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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106화 (107/497)

Chapter 106 - 106. 덕영대로 (3)

"뛰어어어!!"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한세아 쪽으로 소리를 크게 내질렀다.

어차피 이미 들킨 마당이고, 일행의 굳은 다리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큰 소리가 필요할 것 같았으니까.

한세아는 정신을 퍼뜩 차리더니 예린의 손을 꽉 붙잡고 앞으로 뛰었다.

[키아아아아악!]

그녀들의 뒤로 수십의 나무 인간들이 차 밑에서 기어 나와 아스팔트 도로 위를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동안 허리춤까지 오는 수풀이 우리와 나무 인간의 시야를 가려주고 있어서 들키지 않고 왔건만.

이제는 그 요행도 끝이었다.

예상치 못한 나무 인간의 단말마가 도로 전체에 울려 퍼졌고, 잠들어 있던 나무 인간들을 모조리 깨우고 말았으니 말이다.

한세아와 예린이 달려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지수를 서둘러 일으켜 세웠다.

"지수야! 뛸 수 있지?! 뛰어야 해!"

"으, 응! 뛸 수 있어···!"

아직 고막을 강타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수였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에 그녀는 도끼를 꽉 쥐며 힘들게 대답했다.

지수는 비틀거렸지만 어떻게든 일어나서 몸을 지탱했다.

"현우씨! 어디로 가요?!"

"일단 앞으로! 그냥 쭉 달려요!"

어느새 나와 지수 옆에 도착한 한세아와 예린.

우리는 누구 하나 놓치지 않은 채 무작정 앞을 향해 죽어라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헉! 허억!"

"하아! 하아!"

"헤엑-! 허윽-."

서서히 해가 저문다.

서서히 거리가 가까워진다.

지상으로 내리쬐는 햇빛의 색이 점점 주홍빛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발광하며 가드레일에 머리를 박는 나무 인간들로 인해 검은빛 체액이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멀리 솟아오른 거대한 나무 뒤로 우리의 길을 밝혀주던 태양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수십의 나무 인간들이 버려진 차 밑에서 기어 나오며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불과 몇 분전만 해도 도로가 조용했던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사방에서 괴성이 난무했다.

나는 뒤편의 상황을 알기 위해 잠깐 고개를 뒤로 돌렸다가 다시 앞으로 향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뒤에서 벌어지는 악몽이 눈에 각인되듯 보였다.

쿵쿵쿵쿵쿵쿵-!

[크아아아아악!]

[기아아아악!]

우리의 뒤를 쫓아오는 수십의 나무 인간들이 있었다.

나무 인간들이 서로 먼저 가겠다고 팔을 이리저리 휘적거릴 때마다 왜소한 체구를 가진 나무 인간들이 넘어져 뒤따라 오는 나무 인간들의 발에 밟혔다.

아마도 어린아이나 노인이었을 왜소한 체구의 나무 인간들은 자신들의 몸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무게에 관절이 비정상적으로 꺾이거나 으깨졌다.

쾅! 쾅! 쾅! 쾅! 쾅!

일부 나무 인간들은 머리가 멀쩡하지 않은지 우리를 쫒지 않고 가드레일이나 폐차를 들이받으며 때려 부수고 있었다.

콰앙! 쿵! 빠아악-!

그것들은 자기들의 껍질이 깨지고 연약한 살점까지 찢어져도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검은 이끼와 체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현실에 지옥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지옥은 점점 거리를 좁혀 우리를 노리고 있었다.

'시발···!'

타탓- 타타탓!

부스럭! 부스럭!

"하악! 아···저씨! 오래는! 못! 뛰어!"

지수가 가쁜 숨을 억누르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장거리를 뛸 체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특히 한세아와 예린은 짐 가방을 들고 있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숨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부곡 중학교]

담벼락 너머 학교가 보이긴 했지만 건물 자체가 땅에서 솟구친 나무뿌리에 의해 폭삭 무너져 있었다. 아무리 급해도 저런 곳에서는 숨을 수 없었다. 숨을 공간이 없기도 했고.

"조금만! 조금만 더 힘내요!"

쿵! 쿵쿵쿵! 쿵쿵!

[끼아아아아악!]

우리를 뒤쫓아오는 나무 인간들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크게 괴성을 내질렀다.

오직 살의로만 점철된 죽음의 손길이 나, 지수, 예린, 한세아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무너진 학교 건물을 지나치자 바로 앞에 사거리가 보였다.

'지금이라도 방향을 틀어야 하나?!'

