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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104화 (105/497)

Chapter 104 - 104. 덕영대로 (1)

"······."

나는 가라앉은 얼굴로 말없이 앞으로, 그저 앞으로 걸었다.

"······."

"······."

"······."

지수, 예린, 한세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각자 머릿속에 여러 걱정들을 품은 채로 한동안 말없이 그저 발걸음을 옮길뿐이었다.

부스럭- 부스럭-

우리들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은 적막을 깬 것은 의왕역으로 항하면 향할수록 점점 수북해지고 있는 수풀이 내는 소리였다.

바스락! 바스락!

잡초를 크게 확대시켜 놓은 듯한 허리춤까지 오는 풀들이 바지에 사정 없이 비벼지며 긁히는 소리를 냈다.

부스스스스···

간혹 부는 바람에 수풀이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춤을 추었다.

간혹 보이던 묵빛의 선로는 넝쿨과 수풀에 막혀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성균관대역과의 거리가 1km쯤 떨어졌을 때.

철도 위에 있는 고속도로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왔을 때.

나는 알 수 없는 초조함에 딱 달라붙은 입술을 억지로 떼어놓았다.

"···풀이 점점 많아지네. 지수야, 여기 앞에도 저수지가 있다고 했지?"

"응. 아직 거리가 좀 있기는 한데, 철도 따라서 가다 보면 저수지 끝이 보이긴 할 거야.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지 지도 보니까 저수지가 꽤 큰데도 철도랑 붙어 있는 부분은 크지 않더라. 아니, 여기도 범람해서 다른 곳까지 물이 찼으려나···? 아무튼, 저수지가 보이면 의왕역은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해면 돼."

의왕역까지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희소식이었지만, 우리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다리에 엉키는 수풀은 많아져만 갔고, 땅에서 솟아오른 나무뿌리들이 자꾸만 발을 걸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없이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우리였지만 이내 완전히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무뿌리들이 앞으로 가야 할 길목과 주변을 서서히 잠식하던 것도 모자라 기어이 길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첩첩산중이네 진짜."

나는 길이 막고 있는 나무뿌리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성벽을 연상케 하는 높은 벽.

빽빽하게 얽히고 설킨 나무뿌리들이 길목을 완전히 틀어막고 있었다. 높이는 대략 5m 정도 되어 보였다.

넘어가려면 뿌리의 돌출된 부분을 밟고 넘어갈 수 있기야 할 것이다. 높이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발판 자체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넉넉한 편이었으니까.

바로 그때.

"···아저씨, 이상한 소리가 나. 저기 안에서."

지수가 손을 들어 나무뿌리의 벽을 가리켰다. 이동을 멈췄을 때부터 귀를 쫑긋거렸던 그녀. 일시적으로 감각을 청각에 전부 집중하고 있던 지수에게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

나와 한세아는 지수의 경계심이 가득한 시선을 따라 뿌리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침묵을 유지한 채로.

···사각 ···사각 ···사각

촤르르- 촤르르- 촤르르-

그러자 확실히 어딘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톱밥이 부스러지는, 나무가 갉히는 듯한 소리가 뿌리 벽 내부에서부터 미약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무언가 액체가 이동하는 소리와 함께.

"···속이 비어 있는 걸까요? 안에 뭐가 있는 건 맞는 것 같은데."

한세아가 의문스레 중얼거렸다. 그녀는 언제라도 총을 꺼낼 준비를 했다. 어지간하면 쏘지 않겠지만, 무언가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곧장 쏠 기세였다.

"예린아, 혹시 뭐가 보여?"

나는 벽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예린에게 물었다.

여러 개의 나무뿌리들이 얽혀 있는 줄 알고 있었던 벽은 알고 보니 하나의 거대한 나무뿌리였고, 그 안에 정체 모를 것이 들어 있다고 하니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으니까.

"으음···."

예린은 눈을 고양이 동공으로 만들더니 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눈동자는 나무뿌리를 할퀴는 듯 훑어보았다.

하지만.

"안 보여요. 꽉 막힌 느낌만 들고 저 안을 볼 수가 없어요. 검은 입자 같은 건 문 너머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예린은 고양이 눈을 풀면서 힘없이 말했다. 아주 약간의 사용이었지만, 눈에 가해지는 부담이 큰듯 예린은 손으로 눈가를 꾹꾹 눌러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지수야, 저쪽이 저수지가 있는 쪽이지? 나무뿌리가 쭉 이어진 방향."

"응, 맞아."

나무뿌리는 저수지가 있는 방향에서부터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나무뿌리가 커진 이유는 넘치는 수분을 들이킨 탓인 것 같았다.

실제로 나무뿌리 벽은 저수지가 가까운 좌측에서 저수지에서 멀어지는 우측으로 갈수록 높이와 두께가 얇아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무뿌리가 미약하지만 꿈틀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 여기 밟고 넘어갈 생각은 아니지?"

지수가 꺼림칙한 얼굴을 한 채 내게 물었다. 한세아와 예린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연히 아니지. 길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철도 위쪽에 국도 있지 않았어? 지도에 의왕시로 가는 길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처음에는 나무뿌리 벽을 보고 넘어갈 만 하다고 판단했지만, 이상한 소리를 내고 조금씩 움직이기까지 하는 나무뿌리를 본 내가 미쳤다고 저기를 억지로 넘어가겠는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면 어쩔 수 없었겠으나, 의왕시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은 철도만이 아니니 굳이 철도만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국도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니 한층 더 조심하게 이동할 필요는 있었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철도보다는 상황이 낫지 않겠는가.

