도 우리 몸이 꿰뚫릴 것 같은 그런 길.

의왕역은 도착하기 전까지 내용물을 모르는 상자이고.

결국 우리는 의왕역이 성균관대역보다 좀 더 안전하기를 바라며 이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그럼 어서 가죠. 뒤에서 나무 인간들 소리는 더 안 들리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세아 언니, 걱정하지마요. 놈들은 완전히 잠잠해졌으니까. 그렇다고 느긋하게 가자는 건 아니지만요."

그녀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몸을 돌려 다시 묵빛의 선로와 회색의 자갈밭이 끝없이 깔린 길로 발을 밀어 넣어 걷기 시작했다.

잘그락- 잘그락-

나는 찜찜한 얼굴로 잠시 뒤편, 그러니까 무너진 성균관대역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부디 내가 내린 결정이 조금이나마 옳았기를 바라면서.

부디 내가 그녀들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저 앞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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