턱 끝까지 찬 숨을 억지로 내쉬며 그런 생각했지만, 잠깐의 망설임에 의해 그 기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말을 할 틈도, 다리를 멈출 틈도 없는 상황이기에 곧장 몸을 돌리지 않는 이상 방향을 꺾을 수 없었고 결국 사거리를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몸을 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어찌하지도 못한 채 길은 다시 직진만 할 수 있는 도로로 바뀌었다.

[끼에에에엑!]

콰쾅! 깽창! 콰장창-!

까가각! 까드드득!

뒤에서는 성난 나무 인간들이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차량을 무식하게 몸으로 밀치며 전진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콰당!

"악!"

예린이 넘어졌다.

예린이 매고 있던 식량 가방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기에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한 아이의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던 것이다.

와르르르!

퉁- 퉁퉁-

가방의 지퍼가 강제로 열려 안에 들어 있던 캔이나 통조림 따위가 바닥을 나뒹굴게 되었다.

"예린아!"

자기 손이 빈 것을 느낀 한세아가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다급함과 위기감이 가득 서려 있었다.

"지수랑 세아씨는 계속 달려요! 예린이는 제가 챙길 테니까! 절대 멈추지 마요!"

지지지직!

나는 급하게 다리에 제동을 걸며 아직 일어나지 못한 예린에게 달렸다. 바닥과의 마찰에 신발 밑창이 한껏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다. 화상이라도 입을 것 같은 열기가 다시 한번 내 몸을 달궜다.

입에서는 단내가 풍기고,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었지만.

누구 하나 버릴 수 없다.

절대로.

"예린아! 일어나! 오빠한테 안겨!"

"흑, 네···!"

넘어진 충격이 꽤 큰 듯 예린의 무릎은 다 까져 피가 송골송골 나고 있었다.

하지만 예린은 아픔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어도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려고 했다. 다만 아이의 다리가 예린의 생각처럼 움직이지 못할 뿐이었다.

나는 예린을 앞으로 안았고, 망치 자루로 아래를 받쳤다. 예린은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나를 꼭 안았다.

내가 느끼고 있는 열기와 다른 생명력이 느껴지는 온기와 박동이 다시 한번 내 몸을 덥혔다.

타탓! 타타탓!

아직 더 뛸 수 있어.

휙!

나는 예린이 매고 있던 식량 가방을 풀어 어느새 거리를 바싹 좁혀온 나무 인간들에게 던졌다. 가방은 느릿하게 날아가며 안에 들어 있던 캔들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쿵!

촤즈즈즉!

콰직! 콱! 콰득!

아스팔트 도로로 떨어진 가방은 바닥에 미끄러지다가 멈췄고, 각종 통조림들은 나무 인간들의 발에 밟히며 인정사정없이 터져 나갔다.

킁킁! 킁킁킁-

그와 동시에 잠시나마 나무 인간들의 이목을 끌만한 자극적인 내용물의 냄새가 퍼졌다.

[끄륵?]

[끄아아악!]

콰직! 까드드득!

당장 눈앞에 놓인 먹음직한 냄새를 풍기는 캔에 나무 인간들의 눈이 돌아갔다.

우적- 우적- 우적-

까드득!

놈들은 우리를 쫓는 것도 잊은 채 바닥에 엉망진창으로 흩뿌려진 통조림을 주워 먹기 바빴다.

정신없이 한 움큼씩 집어 무작정 입으로 집어넣는 놈들은 자신들의 입에 들어가는 것이 그냥 흙인지 통조림인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먹기 위해 손아귀 가득 집어 모조리 입으로 밀어 넣는 나무 인간들.

"허억! 허억!"

"흑. 오빠. 죄송해요. 흐윽···."

예린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과했다. 눈가를 닦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아니야! 괜찮아! 허억! 떨어지지 않게 꽉 잡아!"

"크흥! 네···!"

우적- 우적-

나무 인간들이 만찬을 즐기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식량 가방을 통째로 내주었다는 것은 뼈아픈 손실이었지만, 예린이 목숨을 잃는 것에는 비교할 수 없었다.

어느새 거리가 저만치 벌어졌던 지수와 한세아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지독한 피로감이 가득했고, 있는 힘을 다해 다리를 놀리고 있었지만 곧 한계에 다다를 것처럼 보였다.

나무 인간들과의 거리가 얼마나 벌어졌을까.

10미터? 20미터? 아니면 그 이하?

더 이상 뒤를 돌아볼 여유도 남지 않았다.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더 뛰어야 할까.

50미터? 100미터? 아니면 그 이상?

고개만 겨우 전방으로 고정시킬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내가 내던진 식량 가방이 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끌어 줄 수 있기를 바랐다.

"아, 저씨! 저기 표지판!"

지수가 헥헥거리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위를 가리켰다. 반으로 꺾인 파란 표지판이 보였다.