"어어, 맞아. 저기 간판 보이지? 바로 저기야. 가까워."

나는 지수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고철·비철·철거전문 경성자원]

나무뿌리가 길게 이어진 곳 앞에 설치된 전봇대. 거기에 간신히 걸쳐져 있는 철판으로 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간판 앞에는 철망으로 된 낮은 담벼락이 있었다. 허리춤까지 오는 수풀보다 낮은 담벼락이기에 넘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가자, 이러다가 해 지겠어."

해는 충분히 밝게 떠 있었지만, 우리는 아직 의왕시에 진입한 것이 아니다. 거의 도착하기 직전이기는 해도 말이다.

또 주변에 띄엄띄엄 있는 마을 회관같은 건물들이 넝쿨과 나무뿌리들에 의해 무너져 있는 모습은 서둘러 움직여야 하는 근거를 대신해주었다.

땅에서 솟구친 나무뿌리들이 비닐 하우스를 찢겨 발기듯 해체시킨 것을 보면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불길한 상상력을 절로 들게 만들었다.

나는 아니, 우리는 비닐과 파이프가 지저분하게 해체된 비닐 하우스 마냥 뼈와 살이 찢어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빨리 의왕시로 가서 오늘 밤을 보낼 곳을 찾아야겠어요. 저수지랑 가까운 곳은 뭔가 더 불안하니까요."

"저도 같은 생각이예요, 언니. 저 국도는 직진길만 있으니까 쭉 걷기만 하면 바로 의왕시가 금방 나올 거예요. 그러니까 얼른 가요. 도로 양옆에 숲같은 게 있는 건 좀 불안하긴 해도 어쩔 수 없죠. 뭐, 있다고 해도 그냥 도끼로 콱!"

한세아의 말에 지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도끼를 살살 흔들었다. 일행의 불안감을 해소 시켜 주기 위해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지수의 노력이 가상했다.

부스럭- 부스럭-

철그럭- 철그럭-

우리는 수풀을 헤치며 담벼락을 넘었고, 국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나무뿌리 벽은 낮아졌지만 조금이라도 건들지 않기 위해 조심해서 걸었다.

철도와 국도 사이의 거리는 길지 않았으나 혹시 수풀 속에 무언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걱정과 울퉁불퉁한 땅바닥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신중하게 한걸음, 한 걸음씩 내딛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

시간이 좀 더 흐른 뒤.

마침내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거친 숨을 내쉬며 국도로 발을 들이밀 수 있었다.

"하아···. 피곤해서 기절할 것 같아."

"···저도요."

지수와 한세아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한탄했다. 확실히, 쉬지 않고 이동만 하다 보니 심력이 많이 소모될 만도 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중간중간 쉬는 시간을 가졌어야 했건만.

성균관대역에서 본 누더기 변종의 흔적과 되살아난 수십의 나무 인간들이 쫓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동안 휴식을 취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도 그래. 거의 다 왔다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예린이도 많이 힘들지? 조금만 더 힘냅시다, 다들."

"알았어. 걱정 하지마."

"아직 걸을 수 있어요! 제 걱정은 안 해도 된다구요, 오빠."

내 말에 그녀들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기합을 넣었다.

부스럭- 부스럭-

우리가 있는 국도를 따라 전봇대들이 일정 간격으로 세워져 있었다. 좌우측 수풀에는 자동차들이 간혹 주차되어 있었다.

아니, 주차보다는 방치가 옳은 말일 것이다.

주인을 잃은 자동차들은 애초에 시동이 걸리지 않은지 시간이 많이 지났고, 한 자리에 오래 있다 보니 넝쿨이 자동차에 있는 틈이란 틈은 다 비집고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시 외곽이라서 그런지, 농가 근처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가건물들이 여럿 보였다.

무너진 콘크리트 건물보다 한층 더 을씨년스럽고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무너진 가건물의 모습.

외부로 드러난 샌드위치 패널 사이를 파고들어간 넝쿨 줄기는 마치 혈관처럼 보였다.

자투리 슬레이트 지붕으로 만들어진 들쭉날쭉한 담벼락.

수풀 속에 놓인 녹이 잔뜩 쓸어 있는 컨테이너.

건물 외벽에 걸려 있는 찢어진 현수막.

그 모든 것들을 스치듯 눈에 담으며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의왕시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도로가 있는 사거리에 도착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 옆이 산이라서 뭐가 있을지 몰라. 아예 없을 수도 있고. 나도 산 근처로 가는 건 처음이야. 내가 최대한 경계는 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지수는 우리를 돌아보며 신신당부했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산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알고 있지 않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 수도, 나무가 거대하게 변한 것처럼 산에 있는 것들이 변했을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찌 되었든 우리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알았어, 조심해서 가자. 내가 앞장설게. 세아씨랑 예린이도 잘 따라와요."

"넵!"

한세아와 예린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망치를 양손으로 쥔 채 전방을 경계하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휘이이이-

끼익··· 끼익···

[293 덕영대로 297]

지금은 작동하지 않는 신호등 전봇대에 설치된 표지판이 바람에 흔들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이제 곧이야.'

의왕시 진입까지 남은 거리.

앞으로.

······1.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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