[←부곡 시장길 150m 장안중앙로→]

표지판이 나왔다는 것은 곧 옆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길이 나온다는 말이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방향을 꺾어야만 했다.

또다시 망설이다가 일직선 도로에서 나무 인간들과 추격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럴 체력도 남아 있지도 않았고.

"사거리 나오면 무조건! 방향 틀어요!"

나는 일행에게 크게 소리쳤다. 혹시나 못 들어서 서로 떨어지는 상황이 나오지 않도록.

"알았어! 헤엑!"

"하악! 하악-. 어디, 어디로 틀어요?!"

한세아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물었지만 섣불리 답할 수 없었다.

타탓! 타타타탓!

나는 계속 달리면서 쉴 새 없이 주변을 살펴보았다. 굳이 사거리로 빠지지 않아도 우리가 잠시나마 안전하게 숨을 수 있을 만한 건물이 있다면 바로 그곳으로 가야 했으니까.

하지만.

유리창이 깨진 컨테이너 집.

셔터가 무너져 내린 GS 칼텍스 주유소.

반으로 갈라진 채 흉한 내부를 훤히 드러내는 부곡동 청소년 문화의 집.

결국 사거리에 도달할 때까지 안전해 보이는 건물은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대체 어디로 가야···!'

나는 이를 악물며 끊임없이 생각했다.

최대한 멀쩡해 보이는 건물.

최대한 안에 아무도 없을 것 같은 건물.

두 조건을 충족시키는 건물을 찾아야만 했다.

[끄아아아아악!]

다시 뒤에서 나무 인간들의 괴성이 들려왔다. 식량을 순식간에 먹어치운 그것들은 여전히 배가 굶주린 상태였기에 자신들의 배를 채워줄 먹잇감을 얌전히 보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순간.

[부곡 스포츠 센터]

"······!"

불현듯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꺾어야 갈 수 있는 건물의 간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내가 목표한 곳은 스포츠 센터가 아닌 옆에 있는 부곡동 주민센터였다.

건물 외벽이 유리로 된 것이 불안 했지만, 아직 원형을 갖추고 있었고 건물도 넝쿨로 된 벽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어서 숨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왼쪽! 다들 왼쪽으로 꺾어요!"

나는 더 늦기 전에 황급히 외쳤다. 내 신호에 따라 지수와 한세아가 휘청거리면서 몸의 방향을 틀었다.

혹여 다시 넘어지는 인원이 생길까 싶어 그녀들이 방향을 트는 모습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다행히 넘어지는 인원은 없었다.

"저기! 주민센터로 들어가요! 넝쿨 담벼락이 있는 곳!"

그녀들은 말할 기력도 없는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민 센터로 움직일 뿐이었다. 예린을 안고 달린 탓일까. 한계가 온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끌기 위해 앞질러서 뛰었다. 지수와 한세아가 잘 따라오기를 바라면서.

이윽고.

나는 주민센터 앞 담벼락에 가장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타드드득!

타닥- 타닥-

'시민이 행복한 새로운 의왕'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는 넝쿨 벽을 위아래로 크게 벌렸다. 내 손에 밀려 올라간 넝쿨 줄기들이 자기들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나는 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로 그 너머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바닥에 넝쿨이 어지럽게 엉켜 있기는 했지만, 그뿐이었고, 다른 곳에 비해 안전해 보였다.

여기까지 온 이상 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했다. 무조건 이곳에 숨어야만 했다.

"헤엑! 아저씨! 어때?! 괜찮아, 거기?"

거의 다 와가는 지수가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얼른 들어와! 세아씨도요!"

"네헥-! 하아! 하아!"

우선 나는 예린을 데리고 넝쿨 벽 너머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내가 들어온 입구를 닫히지 않게 벌려 지수와 한세아가 들어오기 쉽게 만들었다.

뚜득! 두드득!

푸쉬익-

넝쿨의 체액으로 우리들의 땀 냄새를 지우기 위해 넝쿨 줄기를 조금 끊어 놓았다. 겸사겸사 예린의 무릎에서 나는 피 냄새도 막아야 했으니 말이다.

뒤이어.

우당탕!

촤즈즈즈즉!

지수와 한세아가 슬라이딩하는 것처럼 내가 열고 있던 출입구를 향해 몸을 내던졌다. 그녀들의 옷과 바닥이 마찰되면서 끌리는 소리를 냈다.

"악!"

"아흑!"

쿠션감없는 단단한 바닥에 곧장 부딪힌 그녀들은 앓는 소리를 냈지만 급하게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키에에에에엑!]

나, 지수, 예린, 한세아를 끈질기게 쫓아온 나무 인간들의 괴성이 바로 지척에서 들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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